본문 바로가기
게임 리뷰

포켓몬스터 레드·그린 (1996)

by 눈다랑어 2024. 8. 7.

바야흐로 휴대용 게임기 전성시대다. 기술 상용화의 일등 공신은 제품의 소형화다.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40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닌텐도는 1980년 게임 워치를 발매, 지금도 통용되는 십자 키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닌텐도는 갈고닦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1989년 게임보이를 출시했는데, 이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인기를 누렸다. 

 

레드와 그린 두 가지 맛

게임보이가 출시되었을 무렵 닌텐도의 주력 상품은 패미컴이었다.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이하 레드·그린)이 발매된 1996년, 새로운 거치형 콘솔 닌텐도64가 발매되었다. 패미컴의 시대에 출시된 제품이 슈퍼패미컴 막바지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제 아무리 휴대용이 깡패라지만, 게임보이의 수명은 한계에 다다랐다.

 

<레드·그린>이 출시되면서 게임보이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또한 <레드·그린>은 닌텐도의 휴대기기 불패신화를 열어젖힌 장본인이기도 하다. 포켓몬의 무엇이 그리 특별했던 걸까.

 

<마더, 1989>는 포켓몬스터를 논할 때 빠뜨리면 섭섭한 작품이다. <레드·그린>의 게임 디자인은 <마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어린이 주인공, 현대 배경, 여덟 개의 목표 등 기본적인 틀을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 옆 마을에 찾아가는 것은 모험과도 같았다. 생소한 거리를 연락수단 하나 없이 걸어간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었더랬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 용돈이 적다보니 교통비는 사치였다. 교통비를 아껴 오락실에 가고 싶은 마음에 그랬더란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조촐한 여정일지라도 어린이에겐 도전이다.

어린 시절의 향수는 <마더>의 근간이며, 어쩌면 <레드·그린>의 근간일지도 모르겠다. 태초마을에서 상록숲으로, 회색 시티에서 달맞이산으로 이동하면서 겪은 일들은 나의 유년 시절 작은 모험을 떠올리게 한다.

 

태초마을

언제 들어도 정겨운 마을 음악.

향수와 설레임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1번 도로

박자가 빨라지면서 흥겨운 나들이를 떠난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신전생 시리즈의 악마

<레드·그린>은 <마더>의 작법을 충실히 따랐다. 그것뿐이었다면 오늘날 같은 위상은 없었을 터다. <레드·그린>이 여타 RPG와 차별화되는 점은 몬스터의 취급이다. 그간 물리쳐야 할 적(고블린, 가고일 등)으로 표현되었던 몬스터가 <레드·그린>에서 적이자 든든한 동료로 등장한다. <진 여신전생, 1992>은 몬스터의 역할을 확장시킨 작품이다. <레드·그린>은 <여신전생>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악마들을 걷어내고, 동물을 데포르메한 캐릭터로 채워나갔다.

 

다양한 포켓몬과 만나 도감을 채우는 과정은 산으로, 강으로 뛰놀며 곤충을 잡던 옛 추억을 상기시킨다. 다소 혐오스러울 수 있는 현실의 곤충과 달리, 포켓몬은 때로는 귀엽게, 폼나게 그려졌다. 포켓몬 세상에서 약육강식은 잘 표현되지 않았다. 길고양이가 새를 물어 죽이듯 페르시온이 구구를 사냥하는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양한 갈래로 진화하는 이브이

플레이어가 경험을 쌓을수록 포켓몬도 강해진다. 스탯과 성장이야말로 RPG의 근원이다. 걔 중에는 성장을 클래스 변경 등의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한 게임들도 있었다. <레드·그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물 고유의 특징인 '진화'를 성장에 집어넣음으로써 세계관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포켓몬이 이브이다.

야돈과 야도킹,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눈에 연관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포켓몬은 동식물을 모티브로 삼았다. 동식물과 진화만큼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도 드물 것이다. 포켓몬은 진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변화하는 생물을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신생대에 살았던 거대 상어들이 점차 소형화된 것과 달리, 포켓몬은 진화할수록 몸집이 커지고 우락부락하게 바뀐다. 이런 게 픽션의 장점 아닐까.)

 

 

몬스터 수집 장르를 창조하다.

레드 버전의 스프라이트 (151마리 + a)

<레드·그린>의 인기는 TV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방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입소문으로 퍼지던 인지도는 어느새 전국 단위의 사회 현상으로 변해 있었고,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확장되면서 비디오게임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돈을 쓸어담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북미 시장의 지지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레드·그린>이 보여준 150 종류의 물량 공세는 가히 충격이었다. 북미 진출 때 내건 캐치 프레이즈는 Gotta Catch 'Em All. 수집형 장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초기 포켓몬의 핵심 시스템, 통신 교환

누구나 물물교환을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게임 팩, 트레이딩 카드, 카세트 테이프 등등 별의별 물건들을 내놓았다. 벼룩시장에서 내 물건을 팔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온라인 게임이 없었던 시절, 비디오 게임에서 누군가와 교류한다는 것은 상상 못 할 일이었다. <레드·그린>은 <레드>와 <그린> 두 가지로 버전으로 출시되었으며, 각 버전마다 등장하는 포켓몬이 달랐다. 요즘 더블 팩 발매는 상술로 치부되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세상에, 다른 사람과 포켓몬을 주고받다니.

 

통신 교환의 메리트

<포켓몬 GO, 2016>는 혼자 유유자적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설계되었으나,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레이드를 진행하는 사회적 성격을 갖췄다. 30여 년 전 <레드·그린>이 딱 그랬다. 친구들과 포켓몬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누고, 포켓몬을 주고받는다. 포켓몬이 음지의 취미를 넘어, 인싸 기질이 다분한 컨텐츠로 발전하는데 이유가 있다.

 

2021.08.08 - [게임 비평] - 포켓몬 GO (2016)

 

포켓몬 GO (2016)

2016년 포켓몬 GO는 전례 없는 대성공을 이뤘다. 포켓몬 GO는 직접 거리에 나가 포켓몬을 잡는 게임이다. 기존의 포켓몬스터 게임이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면 포켓몬 GO는 현실에 있는 지역,

daisy1024.tistory.com

 

* 이 글은 레드 버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보이 컬러로 구동한 레드 버전

<레드·그린>은 '세상을 구하는 모험'을 지향하지 않았다. 포켓몬과 함께 여행하고, 8개의 체육관을 모두 정복하여 챔피언에 도전한다.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포켓몬을 전부 포획하는 것이야말로 <레드·그린>의 궁극적인 목표다. 

 

파이리를 골랐을 뿐인데 고생길이 열렸다.

JRPG는 선형적인 장르다. 아이러니하게도 JRPG의 대표인 <드래곤 퀘스트>(이하 드퀘) 시리즈는 비선형적 구조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다양한 곳을 탐험할 수 있고, 샛길로 빠져 카지노에 몰두하기도 한다. 마을 NPC들의 회화가 진행도에 따라 바뀌는 잔재미도 있다. 초창기 <드퀘>는 JRPG가 무엇인지 잘 보여줬지만, 여러모로 JRPG 답지 않은 희한한 작품이었다.

 

<레드·그린>은 <드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플레이어는 태초마을부터 갈색시티까지 일직선형 구조에 노출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플레이 경험은 각자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에 어떤 포켓몬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다. 이상해씨를 골랐다면 갈색 시티까지 프리패스였을 것이다. 꼬부기를 골랐다면 비교적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다. 그러나 파이리라면 어떨까, 파이리는 회색 시티, 블루 시티 모두 불리 상성을 극복해야 한다.

 

그놈의 귀염둥이한테 내 리자드가 줘터진다.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레드·그린>은 스타팅 포켓몬에 따라, 어떤 포켓몬을 잡을 것이냐에 따라 플레이 경험이 달라진다. 갈색 시티를 정복하면 탐험 구역이 확장된다. 무지개시티로 향할 수도 있고, 보라시티를 탐험할 수도 있다.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레드·그린>이 비선형적 레벨디자인을 갖고 있느냐고 따져보면 그렇지가 않다. <레드·그린>은 플레이어 스스로 자유롭게 진행한다고 믿게끔 설계되었다. 이는 초창기 <드퀘>를 연상케 한다. <드래곤 퀘스트, 1986>는 정해진 수순으로 플레이해야 클리어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탐색 가능한 구역이 많아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레드·그린>은 자칫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구조를 슬기롭게 극복해 냈다. 플레이어가 헤매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되, 다양한 선택지(포켓몬 조합, 기술 배치, 탐험)로 무장하여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상성의 극대화

가위바위보식 상성은 게임의 다양성을 증폭시켰다. 제 아무리 강한 포켓몬이라도 상성 앞에서는 쩔쩔매기 일수다. (1세대 에스퍼는 예외) 상성도 무진장 많아, 웬만한 헤비 게이머가 아니면 상성을 달달 외우기 어렵다. 불, 풀, 물, 독, 에스퍼, 노멀, 격투, 땅, 비행, 전기, 얼음 등등... 총 15개나 되는 속성들. 최종 엔트리는 6마리, 어떤 속성으로 파티를 구성할지 고민이다. 여기에 151마리 포켓몬이 더해졌다. 포켓몬 한 마리당 기술을 4개나 골라야 한다. 일견 선택 장애가 올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포켓몬에 대한 이해가 공략의 키 포인트다.

스토리 공략에서 중요한 점은 파티원 구성이 아니다. 상대 포켓몬에 대한 이해도, 속성에 대한 지식이 훨씬 중요하다. 예컨대 상대가 야도란(물, 에스퍼 타입)을 꺼낸다면, 이쪽에서 전기나 풀 타입으로 공략하는 게 좋다. 풀 타입은 대개 풀/독 듀얼 타입으로 이루어져 있어, 야도란의 에스퍼 공격(독 타입에 2배)을 맞는다면 치명상이다. 풀이 물에 유리하긴 하지만, 정황 상 전기 타입 포켓몬을 내보내는 게 유리하다.

 

아이들도 깰 수 있는 비결

이처럼 야도란을 알고, 속성을 알면 대전이 훨씬 쉬워진다. 전투를 마치면 상대가 어떤 포켓몬을 꺼낼지 알려주고, 플레이어에게 포켓몬을 바꿀 기회를 준다. 상대가 야도란으로 나온다면 썬더를 꺼내 전기구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노가다를 강요하던 여타 다른 게임들과 달리, <레드·그린>은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포켓몬을 접한 사람도 전기 타입이 물, 비행에 유리하다는 걸 안다.

 

삐삐에 대한 소문, 사실 여부를 떠나 흥미롭다.

 

포켓몬의 개성은 주로 외모와 생태에서 비롯되지만, 능력 차이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예를 들어 닥트리오는 스피드, 롱스톤은 수비력에 특화되어 있다. 심지어 같은 롱스톤이라도 개체별로 차이를 보인다.

 

개체별로 스탯이 조금씩 다르다.

 

괴력, 번개, 눈보라를 기술머신으로 가르친 모습

배우는 기술도 천차만별이다. 기술은 레벨업으로 배우는 게 기본이지만 기술머신으로만 가르칠 수 있는 기술도 있다. 또한 캐릭터의 컨셉 상 배울 수 없는 기술도 많다. 이러한 특색은 통신 대전과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 대전 컨텐츠에 대한 수요는 <포켓몬 스타디움, 1998>의 개발에 영향을 끼쳤고, 전국 대회가 개최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켓몬 마니아들 사이에서 엔드 컨텐츠로 인정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젤다와 메트로이드

비전머신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아깝지 않다. 풀베기, 파도타기가 없으면 당장 진행이 안 되고, 괴력이 없으면 특별한 장소에 다다를 수 없으며, 공중날기가 없으면 이동에 제약이 걸린다. 특별한 능력을 얻어 던전을 돌파하는 구성은 <젤다의 전설, 1986>에서 비롯되었다. 금이 간 벽에 폭탄을 설치해 숨겨진 길을 찾아내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부메랑을 던져 스위치를 건드린다. <메트로이드, 1986>는 비선형적 레벨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나치게 비좁아 갈 수 없었던 길이, 특수능력 모프볼을 얻으면 굴러갈 수 있는 길로 바뀐다. 탐색의 범위가 늘어나는 것이다.

 

초대 <젤다> <메트로이드>는 어린이가 깨기 어려운 게임이었다. 심지어 성인이 해도 어렵다. 길 찾기부터 고역이고, 친절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후속작에선 이런 문제를 점차 개선해,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 <슈퍼 메트로이드, 1994> 즈음되면 이용자 편의성을 많이 신경 쓴 티가 난다. 

 

 

2022.12.31 - [게임 비평] -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젤다의 전설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젤다의 노선은 슈퍼마리오, 소닉, 테트리스 같은 게임들과 결이 달랐다. 그곳엔 진짜배기 모험이 있었다. 미지의 영역

daisy1024.tistory.com

친절한 NPC

<레드·그린>의 대상 연령층은 <슈퍼 메트로이드>보다 훨씬 어렸던 모양이다. NPC들과 대화하면 심심찮게 힌트를 준다. 특수능력을 사용하는 방식도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변했다. 게임 초반, 상록시티에서 심부름을 마치고 태초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속 시원한 진행을 보여준다. 90년대 중반 게임 중에 <레드·그린> 만큼 이용자 편의를 신경 쓴 타이틀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랜덤 인카운터를 피해 턱을 넘나드는 장면

 

이 앞에 어떤 포켓몬이 기다리고 있을까?

한때 전설의 포켓몬 취급을 받았던 미뇽

<레드·그린>은 포켓몬마다 출현 조건을 다르게 하여, 희소성이 구분되도록 선을 그었다. 예를 들어 상록 숲에서 피카츄의 출현 확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1~10%) 연분홍시티에선 미뇽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는데, 미뇽은 일반적인 루트로 포획할 수 없다.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한 그 시절에, 친구가 미뇽을 잡았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늘어놓았다. 쉽게 알려주지 않는 친구와 나의 줄다리기 끝에, 드디어 미뇽의 출현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렵사리 잡은 미뇽은 육성조차 난관이었다. 이미 6번째 체육관까지 온 터라 스토리 진행에 써먹기도 애매하고, 레벨업은 무지하게 더뎠다. 아마 통신 교환으로 육성 난이도를 낮추라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빡센 건 변하지 않는다.

 

1세대 최강의 포켓몬

약해빠진 미뇽은 신뇽, 망나뇽이 되면서 거물로 성장한다. 스토리 최종장을 장식하는 목호(와타루)의 망나뇽은 많은 이들에게 좌절을 안겼다. 비록 쓸 수 있는 시간은 짧지만, 망나뇽은 밥값을 톡톡히 하는 포켓몬이었으나, 망나뇽을 키울 바에는 켄타로스를 쓰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용을 포기하고 소를 선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희귀한 포켓몬이 당연히 세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때였다. 당시에는 정보 공유가 거의 없어, 켄타로스나 아쿠스타의 강함에 주목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압도적인 체급의 망나뇽, 얼음에 약한 것이 흠이다.

수집가들은 희귀한 제품에 열광한다. 그러나 희소함이 가치 판단의 모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희소하면서도 아름다운, 스토리까지 얹혀진 그런 상품을 원한다. (뱅크시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뇽은 그런 조건에 딱 들어맞는 포켓몬이었다. <레드·그린>은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잘 알고 있는 타이틀이었다.

 

저 멀리 구석탱이에는 무인 발전소가 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아이템이 널려있다. 플레이어는 아이템을 얻으려다 찌리리공과 마주친다. 찌리리공은 마치 미믹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 마치 이곳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잠들어 있다는 듯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다다른 공간에 새가 있었다. 

 

무인 발전소는 썬더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었다. 썬더는 무시무시한 전기를 내뿜으며 내 포켓몬들을 족족 빈사 상태로 만든다. 미뇽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압박이다. 과연 전설의 포켓몬이다.

 

쌍둥이섬은 한 술 더 뜬다. 저 멀리 새가 보인다. 분명 전설의 포켓몬이다. 그런데 도무지 갈 수가 없다. 플레이어는 쌍둥이섬에 감춰진 비밀을 풀어, 조류의 흐름을 바꿔 숨겨진 길을 찾아내야 한다. 가벼운 퍼즐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도전이다. 

 

프리저를 만났을 때의 희열

<레드·그린>은 엔딩 이후의 세계를 그렸다. 당시로선 흔치 않은 일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레드·그린>의 목표는 ①챔피언 등극 ②도감 완성이다. 챔피언이 된 플레이어는 미발견 포켓몬을 찾아 느긋한 여행을 떠난다. 신선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블루시티동굴은 초반부터 떡밥을 뿌리고 있었다. 두 번째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동굴은 언젠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속에 낙점된다.

 

블루시티동굴

블루시티동굴은 클리어 이후에 열리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플레이어의 레벨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포켓몬으로 가득하다. 동굴 깊은 곳에 무언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홍련섬에서 발견한 일기가 머리를 스친다. 그 포켓몬이 여기에 있는 걸까?

 

이 떡밥이 여기서...

 

동굴 깊은 곳에서 만난 뮤츠는 엔딩 이후의 세계의 대미를 장식한다. 뮤츠의 강함은 레벨(70)부터 잘 드러난다. 뮤츠는 엔딩 이후 재방문한 사천왕이 보통 트레이너처럼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레드·그린>의 에스퍼는 약점이 없어 매우 까다로운 타입으로 꼽힌다. (고스트 = 버그로 인해 무효, 벌레 = 좋은 기술이 없고 쓸만한 포켓몬도 없음) 뮤츠는 후딘의 상위호환으로 설계되었으며, 후딘에게 부족한 내구력까지 갖춘 완성형 포켓몬이었다.

 

 

전설을 넘어 신화로

 

인기몰이를 하던 <레드·그린>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있었다. <레드·그린>은 초창기부터 도시전설 같은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있었다. 홍련섬 포켓몬 저택의 일기에서 언급된 뮤가 실존한다는 소문이었다. 이 무렵 상트안느호 오른쪽의 트럭을 밀면 뮤가 출현한다는 루머가 사실처럼 확산되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디오게임 루머

더미 데이터가 버그로 인해 노출되면서 뮤를 잡았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탐사가 진행되면서 뮤 버그를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방법이 증명되었다. 버그도 갖가지였다. 셀렉트 BB, 텔레포트 등등 온갖 꼼수로 뮤가 뛰쳐나왔다. 뮤는 더 이상 설정 속 존재가 아닌 현실의 포켓몬으로 거듭났다.

 

뮤를 둘러싼 루머는 <레드·그린>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고, 뮤를 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늘어나자 게임프리크는 뮤를 배포한다고 선언한다. 이 순간 제작자의 장난으로 구현되었던 버그 포켓몬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가 됐다. 이후 포켓몬은 매 시리즈마다 게임 속에선 얻을 수 없고, 배포로만 얻는 환상의 포켓몬을 꾸준히 추가한다. 게임프리크는 여기에서 재미를 크게 봤는지, 포켓몬스터 극장판 개봉, 각종 오프라인 이벤트에서 배포 포켓몬을 풀며 어른들의 지갑을 달달하게 빨아먹었다. 게임의 역사를 넘어 마케팅의 역사에서, 90년대 문화에서 손꼽힐 만한 족적을 안팎으로 남긴 타이틀이다.

 

태초마을에서 출발해 집으로 되돌아오는 여정, 역시 집이 최고다.

 

 

평가 점수 ★★★★★

게임의 상업적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걸작. 이제 와서 <레드·그린>을 RPG 장르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RPG가 좋아서 포켓몬을 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지난 40여 년 간 RPG는 비디오게임의 주류 장르로 활약하며 구름처럼 팬을 몰고 다녔다. 포켓몬은 브랜드 자체가 일종의 장르화에 성공하여, 더 이상 RPG의 하위 장르로 분류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커져버렸다. <레드·그린>은 장르의 발전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스마트폰 시장에서 유행하는 수집형 게임의 원형이자, 캐릭터 게임의 바이블이다. 

 

<레드·그린>은 당대의 유명 작품의 기조를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그려나갔다. 마치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이 홀 앤 오츠의 I can't go for that의 그루브를 따서 만들었듯이, Billie Jean을 상징하는 무브였던 문 워크가 실은 제프리 다니엘스, 제임스 브라운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연상케 한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의 위대한 순간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초창기 게임프리크의 무브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무모해 보였던 게임프리크의 도전은 게임이라는 그릇으로 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포켓몬 프랜차이즈의 대성공은 훗날 게임프리크를 옥죄이는 결과로 나타나지만, 이때로서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일 뿐이었다.

'게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0) 2024.08.07
포켓몬스터 금·은 (1999)  (0) 2024.08.07
페르소나 5 택티카 (2023)  (0) 2024.01.14
인스크립션 (2021)  (0) 2023.11.26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2022)  (0) 2023.07.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