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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포켓몬스터 금·은 (1999)

by 눈다랑어 2024. 8. 7.

포켓몬스터는 첫 작품부터 역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가 될 조짐을 보였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대성공은 각종 산업으로 확대되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기성세대조차 피카츄가 뭔지 알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런 상황에서 후속작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높아져 있었다. 무려 <포켓몬스터 레드·그린, 1996>(이하 레드·그린)의 후속작이다. 성공한 시리즈의 2편은 큰 변화 없이 출시할 때가 많다. 유비소프트를 보고 우려먹기라고 욕해도, 익숙한 국밥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생각 외로 많다. 더욱이 한 편쯤 우려먹는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거의 없으니.

 

2023.08.22 - [게임 비평] - 포켓몬스터 레드·그린 (1996)

 

포켓몬스터 레드·그린 (1996)

바야흐로 휴대용 게임기 전성시대다. 기술 상용화의 일등 공신은 제품의 소형화다.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40년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닌텐도는 1980년 게임 워치를 발매

daisy1024.tistory.com

 

게임프리크는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포켓몬을 조금 추가해, 편의성을 손보고 다듬으면 그걸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쉬운 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적은 인원으로 부단히 매달린 결과 꼬박 3년의 세월이 흘렀다.

 

<포켓몬스터 금·은>(이하  금·은)의 볼륨은 당시로선 놀라울 정도로 컸다. 기술적 한계는 당대 최고의 프로그래머였던 이와타 사토루가 해결해 주었다. 2개의 지방을 모두 구현하는 통 큰 결정 또한 그의 몫이었다. 시대적 한계가 뚜렷했던 과거에는 프로그래머의 수준에 따라 개발력이 요동치곤 했다. (존 카멕이 없었다면 <둠, 1993>의 미친듯한 최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게임프리크는 이와타 사토루와의 협업으로 기술력을 얻었다. 게임프리크 역시 끈질지게 게임 개발에 매달렸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임했던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실제로 <레드·그린>의 디렉터 타지리 사토시는 <금·은>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경영자의 길을 걷는다.

 

 

인트로에서 금·은의 지향점을 찾다

 <금·은>은 1세대 포켓몬을 대거 인트로에 등장시켰다. 바다 생태계를 보여주는 셀러, 잉어킹, 라프라스를 필두로, 마스코트 포켓몬 피카츄와 푸린, 전미가 사랑한 포켓몬 리자몽이 차례로 지나간다. 포켓몬은 초창기의 괴랄하기까지 한 스프라이트를 버리고, 애니메이션에서 접한 귀엽고 멋진 형태로 다듬어졌다. 그야말로 1세대의 이상향이다.

 

포켓몬 팬이라면 잉어킹, 피카츄, 리자몽을 모를 리가 없다. 신작 포켓몬이라곤 인트로 막바지에 등장하는 2세대 스타팅 포켓몬(치코리타, 브케인, 리아코), 오프닝 화면의 칠색조(or 루기아)가 전부다. 초반에 1세대 포켓몬을 늘어놓아 친숙함을 표현하고, 막판에 2세대 포켓몬을 배치해 자연스러운 끼워팔기를 시도했다. 칠색조는 TV 애니메이션 1화, 루기아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공개되었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포켓몬은 치코리타, 브케인, 리아코가 전부다.

 

새로운 포켓몬은 대체 어디에?

초반에 마주치는 포켓몬은 더더욱 노골적이다. 캐터피, 뿔충이, 구구, 꼬렛, 꼬마돌, 쥬뱃. 새로운 포켓몬은 꼬리선, 부우부, 페이검 정도로, 출현 시간대까지 고려하면 새로운 포켓몬을 연달아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명색이 첫 관장인데 피죤을 쓴다.

체육관 관장은 한 술 더 뜬다. 체육관은 새로운 포켓몬을 선보일 절호의 기회. 그런데 보이는 건 어째 1세대 포켓몬들이다. (구구, 피죤, 딱충이, 스라크) <금·은>은 1편의 확장판 같은 구성을 취했다.

 

비선실세 오박사

공박사는 연구소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채, 중요한 소임은 죄다 오박사가 맡았다. 튜토리얼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 역시 오박사다. 이쯤 되니 공박사가 불쌍해진다. 

 

전통의 악당 로켓단

인트로, 야생 포켓몬, 체육관, 오박사, 로켓단 등등... <금·은>은 철저하게 1세대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2세대 포켓몬이 희생되었다. 야생 포켓몬은 부실하고, 체육관은 2세대 포켓몬을 홍보하는 장소로 잘 쓰이지 못했다. (밀탱크, 강철톤, 킹드라 정도만이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포켓몬 2세대는 야생, 체육관 어느 쪽에서도 사랑받지 못했다. 새로운 포켓몬을 사용하게끔 유도하려면 우선 포획이 쉬워야 한다. 적절한 강함과 육성 난이도, 타입의 희소성까지 갖춰지면 금상첨화다. 이 모든 것을 만족하는 2세대 포켓몬은 메리프-보송송-전룡뿐이다. 불쌍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전설이 메인 스테이지에 오르다.

1세대 포켓몬은 레드, 그린, 블루, 피카츄 총 4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전설의 포켓몬은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표지 모델로 꼽히기엔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레드·그린>의 표지모델은 리자몽, 이상해꽃이 차지했다.)

 

<금·은>은 표지 모델은 물론, 인트로부터 전설의 포켓몬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기조는 최신작까지 쭉 이어져, 이제는 전설 이외의 표지 모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180도 뒤집혔다. 전설의 포켓몬에 얽힌 이야기는 전작의 포켓몬 저택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여정의 막바지에 공개되는 데다 뮤츠 외의 떡밥은 찾아볼 수 없다. <레드·그린>에 등장하는 전설의 포켓몬은 스토리에 녹아드는 존재가 아닌, 숨은 요소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 엔딩을 포함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주시티엔 오래된 전설이 전해진다.

<금·은>은 전설의 포켓몬의 이야기를 대폭 늘렸다. 또한 전설의 포켓몬과 마주치는 이벤트를 이야기 중간에 집어넣었다. 이 이벤트는 라이벌과 마주치는 공간에서 일어나기에 못 보고 지나치기가 어렵다.

 

도주하는 포켓몬들

불탄탑의 봉인이 풀리자 앤테이, 라이코, 스이쿤이 차례로 눈을 뜬다. 이들은 성도 지방 전역에서 랜덤 인카운터로 출현한다. 만나자마자 도망치는 전설의 포켓몬들. 한 번 마주치면 도감에 기록되어, 현재 위치를 보고 도망 루트를 선점해 포획하는 방식도 새로웠다.

 

전설의 개 포획은 일종의 사이드 퀘스트이자, 랜덤 인카운터에 의외성을 더해주었다. 플레이어는 전설의 개 포켓몬을 통해 인주시티의 전설이 허구가 아닌, 언젠가 칠색조가 방울탑에 돌아오리란 걸 확신하게 된다.

 

좋은 재료에 양념을 더하다

<포켓몬스터 크리스탈 버전, 2000>(이하 크리스탈)은 <금·은>의 확장판이자 완전판이다. 제작진은 전설의 포켓몬의 서사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전설의 포켓몬 스이쿤과 주인공이 마주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또한 전설의 개를 다 잡지 않으면 칠색조를 만날 수 없어, 원작의 설정과 달리 게임 속 연관성이 부족했던 점을 채워 넣었다. 스토리 진행 상 반드시 전설의 개를 마주치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 전설의 포켓몬은 숨은 요소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건 껍데기뿐

<금·은>은 인트로를 시작으로 야생 포켓몬 배치, 체육관조차 1세대 포켓몬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얼핏 보면 <레드·그린>과 TV 애니메이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제작한 타이틀처럼 보인다. 단조롭고 엉성했던 1세대 스프라이트를 뒤로 한 채, 각종 미디어, 굿즈 등으로 익숙해진 포켓몬을 그대로 게임 속에 구현한 게 2세대 <금·은>의 역할이었다.

포켓몬의 이미지는 대부분 2세대에서 비롯되었다. (左 : 1세대, 右 : 2세대 텅구리의 스프라이트)

시리즈 2편의 법칙에 따르면(어디까지나 내 주장이다.) 속편은 굳이 도전적일 필요가 없다. 1편의 성공을 2편으로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시스템 개편이야 가려운 걸 긁어주는 정도면 족하다. <금·은>은 비주얼 업데이트를 단행했다. 이거야말로 팬들이 원하는 것 아니었던가. (이미 피카츄 버전부터 싹수가 보였다.) 그러나 <금·은>은 일반적인 2편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은 타이틀이다.

 

모험을 떠날 때 주인공의 엄마는 요일과 시간을 묻는다. 게다가 용돈을 저축해 주겠다니. 인트로의 친숙한 포켓몬에 한껏 고무된 플레이어, 전작과 유사하게 어린아이가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는 플롯을 갖췄다. 분명 큰 틀은 같은데 조금씩 변주를 준다. 플레이어는 익숙함에 젖어 색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2세대 포켓몬은 유독 1세대의 연장선이란 느낌이 강한데, 이는 제작진이 의도한 사양으로 보인다.

 

 

아쉬운 포케기어 기능들

새롭게 추가된 전화

<금·은>은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갈아엎었다. 우선 포케기어를 살펴보자. 포케기어에서 쓸 수 있는 기능은 총 네 가지다. 첫째 현재 시간, 둘째 지도, 셋째 전화, 넷째 라디오 순이다. 현재 시간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능은 당시엔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픽 발전에 힘입어 지도도 보기 편하게 바뀌었다. 문제는 나머지 기능이다.

 

시대가 변했다. <금·은>이 발매된 1999년은 휴대전화가 제법 보급되었던 시기다. 직장에서는 이메일, 휴대전화로 단문을 보낸다.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화려한 벨소리에 감탄한다. 이는 한국 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 시티폰이 상륙했을 무렵, 누구나 머지않은 미래에 휴대전화가 상용화되리란 걸 직감했다.

 

전화는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금·은>의 전화는 어색하다. 언제 어디서든 전화를 걸 순 있는데 매번 정해진 답변이 흘러나온다. 마치 자동 응답기가 대답하는 것 같다. 전화를 걸어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상대방을 호출하는 개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화가 유의미한 순간은 수신자 입장일 때뿐이다. NPC를 친구 등록하면 "이쪽으로 와서 한 판 붙자" 따위의 이야기를 한다. 네임드 NPC가 진행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주겠다고 호출할 때도 있다. 전화는 시대상을 잘 반영한 재미있는 장치이지만,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써먹기엔 패턴이 너무 부족했다.  

 

라디오

라디오 역시 마찬가지다. 라디오는 채널 수도 적고, 패턴 역시 턱없이 부족해 매번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유일한 순기능은 마을 BGM을 바꾸는 것 정도. 그러나 포케기어 화면을 벗어나면 새로운 BGM만 흘러나오지, 라디오 멘트는 출력되지 않는다. 멘트를 보려면 반드시 포케기어 화면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금·은>의 라디오는 엄밀히 말해 라디오로 보기 어렵다. 

 

채널을 틀어놓은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배경음악이 덧씌워져 BGM이 꺼진다. 어찌 이럴 수가. <금·은>은 라디오를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이다. 라디오 타워는 사건의 핵심 장소로 쓰였고, 주파수를 맞춰 문제를 해결하는 퍼즐도 있다. 그런데 정작 기능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게 아쉽다.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 2012>에서 깊은 밤 라디오에 의지해 지루함을 달래는 그림을 기대했건만.

 

앞서 포케기어를 신나게 깠지만, 어찌 보면 부당한 트집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발매된 게임 중에 전화, 라디오 기능을 멋지게 구현한 게임은 드물었다. <금·은>은 하드웨어의 제약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포케기어는 분명 아쉬운 기능이지만, 게임의 평가를 깎아내릴 정도의 결함은 아니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백 배 낫다.

 

 

대전의 양상을 바꾸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들 한다. 포케기어의 실패는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나온 부산물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작도 마찬가지, <레드·그린>의 배틀은 단조로웠다. 마무리는 파괴광선, 30% 빙결을 노린 눈보라 난사, 무분별한 땅 가르기로 결정되는 배틀. 전술은 결여되어 있고, 승패는 운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한다. 좋은 포켓몬을 잡는 것조차 운의 영역이었다.

 

<금·은>은 특수 스탯을 특수공격, 특수방어로 세분화했다. <레드·그린> 시절 후딘의 특수 스탯은 무려 135,  지금의 후딘이 유리대포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이때의 후딘은 하이드로펌프, 눈보라를 가볍게 견뎌내던 괴물이었다. <금·은>의 새로운 시스템은 후딘의 내구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5에 달했던 특수 방어가 85로 대폭 떨어져, 안 그래도 낮은 HP가 유독 낮아 보였기 때문이다.

 

특수 스탯의 분리는 훗날 4세대 <다이아몬드·펄>에서 완성되었다. 타입과 상관없이 물리, 특수를 세분화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대전의 양상 자체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금 ·은>이 닦은 초석이 있었기에 <다이아몬드·펄>의 물리, 특수 분리 시스템이 빛날 수 있었다. 배틀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 흔히 <루비·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펄>을 이야기하지만,  <금 ·은>의 역할 또한 결코 무시되어선 안 될 것이다.

 

<레드·그린>은 PvP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타이틀이었다. 포켓몬은 같은 종일지라도 개체마다 능력이 다른데, 스탯이 높은 포켓몬을 얻으려면 포켓몬을 무작정 잡는 수밖에 없었다. <레드·그린> 시절의 PvP는 보너스 컨텐츠처럼 여겨졌다. 모든 게 원시적인 그때에도 배틀에 미친 악귀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탯이 좋은 포켓몬을 얻기 위해 무한한 노가다에 뛰어들었다. 포켓몬 악귀들이 이리 많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눈에 띄게 발전된 편의성

악귀들의 염원이 제작진에게 닿았나 보다.  <금·은>은 편의성을 대폭 업그레이드했다. 가방을 항목 별로 세분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포켓몬 박스, 레벨업 경험치, 포켓러스, 비전머신 사용이 편해지는 등 확연히 발전된 행보를 보였다.

새로운 육성 시스템, 교배(알까기)

실전 배틀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배, 흔히 알까기라고 불리는 행위다. 교배는 어버이의 뛰어난 성질을 물려받고, 나쁜 성질을 취사선택을 통해 배제할 수 있었다. 또한 포켓몬마다 교배기(egg move)가 존재해, 코산호의 미러코트를 꼬부기가 이어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육성의 재미가 한 층 배가된 것이다. 유저편의를 고려한 알찬 패치였으나 현실은 차가웠다. 알까기로 좋은 포켓몬을 얻을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탓이다. 어차피 라이트 유저 입장에서는 <레드·그린> 시절이나 <금·은> 시절이나 배틀 준비가 어렵게 느껴진 건 매한가지다. 결국 알까기도 사전지식이 있어야 도전할 수 있는 법이다.

 

포켓몬의 도구

<금·은>의 배틀 전략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금·은>은 포켓몬에게 소지품을 줄 수 있다. 초기 소지품은 덤 같은 느낌으로 기획되었던 모양인지, 배틀의 구도를 바꾸는 도구는 좀처럼 없었다.

 

2세대의 패왕 잠만보

당시에 유행했던 도구 중에 박하열매란 것이 있었다. 이 아이템은 수면 상태가 된 포켓몬을 깨우는 성질이 있어, 잠자기와 박하열매를 넣고 단 번에 체력을 회복하는 전법이 유행했다. 악명 높은 먹다남은음식도 이때 나온 도구다. 먹밥과 탱커형 포켓몬(막이)의 궁합은 가히 괴멸적이었다. 어떤 대회의 결승전에서 핀치에 몰린 라프라스가 선제공격발톱 + 절대영도를 터뜨려 일격에 팬텀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도구는 서서히 배틀의 흐름에 녹아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막이 포켓몬의 악명이 시작되었다. 저주를 거듭 쌓고 잠자기로 회복하는 잠만보. 특수방어가 높아 특수 어태커로는 답이 없었다. 길동무로 동귀어진을 시전하거나, 괴력몬의 크로스춉을 박아 넣는 것 정도가 대책으로 떠올랐다. 혹은 텅구리의 어마어마한 결정력에 힘입어 돌파하거나.

 

이때 무장조가 나타났다. 잠만보가 없었다면 특공에 취약한 무장조는 설 자리가 제한되었을 것이다. 잠만보와 무장조의 대면 상성은, 잠만보가 불대문자라도 채용하지 않는 한 무장조의 압승이었다. 무장조가 없었다면 썬더의 입지 또한 축소되었을 것이다. 잠만보, 무장조, 썬더, 최강의 스위퍼 텅구리까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얘를 무슨 수로 잡나...

여기에 2세대 특유의 노력치 보정도 거들었다. 2세대는 아무 포켓몬이나 닥치는 대로 때려잡아도, 모든 스탯의 노력치를 한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막이 포켓몬은 이 규칙의 최대 수혜자였다. 약점을 잡아도 일격으로 쓰러뜨리기 힘들 정도로 모든 포켓몬이 단단한 시기였다. 썬더 수준의 멧집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전작의 주력기들은 죄다 칼질당한 상태였다. 파괴광선은 반드시 후유증이 생기고, 눈보라의 얼음 상태는 몇 턴 뒤 해빙되게 바뀌었으며, 비정상적으로 확률이 높았던 땅 가르기는 30% 확률로 조정되었다.

 

1세대의 주력기가 하향되자 사람들은 다양한 전법을 찾아냈다. 화력이 낮은 포켓몬은 아싸리 맹독을 배웠다. 턴 낭비를 유도하는 이상한 빛, 앵콜, 공중날기 등에 주목한 것도 이때였다. 부족한 결정력은 스탯을 올려주는 랭업기로 메꿨다.

 

잘 키운 한 마리가 모든 포켓몬을 쓸어버린다. 어설픈 어태커를 여럿 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서포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림자 분신, 고속이동으로 버프를 쌓고, 바톤 터치로 버프를 넘겨준다. 상대의 어태커를 전기자석파로 약화시키고, 장판을 깔아 아군 포켓몬의 멧집을 극대화시킨다. 준비가 끝난 상태로 등장한 텅구리는 기대에 응답하며 해트트릭을 꽂아 넣는다.

 

카렌도 잠만보한테 맞아보면 생각이 달라질 터다.

대전의 양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그러나 창과 방패 중 방패가 더 강한 기형적인 현상은 지루함을 유발하여 대전에 진심인 플레이어들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다. (결국 잠만보가 문제다.) 이 문제는 포켓몬이 차차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특별한 장소

방울탑에서

<레드·그린>은 관동 전역에 탐험 요소를 배치한 작품이었다. 쌍둥이섬, 무인발전소 등의 장소는 스토리 진행과는 무관하게 배치된 장소였고, 이곳을 탐험하는 플레이어에게 전설의 포켓몬이란 보상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금·은>은 전설의 포켓몬에게 할당할 자원이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스이쿤, 앤테이, 라이코는 필드 전역을 누비는 신세가 되어,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장소는 마련되지 않았다. 어쩌면 용량 문제로 대형 던전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알프의 유적

<금·은>에는 전설의 포켓몬 외에도 특별한 장소가 있는데, 첫 체육관을 돌파한 후 바로 만날 수 있는 알프의 유적이 그  주인공이다. 유적의 비밀을 풀면 안농이 출현하는데, 안농의 종류는 각 알파벳에 대응하므로 총 26마리가 된다. 힘들게 26마리를 모아도 이렇다 할 보상이 없다. 한때 안농 도감을 완성하면 세레비를 잡을 수 있다는 루머가 파다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우스운 일인지, 나 역시도 속았다.

 

<크리스탈 버전>은 안농에 대한 떡밥을 좀 더 풀어주었다. 퍼즐 공간에서 특별한 행동을 하면 비밀 문이 열리고, 방 안에 안농문자로 된 글이 쓰여있다. 이것이 안농이 쓴 것인지, 고대 인류가 남긴 것인지, 외계인이 남긴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안농문자를 알파벳으로 치환해 알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뿐이다. 

 

온갖 떡밥을 뿌린 결정체

안농은 포켓몬 세계의 대표적인 맥거핀이다. 허나 무의미한 존재라고 해서, 퍼즐을 풀고 안농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임이 빛바래는 건 아니다. 우연히 도달한 장소가 유적과 연결되어 있을 때의 놀라움. 유적에서 별 생각없이 라디오를 틀었을 때, 정체 모를 소리가 흘러나올 때의 소름 돋치는 경험. 왕가의 무덤을 발견한 고고학자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인간은 불확실한 것에 매력을 느낀다. 게임프리크는 안농의 모든 걸 알려주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단편적인 정보를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한다. 알 듯 말 듯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안농 롱런의 비결이다.

 

 

분량은 2배, 재미는 1.5배

신세계가 열렸다.

체육관 탐방을 마치고 엔딩을 향해 나아갈 무렵 새로운 세계가 지도 위에 펼쳐졌다. 전작의 팬이라면 좋아 죽을, 관동 지방이 나타난 것이다. 2개의 지방을 하나의 소프트로 즐긴다. <금·은>을 최고의 포켓몬 시리즈로 꼽는 사람들은 대개 이 부분을 지적한다. 게임프리크는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분명 대단한 규모임에도 결점에 눈에 띄게 밟힌다. 그것도 포켓몬의 근본이 살아 숨 쉬는 관동 파트에서.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쯔꾸르 게임에 심취해, 각종 자료실을 드나들며 알만툴로 만든 게임을 다운받았다. 제법 많이 즐겼음에도 남은 기억은 단편적이다. 대부분의 알만툴이 턴제로 제작되는데 반해, 당시로선 드물게 액션 RPG에 도전한 작품이 있었다. 제법 괜찮은 퀄리티에 만족하던 찰나, 막바지 마을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아마 제작자가 군 입대를 앞뒀다고 했던가. 

 

비슷한 일이 관동 지방에서도 일어났다. 노랑시티는 실프주식회사와 두 개의 체육관이 인상적인 대도시. 안타깝게도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다. 11층짜리 건물은 불과 3년 만에 1층짜리 건물로 전락했다. 격투도장은 NPC 한 명 없는 쓸쓸한 공간으로 남았다. 마을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은 입구가 봉인되어, 건물 안쪽을 구현하기 귀찮아 일부러 막은 듯한 인상을 준다.

 

<금·은>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레드·그린> 때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은 적었다. <금·은>의 노랑시티가 유독 유령도시처럼 느껴지는 건 주요 건물이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동에서 가장 큰 도시가 유령도시로 변해버리다니...

 

아쉬운 건 노랑시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개시티 체육관은 탁 트인 공간으로 바뀌었고, NPC 숫자도 확연히 줄었다. <레드·그린>의 체육관들은 가벼운 방해물을 배치하여 이곳이 도전의 장소임을 상기시킨다. 이 전통은 후속작에서도 유지되었으며 <금·은>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NPC가 줄어든 건 기본이요, 가벼운 퍼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모두 관동 지방에서 일어난 참사다.

 

홍련섬의 비참한 처지

홍련섬은 아예 마을 자체가 없어지는 비극을 겪었다. 홍련섬 옛 터에는 포켓몬센터만이 쓸쓸하게 남았다. 전용 사운드트랙이 없어져 상록시티의 테마가 흘러나온다. 홍련섬은 포켓몬연구소, 포켓몬저택, 홍련체육관으로 대표되는 장소였다. 번영했던 섬은 하루아침에 무인도로 변했다. 아마도 용량 문제였을 테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격한 설정을 덧붙여 마을 하나를 날려버렸다.

인근 쌍둥이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프리저를 위한 던전이었던 쌍둥이섬은 입구조차 막혀, 본디 쌍둥이섬이었을 공간에는 강연이 임시체육관을 운영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홍련체육관의 퀴즈 기믹은 사라졌고, 강연 휘하의 트레이너는 모두 도망친 지 오래다.

 

오직 강연만이 외롭게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곳. 상록체육관 역시 마찬가지다. 발판 기믹은 온데간데없고, NPC 하나 없이 체육관 관장만 덩그러니 남았다. 

 

보라타운 영혼의 집

포켓몬 전통의 호러스팟, 포켓몬타워 역시 희생되었다. 포켓몬타워는 라디오타워로 바뀌었고, 실프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1층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 수많은 묘비들은 타워 앞 영혼의 집으로 이장되었는데, 건물이 작은 걸로 모아 전부 이장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이 또한 용량 탓이겠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보라타운의 음울하고 기분 나쁜 사운드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어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슬픔이 가득한 장소

타워의 꼭대기에서 만난 텅구리의 영혼은 뭣도 모르던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공간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장소①로 전락하다니... 이 장소만큼은 원작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했어야 했다. 지금도 나는 그리 믿는다.

 

칼질은 계속된다. 연분홍시티의 상징 사파리존은 원장이 여행을 떠났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워낙 사파리존의 크기가 방대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걸 어떡하나. 마을 아래쪽의 쌍둥이섬은 유명무실한 공간이 되었고, 사파리존은 장기 휴업에 들어갔다. 시설 앞 동물원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연분홍시티는 텅 빈 공간으로 변해, 오직 체육관 제패를 위해 방문하는 장소로 변했다.

회색시티의 체육관 관장, 웅의 에이스 롱스톤

성도를 떠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갈색시티, 회색시티로 가는 길은 잠만보가 가로막아,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회색시티로 나아갈 수 있다.

 

회색시티는 첫 번째 체육관이 위치한 장소.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첫 보스 배틀을 경험한다. 반면 <금·은>의 회색시티는 관동 뱃지를 3~4개 정도 딴 뒤에 방문하게끔 구현되었다.

 

왜 이리 약한 포켓몬만 내보내는지...

그럼에도 회색체육관의 NPC는 약해빠졌다. 가장 아쉬운 점은 레벨이다. 회색시티에 방문할 무렵 플레이어의 레벨은 적어도 50레벨 이상이다. 원톱 포켓몬을 키웠다면 60이 훌쩍 넘는다.

 

웅이는 자신의 에이스 롱스톤을 꺼내보지만, 44레벨 롱스톤은 야생 롱스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 상대를 질리도록 때려잡은 주인공에게 웅이가 성에 차겠는가. 관동 지방의 레벨디자인은 죄다 이런 식이다. 체육관 트레이너는 기이할 정도로 적고, 곤경에 빠뜨리는 함정은 아예 없는 수준이다. 관동의 트레이너와 플레이어와의 격차는 가히 절망적인 수준이다. 오직 상록체육관만이 간신히 이름값을 하는 정도다.

 

스토리 후반부에 한 마리는 좀...

<금·은>은 게임보이의 한계에 도전한 타이틀이다. 그러나 이왕 두 개의 지방에 도전할 요량이었다면,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용량 문제로 사라진 시설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난이도 문제는 용량과 상관없지 않은가. 관동의 야생 포켓몬들은 레벨이 낮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트레이너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며 포켓몬 보유 수도 적다. 적당한 공격기를 연타하는 것만으로도 홍콩가는 트레이너들. 체육관 관장의 위엄은 어디로 간 건지. Lv41 데구리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공포의 밀탱크, 관동 지방에선 느낄 수 없는 아우라다.

레벨디자인에 대한 불만은 계속 이어진다. 처음 <금·은>을 접했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풀 포켓몬을 골랐다. 전작의 이상해씨가 초반에 활약하던 기억이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치코리타는 이상해씨와 급이 다른 포켓몬이었다. 대미지는 미미했고 걸핏하면 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상해씨는 독 무효) 체육관 배틀은 더더욱 가관이다.

 

<레드·그린>에서 파이리를 고르면 단숨에 난이도가 뛰어오른다. 플레이어는 레벨노가다를 뛰거나 버터플, 피카츄를 잡아 롱스톤, 아쿠스타를 돌파해야 한다. 그나마 파이리는 갈색시티부터 살아나기라도 하지, <금·은>은 한 술 더 뜨는 미친 전개를 보여준다. 치코리타는 성도의 모든 체육관을 상대로 유리 상성을 잡지 못한다. (격투 전문가 사도가 사용하는 강챙이가 유일한 유리 상성이다.)

 

첫 체육관, 공포의 바람일으키기

치코리타의 잔혹사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치코리타로 피죤과 싸우느니 파이리로 롱스톤을 때려잡는 게 낫다.

 

두 번째 체육관, 벌레는 풀에게 유리하다.

스라크의 연속 자르기에 처참하게 발리는 치코리타.

구구가 치코리타보다 낫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2세대 스토리 최강의 악마 밀탱크

치코리타가 암만 튼튼해봤자 구르기 앞에서는 얄짤 없다.

스택이 쌓이기 전에 처리하는 게 중요하지만, 연약한 치코리타에겐 가혹한 임무다.

 

인주시티의 고스트 포켓몬.

고오스 계통은 고스트/독 타입으로 이루어져 있다. 치코리타가 암만 잎날가르기를 써봤자 팬텀이 받는 대미지는 절반이다. 치코리타의 주력기 누르기 역시 무용지물이다. (노멀 무효) 장기전을 책임지는 독 가루 또한 통하지 않는다. (독 무효)

 

로켓단은 시종일관 치코리타를 괴롭힌다. 시종일관 중독 상태에 빠지는 데다, 쥬뱃의 흡혈, 초음파에 휘둘리며 배틀 템포가 자주 늘어진다. 가뜩이나 진행이 느린 게임인데 너무 답답하다.

 

왜 하필 치코리타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포켓몬 게임은 전통적으로 난이도 옵션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치코리타만큼은 단언컨대 하드 난이도다. 만약 당신이 포켓몬에 대한 이해 없이 <금·은>으로 입문했다면, 하필 스타팅 포켓몬으로 치코리타를 골랐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타팅 포켓몬을 끝까지 엔트리에 포함시킨다. 스타팅을 원톱으로 굴리거나 에이스로 쓰는 일도 빈번하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치코리타에게 떠맡기다니, 난이도가 하드에서 베리하드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치코리타의 황당한 난이도는 여전히 회자될 정도로 화젯거리다. 대체 치코리타가 활약했던 순간이 몇 번이나 됐을까. 걸핏하면 눕는 치코리타를 보고 가슴으로 울었다. 여기에 관동의 허접한 레벨 디자인이 합쳐진다면? 명작은 순식간에 그저 그런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게임의 완성도를 깎아내리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변화하는 세계

밤, 야행성 포켓몬 부우부가 출현하는 시간대다.

<금·은>의 야생 포켓몬은 시간대에 따라 바뀐다. 스타팅 포켓몬과 시간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플레이가 매번 달라진다. 낮과 밤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색깔 덕에 이 세상이 계속 변화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마도 게임기기 컬러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일 것이다. 기기의 성능을 끌어내면서 그럴듯한 설정을 붙일 줄은, 대단히 흥미로운 기획이다.

 

새벽, 동이 트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금·은>은 시간 외에도 요일을 선택할 수 있다. 특정 요일이 되면 어딘가에서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건 곤충채집 대회다. 스토리 상 반드시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 평소엔 볼 수 없는 포켓몬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니, 참으로 멋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라프라스가 나타났다. (금요일 한정 이벤트)

요일 이벤트에서 가장 놀란 건 라프라스를 발견했을 때였다. 연결동굴은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자,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이루어진 장소다. 연결동굴 최심부에는 거대한 물 웅덩이가 자리잡았다. 그곳에서 라프라스가 둥둥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네스 호의 괴물을 연상시킨다.)

 

요일 이벤트는 낮밤과 더불어 세상의 변화를 체감하게 한 멋진 시스템이다. 이번에도 분량의 악몽이 요일 이벤트를 덮쳤다. 만약 라프라스 이벤트 같은 게 많았다면, <금·은>의 세계는 탐험거리로 가득 찬 멋진 장소였을 것이다. 당연히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백 배 낫고, 게임보이에서 이걸 구현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걸 어쩌랴.

 

레벨 차이가 미쳤다.

성도에서 관동까지 긴 여정이 끝났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은빛산으로 가는 통로가 개방된다. 어두컴컴한 맵을 넘어 탁 트인 장소에 뒤를 돌아본 그가 있었다. 1세대 최강의 트레이너 레드가...

 

멋진 마무리

레드와의 대전은 1세대 팬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최종 보스의 압도적인 강함 앞에 무릎 꿇는 내 포켓몬들. 관동 지방에서 바라 마지않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 정신이 싹터, 2차전을 철저하게 준비해 시합에 임한다. 이 순간 관동 지방에서 느낀 서운했던 감정은 훌훌 털어버렸다. 피카츄, 이상해꽃, 리자몽, 거북왕, 잠만보로 이어지는 피카츄 버전의 향수. 그야말로 최고의 엔딩이 아닌가.

 

 

 

평가 점수 ★ ★ ★ ★ ★

<레드·그린>의 성공에 힘입어 포켓몬의 전성기를 이끈 비범한 타이틀. 1세대 포켓몬을 내세운 친근함이 <금·은>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이다. 이 과정에서 2세대의 새로운 포켓몬은 설 자리를 잃었다. 게임프리크가 추구한 것은 아마도 1세대 포켓몬에서 미처 끝맺지 못한, 진정한 1세대의 구현 아니었을까.

 

호기롭게 도전한 두 개의 지방은 피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 환경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변화했지만, 막이 포켓몬이 대전을 지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전이 무르익으려면 아직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컨텐츠가 완성되려면 우선 게임보이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했다. 2세대 결정판 <크리스탈 버전>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게임프리크의 시행착오는 훗날 2세대의 리메이크, <하트골드·소울실버>에서 진정한 결실을 맺었다. 게임이 미완성이라고 하여 <금·은>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만큼 <금·은>이 가져다 준 과실이 달콤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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