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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by 눈다랑어 2024. 8. 7.

야심차게 출발한 소드·실드는 숱한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가장 큰 화두는 역시 포켓몬이 대거 사라졌다는 것.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게임보이 어드밴스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게임보이와 호환되는 제품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이하 RS)는 전 세대와의 단절을 꾀했다. 우선 통신 교환이 막혔다. 새로운 지역, 새로운 포켓몬이 등장했고, 시스템마저 갈아엎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포켓몬이 잘려나갔다. <SS>의 대멸종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RS>와 <SS>의 입지는 사뭇 다르다. 포켓몬이 멸종됐다고는 하나, <RS>는 모든 포켓몬의 데이터를 간직한 채로 발매되었다. <SS>는 데이터가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입국하지 못한 포켓몬으로 가득하다. <SS>는 새로운 콘솔 닌텐도 스위치를 만나, 가정용 콘솔 게임에 근접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터였다.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SS>는 24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으나, 기존 <포켓몬> 팬들은 연신 아쉬움을 토해냈다. 

 

 

 

3세대의 불모지에서 

그렇다면 <RS>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한국에서 <RS>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눈도장을 찍지 못했다. 전 세대를 통틀어 <RS>만큼 실패한 타이틀은 없다. 일반 대중들이 바라보는 포켓몬스터란, 피카츄~라이츄~파이리~꼬부기 정도가 현실이다. 에뮬레이터로 1세대 <RG> <블루> <피카츄> 버전을 플레이하고, 띠부띠부씰을 사모으던 시절의 인식이다.

 

2세대 <금·은>(이하 GS)은 1세대 포켓몬을 전면에 배치해, 정식 발매에 성공한 국내 포켓몬 프랜차이즈가 됐다. 안타깝게도 정발판 <GS>는 한국 포켓몬의 전성기에 태어나지 못했다. 일본판이 99년 11월, 미국판 00년 10월, 한국판이 02년 4월에 발매되었고, 게임보이의 저조한 보급률과 맞물려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한국의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많이 팔린 편이다.) PC방과 온라인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태에서, 포켓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별로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RS>가 발매된다. 스티커 정발, 한글은 없고 비싸기까지 했다. 이걸 누가 사나.

 

조기종영의 비극

TV 애니메이션은 최고 시청률 41.7%를 기록하며 국민 애니메이션이 됐다. 그러나 성도리그 출전을 앞두고 조기종영되면서 프랜차이즈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3세대 기반의 <포켓몬스터 AG>는 8개월 뒤 뜬금없이 방영되었으며, 성우진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대원C&A홀딩스가 정식 출시한 포켓몬스터 TCG는 자사의 유희왕에 팀킬 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발매를 약속한 시리즈 2탄은 홍보 포스터만 남은 채 발매되지 못했다.

 

1~2세대와 확연히 다른 아트스타일은 포켓몬 근본주의자의 표적이 됐다. 간지 넘치는 괴수 포켓몬의 이미지는 북미 플레이어에게 큰 반향을 이끌어 낸 반면, 생물을 데포르메한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을 내비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RS>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지만, 새로운 팬층을 개척했다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포켓몬 게임이란 이런 것"을 재정의하여, 현대 <포켓몬스터>의 기틀을 세운 게임이기도 하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매치업

그동안 3세대는 갖은 음해에 시달렸다. 한국 포켓몬의 전성기였던 1~2세대와, DS 호황을 누린 4세대 사이에 끼여 없는 게임처럼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리메이크작 <ORAS>가 한글화되면서 인지도가 늘어났으나, 3세대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여전히 차가워 보인다. 그렇기에 더더욱 3세대를 냉철한 시각으로, 프랜차이즈에 새긴 족적을 되돌아보며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노스탤지어를 찾아서

<포켓몬스터>의 아버지, 타지리 사토시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곤충 채집을 하던 경험을 떠올린다. 자연이 풍부한 시골에서 자라던 그는 도시화의 드라마틱한 변화와 더불어, 곤충을 잊어버리고 전자 오락에 열을 올린다. 타지리는 훗날 게임 개발에 뛰어들면서, 요즘 아이들이 곤충과 멀어져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타지리는 유년기의 경험을 게임의 콘셉트로 결정한다. 이제는 전설이 된 작품, <RG>은 이렇게 첫 발을 뗐다.

 

타지리는 포켓몬스터의 컨셉이 GB와 잘 맞을 것이라 보았다. GB의 통신 케이블은 플레이어 간의 경쟁을 위한 장치로 여겨졌다. 타지리는 통신 케이블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주목하여, 다른 사람과 정보를 주고받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자 오락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자 오락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풀밭 속 메뚜기의 경쾌한 비행에 까르르 웃던 나는 이제 없다.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아야 한다"며 시대를 역행하는 주장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삶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을 수 없듯이, 그때가 그립다며 삐삐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다. 타지리는 현재와 과거를 절묘하게 섞어, 곤충 채집에 열 올리던 옛 경험을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세대와 세대를 <포켓몬>이란 끈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Satoshi Tajiri ❘ Pokémon Wiki ❘ Fandom

유년기의 향수는 <마더, 1989>에서 <RG>으로, <RG>에서 <GS>으로 이어진다. <GS>는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강조한다. 풀숲에는 구구, 꼬렛이 뛰놀고, 인트로에서 오박사가 등장해 팬보이를 반겨준다. 첫 번째 마을엔 모다피의 탑이, 피죤을 에이스로 사용하는 짐 리더가 있다. 로켓단은 여전하다. 볼륨은 전작의 두 배 가까이 커졌고, 허술했던 시스템도 눈에 띄게 개선됐다. 배틀 양상도 다채롭게 변했다. 개발자들이 얼마나 일에 치였을지 감도 안 잡히는 규모다. 그런데 과중한 업무에 치인 탓일까, <RG>의 향수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타지리의 향수는 <포켓몬스터>의 근간이 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놀잇감을 던져 주었다. 내게 있어 <포켓몬스터>는 향수 그 자체다. 나는 명절마다 시골에 내려가곤 했다. 그곳은 오락실은커녕 노래방조차 없었다. 그 흔한 중화요릿집조차 없는 허름한 동네에서, 유일한 위안거리인 TV는 어른들과 공유하는 처지였다. 뭘 하고 놀지.

 

어느 날 바리바리 싸들고 간 책에 싫증이 났던 나는 뒷산을 탐험하기로 결심한다. 폴짝 뛰는 곤충을 잡으러 밭에 들어가 한 소리 듣기도 하고, 대나무를 주워다가 칼싸움을 하며 엉뚱한 나무에 매질을 가한다. 산 입구 바로 옆에 자리한 밭에는 뭐가 있을까, 호기심에 들어갔던 그때, 호박잎 아래에서 스멀스멀 기어가는 몸뚱이를 보았다. 뒤도 안 보고 부리나케 도주한 나는 300m를 내달려, 뜨끈히 달궈진 대청마루에 앉아 가쁜 숨을 토해냈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기로에서 막차를 탄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가 지나자, 주변에선 하나둘씩 귀경길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가친척이 아예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사례도 늘어만 갔다. 또 몇 해가 지나자,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꿀벌이 사라졌고, 아이들이 더 이상 곤충을 잡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대도시 쏠림 현상은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서울이 인근 도시를 집어삼켜 확장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동안 포켓몬스터는 세대를 초월해, 30대 아저씨는 물론 10대 학생까지 공유하는 문화가 됐다. 공원에는 <포켓몬 고>를 즐기는 장년층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다. <포켓몬스터>의 향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적용되지만, 나의 향수와 10대가 느끼는 향수는 꽤나 다른 것 같다. "그때 그런 게임을 했었지"라는 마음은 동일할지 모르나, 게임 속 체험은 내가 유년기에 겪은 추억과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게 세대 차이겠지.

 

앞서 <GS>이 <RG>의 향수와 달라졌다는 얘기를 했다. <GS>은 전작과의 연결을 강조하면서, 기존 팬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듬뿍 담았다. 그 결과 <GS>는 전작으로 뛰어넘은 진정한 클래식 세대의 패자로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향수를 디지털로 옮긴 <RG>, 디지털의 향수를 이어받은 <GS>는 본질적으로 다른 냄새를 풍긴다.

 

 

* 변혁의 시대

<RS>는 전 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170여 종에 달하는 포켓몬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전작의 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노선 변경. 디자인도 크게 달라졌다. 인간, 괴수형 포켓몬이 눈에 띄게 늘었다. 물론 게임 시스템은 그대로에, 잉어킹, 마릴, 모래두지 등 기존 포켓몬도 일부 등장한다. "이게 포켓몬이냐, 디지몬이냐"라는 비아냥은 골백번도 넘게 들었다.

 

초대작의 속편으로서 <GS> 만큼 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GS>의 뛰어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RG> 수준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포켓몬의 인기가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기존 방식으로 팬덤을 불릴 수 없다면, 아예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기존 팬덤을 고려하면서도 새로운 팬을 만들어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 <RS>의 두 어깨에 프랜차이즈의 미래가 달렸다.

 

이사는 내 인생의 첫 전환점이었다.

핸드폰도 없었던 어린 시절, 이사는 인간관계의 리셋을 의미했다. 부모에게 울며불며 사정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새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나 싶은 막막함과 더불어, 새로운 동네에 대한 기대감이 싹튼다.

 

주인공은 어두컴컴한 트럭 안에 실려, 비포장도로를 내달리는 듯한 진동에 잔뜩 긴장한 상태다. 이윽고 트럭이 멈추고, 슬며시 열린 문 사이로 햇볕이 스며든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발을 내딛을 시간이다.

 

정보의 부족을 음악으로 커버한 옛 게임들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이하 꿈섬)은 감성과 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첫 번째 젤다였다. 두 뼘이나 될까, 가까이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마린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바다 너머를 응시한다. 신비로운 코호린트 섬의 정경은, 이 장면을 기점으로 사랑스러운 곳, 애수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변모한다.

 

예전에 제법 인기몰이를 한 <라디오스타>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MC 김구라는 김현식 특집에서 <추억 만들기>를 선곡한 이유로 별 시답잖은 에피소드를 내세워 뭇매를 맞는다. 사실 음악이 원래 그렇다. 나는 만화 <유레카>를 보며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틀어놓곤 했는데, 매번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유레카>를 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음악은 단편적인 감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청각과 시각, 서사의 삼박자는 몰입형 콘텐츠인 게임에서 한층 더 시너지를 발휘한다.

 

정겨운 미로마을의 음악

베이비 붐 시대는 끝났다. 청년 세대의 상당수가 도시 태생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따금 시골에 내려가도 잠시 체류하는 것뿐. 도시 사람들에게 있어 시골은 따분한 곳이다. 나도 그랬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선 마치 시골 같은, 자연과 맞닿은 어딘가에 고향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도시를 전전해온 탓인지, 모니터 앞에 너무 매달린 탓인지, 고향에 대한 이미지는 흐릿하기 짝이 없다. 내 마음의 터전은 어디에 있나.

 

향수는 뜻밖의 장소에서 다가왔다. 낯설다. 분명 낯선 곳인데 이다지도 친숙하게 느껴질 줄은. 이런 걸 가리켜 'anemoia'라고 부른단다. 어린 시절 이사를 거듭하며 불안한 감정이 되살아나던 그때, 미로마을의 어딘지 모를 그리움은 내게 편안함을 되찾아 주었다.

 

새 친구와의 만남

주인공의 이사에 관한 소문은 동네에 파다한가 보다. 벌써부터 또래가 온다고 옆집 아이가 기대한단다. 나 역시 호기심이 생긴다. "대체 어떤 친구일까." 얼굴을 마주치는 나는 적잖이 놀란다. 세상에,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라니. 당황스러움도 잠시, 대화를 해보니 금방 긴장이 풀린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워진다. 남의 의중을 살피려 애쓰고, 화젯거리를 쥐어짜고, 맘에도 없는 꾸민 모습을 연출한다. 매사에 득실을 따지고 타인을 의심한다. 새 직장에 출근할 때의 기분이란.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

 

오래전, 부모님 친목회에 따라갔을 때의 일이다. 심심했던 나는 또래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해보니, 걔는 <드래곤볼>을 좋아한단다. 이윽고 끝장토론이 펼쳐진다. 누가 좋니 마니, 누가 더 강하니 어쩌니 같은 시답잖은 화제. 부모님은 집에 가자며 나를 부르고, 아쉬웠던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한 채 자리를 뜬다. 복잡한 계산할 것 없이, 맘이 맞으면 친구가 됐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RS>에서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부모와 자식

<마더>는 <포켓몬스터>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마더'라는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마더>의 부모는 그 자체로 어린 시절의 향수를 상징하는 존재다. 

 

코믹함과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마더 2)

<RG>은 <마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눈을 뜨자 어머니가, 들판에선 포켓몬과 마주치는 구성마저 닮았다. 어린 시절 타지리의 경험은 <포켓몬스터>를 통해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는다. <RG>은 타지리의 향수를 아이들과 공유하고픈 픈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겪은 모험은 훗날 좋은 추억으로 남아 삶의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마더>는 유년기의 향수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어린이의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구현된 공간이기도 하다. <RG>과 <마더>, 두 작품의 향수는 미묘하게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 유년기의 기억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시기

주인공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낯선 지방에 정착한다. 긴장도 잠시, 옆집 아이와 말을 트고 친구가 된 주인공. 아무것도 없는 촌동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여름방학, 투덜거리면서도 시골에 내려가 야무지게 놀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포켓몬 트레이너는 여행자다. 이제 부모 곁을 떠날 시간.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새 직장, 등화도시 체육관이 기다린다. 이 말인즉슨 언젠가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의미다. 

 

빠른 기동이 가능해졌다.

<포켓몬스터>는 느린 템포로 유명하다. 1, 2세대까지만 해도 자전거 없는 여행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RS>는 초반부터 러닝슈즈를 제공, 처지는 문제를 크게 완화시켰다. 뛰어난 기능성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엄마가 러닝슈즈를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따금 필드를 뛰어다닐 때마다 "이거 엄마가 선물로 줬었지" 같은 생각이 드니 말이다.

 

<포켓몬스터>는 부모의 역할이 없다시피 한 게임이다.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항상 집을 지키는 존재다. 심지어 대화 패턴은 하나뿐이고, 엔딩 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GS>은 어머니를 은행 NPC으로 취급했다. 통화는 언제나 저금 얘기. 어머니가 저금통장은 아니잖은가. 

 

부모의 역할

<RS>는 극 중에서 부모의 비중을, 특히 아버지의 비중을 높인 작품이다. 부모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식의 앞날을 축복하는 아버지. 이 점이 <RS>의 세계를 리얼하게 만든다.

 

현대 배경의 판타지, 부모의 사정으로 이사했던 기억들, 낯선 그리움으로 물든 미로마을, 새로 사귄 친구, 호연 지방의 아름다운 풍경, 따스하게 지켜보는 부모님의 존재...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이식한 향수가, 엉뚱하게도 타지리가 손을 뗀 첫 번째 게임에서 되살아났다. 다시 정정할 필요가 있겠다. <RS>에 드리운 향수는 마치 <마더>을 연상시킨다. 

 

감성이 풍부한 세계

https://youtu.be/L3fiaPBDfv8?si=9cCAkSVjg5d3BED-

등화도시의 테마

분위기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음악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게임에 표시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다. 대상이 옛날 옛적 게임이라면 특히 그렇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질감을 느껴볼 수도, 어떤 냄새가 나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창작자는 시각, 청각 등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수밖에 없다.

https://youtu.be/02K40TA3yMQ?si=tAVZATqtcj4Y6smM

무로마을의 테마

https://youtu.be/Y3auFhxfsmI?si=Uc8QpHm2ZRRUe4JB

금탄도시의 테마, 몇 번이고 재활용될 정도로 인기있는 트랙이다.

<RS> 만큼 관악기를 적극 사용한 게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호른은 호연지방을 대표하는 악기로 손색이 없다. HOENN TRUMPET은 3세대의 상징과도 같은 밈으로 자리 잡았다. 30초부터 터져 나오는 힘찬 호른 소리는 이 작품의 분위기 전반을 좌우하며, 야생 포켓몬, 트레이너 배틀, 104번 도로, 잿빛도시 등 다양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미권의 대표적인 밈.

 

풍부하고 일관된 사운드트랙

사운드트랙은 <RS>를 구성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호연의 밝고 명료한 색감은 경쾌한 사운드와 어우러져 이 세계에 생동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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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OoqKHz_D0w?si=2BHZmrkWqMQVD9uy

104 도로

 

클라이맥스에서 닫힌 소리의 둑이 무너지고, 숨겨왔던 고음이 터져나온다.

https://youtu.be/OHTr8nofsAM?si=cOeqn9Nus9OvdE7J

전투! 야생 포켓몬

점진적으로 두 개의 악기를 각각 강조하여, 선율이 교차하는 카운터 멜로디를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https://youtu.be/rAAKR9uujA8?si=Xg8dk7250RKTO8ei

트레이너 배틀

 1·2세대 배틀 테마의 놀라운 변신.

https://youtu.be/Rqco9nxyc8g?si=XpJ2AfEHo3KMRKkA

프랜들리 숍

평범한 일상, 특별한 순간.

 

잿빛도시의 테마

 

 

 

이하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리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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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몸을 싣고 무로마을을 떠나 도착한 곳은 어느 해변이었다. 해안가에서 팔자 좋게 늘어진 사람들. 뜨거운 운 태양 아래 기세 좋게 배틀을 걸어오는 사람들. 팡파르 풍의 BGM은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팡파르 소리가 이윽고 갈매기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로 바뀌자, "이곳은 휴양지 같은 항구도시구나"는 걸 깨닫는다.

 

잿빛도시 서편엔 시장이, 동편엔 조선소와 과학박물관이 위치한다. 마을 북쪽엔 콘테스트 회장이 있어,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콘테스트를 접하게 된다. 살짝 낯설면서도 세련된,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약속대로 뱃지 4개를 모아온 주인공

 

부모 자식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과연 아버지답게 강하다.

노멀 타입 관장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등화도시 체육관이 까다롭다. 비전설 최강의 체급을 지닌 게을킹은 통곡의 벽 그 자체다. 게을킹은 장단점이 명확한 포켓몬이므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악마가, 준비한 사람은 구워삶기 쉬운 호구가 된다.

 

 

여름방학의 작은 모험을 지향하던 시리즈가, 더욱더 규모가 큰 이야기에 도전한다. <루비> 버전은 마그마단이, <사파이어> 버전은 아쿠아단이 극을 주도한다.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설의 포켓몬 그란돈을 깨우려는 마그마단. 같은 이유로 가이오가를 깨우려는 아쿠아단. 각각 대지와 바다를 넓히려는 집단이, 때로는 플레이어와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부모를 뛰어넘어, 세상을 구하는 모험에 몸을 던지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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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는 두 가지 버전을 동시에 발매해, 서로 다른 버전을 보유한 두 사람이 교류하는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시도였을지 몰라도, "어차피 다른 점도 거의 없는데 상술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루비·사파이어>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나, 게임프리크는 <루비> <사파이어>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함으로써 색다름을 추구한다. <루비>는 아쿠아단과 손잡고 마그마단의 음모를 저지하는 내용이며, <사파이어>는 마그마단과 힘을 합쳐 아쿠아단의 계획을 막는 구성을 취했다. 전설의 포켓몬과 메인 시나리오의 융합은 어느새 <포켓몬스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 3세대의 두 얼굴

아쉬운 팬 서비스

사실 <RS>는 <RG> <GS>의 후계자로서 다소 아쉬운 작품이다. 정확히는 캐릭터 게임으로서, "이게 최선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해씨, 리자몽을 포함해 수많은 포켓몬들이 멸종했다. 물론 만날 수 없다 뿐이지 데이터는 건재해서, <포켓몬 콜로세움, 2003>을 이용해 구세대 포켓몬을 <RS>로 옮길 수 있다. (게임큐브, 타이틀, 케이블이 필요) 일본판 <포켓몬 콜로세움> 초회한정판은 세레비 디스크를, 북미판은 지라치 디스크를 지급하여 상술의 정점을 찍은 세대기도 하다.

 

포켓몬 극장판의 단골, 배포 포켓몬 역시 이쪽이 기원이다. 게임 내에서 배울 수 없는, 희귀한 기술을 가진 포켓몬을 판매하는 전략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포켓몬 도감 완성이 어느 때보다 어려워, 치트로 옛 포켓몬을 불러내는 게 국룰처럼 여겨졌다. (놀랍게도 에뮬이 아닌 실기 얘기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대다.

 

 

* 디자인 철학의 초석을 다지다.

자연과 생태계, 게임디자인의 밀접한 결합

<RS>는 자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어떤 곳에 어떤 포켓몬이 살지,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RS>는 생태계와 환경 기반 디자인에 뿌리를 둔 최초의 <포켓몬>이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통로, 트레이너를 배치하기 위한 장소로 여겨졌던 곳에 개성이 피어난다. 호연의 디자인 철학은 후대 게임에도 이어져, 포켓몬 생태계를 조성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바다 탐험

바다는 <RS>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면적을 자랑한다. 기술머신 다이빙을 얻으면 해저 탐험이 가능해지며, 온갖 숨겨진 장소에 접근할 수 있다. 현실의 바다가 그러하듯이, 바다는 반복적인 풍경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때로는 현실성을 포기해야 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다가 딱 그렇다. (게임 디자인적으로 좋은 공간이 아니다.) 랜덤 인카운트는 시도 때도 없이 플레이어를 덮친다. 많이 양보해서 인카운트는 스프레이로 퉁친다고 쳐도, 반복되는 비슷한 풍경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RS>는 바다 여행 대신 해저 탐험을 택했다. 지루한 공간에서, 덜 지루한 공간으로 바뀐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으나 해저는 다우징 머신의 산지였다. 또한 호연 지방에 깃든 신비로운 전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다이빙을 배우고 처음 바닷속에 뛰어들 때의 설렘을 아직 선명히 기억한다.

 

해저 분화로 생겨난 숨겨진 마을

 

해저 탐험에 나서는 장면, 오픈 월드에 최적화된 요소가 눈에 띈다.

 

* 딴짓을 적극 장려하는 게임

혹자는 <RS>의 볼륨이 아쉽다는 얘기를 한다. 절반은 동의한다. <크리스탈 버전>의 엔드 콘텐츠였던 배틀 타워는 <RS>에서도 이어졌으나,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여 있으나 마나 한 물건으로 전락했다. 호연 지방에는 관동과 성도, 두 대륙을 넘나드는 스케일이 없다.

 

한편으로 <RS>는 다양한 콘텐츠를 추가했다. 나무열매를 재배하고, 미니게임으로 포록을 만들고, 포켓몬에게 포록을 먹여 콘테스트에 내보낸다. 미궁의 대저택은 끝 모를 도전으로 가득하고, 바닷속에는 신비한 유적이 잠들어 있다. 스토리만 깨고 치우면 모를까, 샛길로 빠지기 딱 좋은 게임이다.

아지트 꾸미는 재미가 쏠쏠

 

탐험을 중시한 맵 디자인

JRPG는 전통적으로 선형적 레벨 디자인을 선호한다. 스토리 중심 게임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포켓몬스터>는 선형적 구성을 취하되, 경험은 다채롭게 배치했다. 스타팅 포켓몬부터 시작해 파티 조합, 기술 배치 등등 '경우의 수'는 충분하다. 약간의 탐험 지역(쌍둥이 섬, 알프의 유적)을 배치한 것도 빠뜨리면 섭섭하다.

 

<RS>는 이따금 비선형적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버려진 배는 지나가며 한 번쯤 보게 되는 스팟이다. 내부가 궁금했던 플레이어는 파도타기를 얻은 뒤에 재차 방문하게 된다. 탐험 가능한 장소는 이외에도 많다. (111번 도로의 사막, 미궁의 대저택, 유성 폭포 등) 치밀한 스토리보다는 여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작품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나무열매를 키워 스넥을 만들자

 

콘테스트 최적화 포켓몬

콘테스트는 포켓몬의 매력을 겨루는 신규 콘텐츠다. 크게 외모 심사와 기술 심사 두 파트가 있는데, 기술 심사를 망쳐도 외모 심사로 만회할 수 있어 육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튜토리얼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을.

도전 과제가 남다르다.

트레이너 카드는 전당 등록, 콘테스트 제패, 배틀타워 50연승, 호연도감 완성에 성공할 때마다 별이 하나씩 주어지며, 별 숫자에 따라 카드의 색깔이 바뀐다. 트레이너 카드는 <RS>의 엔드 콘텐츠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전당 등록, 콘테스트를 제패한 포켓몬에게 특별한 리본이 주어지는 시스템도 생겼다. 여기에 완전판 <에메랄드>의 배틀 프론티어가 추가되면서, 3세대의 시도는 <포켓몬> 프랜차이즈의 모태로 자리 잡았다.

 

<GS>는 안농으로 종은 같은데 모습이 다른 포켓몬을 구현했다. 새로운 시도는 3세대에서 더욱 확장되어, 이제는 아예 개체마다 모습이 다른 포켓몬이 등장했다. 얼루기의 패턴 수는 약 30억 이상. 켈리몬은 변색 특성으로 카멜레온의 생태를 표현하였고, 날씨에 따라 모습이 변화하는 캐스퐁을 추가했다.

 

깜까미는 처음으로 '약점이 없는 포켓몬' 타이틀을 선보였다. 토중몬은 아이스크(매미)로 진화할 때, 껍질몬(매미 허물)을 낳는 기믹으로 화제가 됐다. 껍질몬 체력이 1 고정이라는 점, 약점 이외의 모든 공격을 거부한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웠다. 빈티나는 119번 수로의 특정 스팟(6칸)에서만 등장해 포획의 신기원을 썼다. 어렵게 잡은 빈티나는 포켓몬 공인 '가장 아름다운 포켓몬' 밀로틱으로 진화한다. 포획 못지않게 진화 방법 역시 난해하다. 아름다움을 최고로 올린 빈티나를 레벨 업시키는 것.

 

* 미래 먹거리의 명과 암

특성과 성격

<RS>는 <포켓몬스터>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 작품은 <포켓몬>답지 않게 근본적인 부분을 재설계했다. 특성과 성격은 새로운 챕터를 열어젖혔다. 성격은 포켓몬의 스탯에 영향을 준다. 메타몽의 부재는 가뜩이나 어려운 교배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6V? 3V도 어렵다. 여기에 잠재파워까지 고려하면...
전략 요소를 극대화한 더블 배틀

 

 

 

 

평가 점수 ★★★★★

<루비·사파이어>보다 잘 다듬어진 후속작을 몇 개나 꼽을 수 있다. 논란의 여지도 많은 작품이다. 팬 서비스는 거칠고, 포켓몬은 반으로 뚝 잘라 멸종되어 세대 간의 단절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프랜차이즈의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 게임은 포켓몬을 단순한 '수집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포켓몬이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떤 환경 속에 존재하는가를 고민했다. 이 순간 그들은 데이터를 넘어 생명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호연의 지형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레드·그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초마을에서 상록시티를 지나 상록 숲을 통과하고, 회색시티, 트레이너 군단, 달맞이 산, 블루시티로 이어지는 일련의 동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호연은 감정을 호출한다. 하기노인의 배를 얻어 타고 끝없는 바다를 달리다 본 난파선이나, 여름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잿빛도시의 경쾌함. 화산재가 소복이 내리던 용암마을의 도로를 떠올린다. 이 작품에서 탐험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나를 이끈 건 호기심이었다.

 

음악과 색채가 어우러진 여정은 플레이어의 감정을 붙잡았다. 이 세계를 떠난 뒤에도 이유 없이 멜로디가 떠오르고, 이름 없는 마을 하나가 가슴속에 남는다면, 그건 이 게임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루비·사파이어>는 포켓몬이 무엇을 잘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증명한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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