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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페르소나 5 택티카 (2023)

by 눈다랑어 2024. 1. 14.

한가롭게 웹 서핑을 하던 어느 날 여름, 출시 예정작에 눈길이 갔다. 무척이나 많은 명작이 쏟아졌던 올해였으나, 직장인의 한계에 부딪혀 심각한 게임 결핍에 시달려야만 했다. 신중하게 게임을 골라도 모자랄 판에 문득 눈에 밟히는 녀석이 있었으니, <페르소나 5 택티카>(이하 P5T)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페르소나>의 파생작은 미묘한 퀄리티와 나쁜 가성비로 정평이 나있다. AA급 타이틀 수준의 가격, 캐릭터 게임이라는 점을 악용해 인기 있을 만한 소재는 DLC로 넘긴다. <페르소나 5 스크램블, 2020>(이하 P5S)은 이런 악습을 벗어난 몇 안 되는 타이틀이다.

 

<P5S>는 결코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다. 원작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할 이유가 없다. 액션에 대한 이해는 다소 부족하다 수준을 넘어 얄팍하게 느껴졌다. 이 문제는 본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족한 액션은 던전 구성의 미흡함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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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5, 2016>(이하 P5)의 첫 번째 던전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스케쥴 관리가 생명이다. 이틀, 사흘에 걸쳐 던전을 나눠 깨는 방법도 있지만, 이래서는 시간이 아깝다. 한 번에 깨자니 자원이 부족하다. HP는 넝마가 되고, SP는 금세 고갈되어 페르소나 공격을 남발할 수 없다. 총탄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는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이 던전을 돌파할 수 있다. 약점을 찔러 1 More를 버는 건 기본 소양이다. 잠입 액션 또한 중요하다. 불가피한 전투는 가급적 선공을 잡아 피해를 최소화한다.

 

던전 속 퍼즐은 갈수록 귀찮고 복잡한 형태를 띈다.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 페르소나 전투를 거듭하면서 지루한 퍼즐을 푸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현상은 오쿠무라 팰리스를 기점으로 심해진다.) 굳이 잠입 액션을 할 필요도 없다. 적과 눈이 마주치면 정면으로 깨뜨리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액션의 가짓수가 적어, 기껏해야 숨어 있다 뒤를 노려 선공을 잡는 것 외엔 할 게 전무하다. 로프 액션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이걸 액션이라 말할 수 있을까. 비록 반쪽짜리 액션일지라도, 괴도단의 컨셉을 표현하는데 충분했다. 단, 자원 관리가 어렵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한다. 자원 부족에 시달리는 초반과 후반부의 인상이 정말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임의 설정과 게임 플레이가 충돌하면서 던전의 완성도는 점차 떨어진다.

 

 

<페르소나 5 로열, 2019>(이하 P5R)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 빛나는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그 빛에 이끌려 <페르소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P5S>는 페르소나 파생작의 한계치를 뛰어넘어, 200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매번 이렇게 만든다면 파생작을 안 할 이유가 없다.

 

<P5T>는 어떨까, 기대감은 별로 없었다. 파생작의 퀄리티가 올라갈 거라고 예측했던 나로서는, 게임의 사전 정보가 공개되자 진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깔 때 까더라도 해봐야 아는 법, <P5T>가 기존 파생작의 연장선인지, <P5S>의 전례를 따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리하여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나와 <P5T>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포장지를 벗겨내고 속을 들여다본 심정은... 예상대로의 그것이었다.

 

*스위치 판으로 플레이했습니다.

플레이 영상을 잠깐만 보더라도 김이 팍 샌다...

 

<P5T>의 등장인물은 예외없이 SD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처음 스크린샷을 봤을 때 기대감이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지금은 기기의 한계가 뚜렷했던 90년대가 아니다. 모바일 게임도 아니다. 그런데 SD 캐릭터라니, 보나마나 저예산 게임일 게 분명하다.

 

나쁜 예감이 현실로...

 

시네마틱 영상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인게임 대화는 스탠딩 일러스트와 말풍선으로 퉁쳤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이 방식을 고수한다. 본편의 스탠딩 일러스트 뒤에는 인게임 그래픽으로 표현된 캐릭터가 제스쳐를 취한다. 그래픽이 정교하지 않다면, 만화적 연출을 사용하면서 설명을 돕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P5T>는 사정이 다르다. 뒷 배경의 캐릭터는 굳은 채 스탠딩 일러스트와 자막, 음성만이 흐른다. 영락없는 비주얼 노벨 스타일이다. 성우와 시나리오, 일러스트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린다. 아틀러스가 메뚜기 마빡만 한 소규모 회사라면 이해할 수 있는 처사겠으나...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스탠딩 일러스트와 말풍선 뒤로 인게임 그래픽이 보인다. (P5R)

 

<P5S>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기법

 

스탠딩 일러스트로 퉁치는 배짱 (P5T)

욕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뒤로한 채, 게임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법정 어드벤처 게임, <역전재판> 시리즈는 탐정 & 법정 파트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유명하다. <P5T> 역시 마찬가지로, 준비 단계와 전투, 두 가지 구성으로 나뉜다. 플레이어는 준비 단계에서 페르소나를 합성하거나 장비를 교체할 수 있고, 스킬 테크트리를 바꿀 수도 있다. 

 

스킬을 잘못 찍어도 리셋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간략화된 페르소나(악마 합성) 시스템

 

<P5T>는 난이도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우선 노멀 모드 기준으로 위기감이 없다시피 하다. 긴장감을 찾으려면 최소 하드 모드 이상, 서브 목표까지 전부  클리어한다는 가정 하에서만 성립한다. <P5T>의 목표는 페르소나 시스템에서도 잘 드러난다. 본편의 페르소나는 스킬을 총 8개 배울 수 있는데, <P5T>의 페르소나는 꼴랑 2개만 배운다. 가뜩이나 단조로운 게임이 더 단조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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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하는 오해가 게임은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게임을 단순하게 만들면 그만큼 재미도 거세될 확률이 높다. 특히 고인물 장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임을 쉽게 만드는 게 정답이었다면 <그랑블루 판타지 버서스, 2020>는 벌써 200만 장 넘게 팔렸을 것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6, 2023>의 흥행은 조작 난이도를 대폭 줄이면서, 격투게임 특유의 깊이는 그대로 유지했다는 데에 있다. (버서스는 쉬운 커맨드에 비해 콤보 난이도가 제법 높은 게임이었고, 파고들기 요소가 적은 밋밋한 게임이었다.)

 

<스타크래프트 2>는 뒤지게 어려운 게임으로 악명이 자자하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 2021> 이전까지 RTS의 존엄 역할을 톡톡히 한 장본인이다. SRPG(택티컬 RPG) 또한 마찬가지다. 앞서 소개한 장르보다는 쉬운 편이지만, SRPG의 매력은 다채로운 전술과 다양한 캐릭터에 기인한다. 이 분야는 수요는 적은데, 어설프게 만들면 득보다 실이 많아 제작이 어렵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이다.

 

동료와의 대화 또한 아지트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와 코옵(커뮤니티)을 형성했던 본편과 달리, <P5T>는 정해진 대화만 볼 수 있고, 선택지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지도 않는다. 비주얼 노벨의 몇 안 되는 장점을 포기한 셈이다.

 

<P5T>는 SRPG임에도 쉬운 게임을 추구했다. 시리즈의 근간인 페르소나 시스템조차 축소시켰다. 비주얼 노벨을 연상시키면서도 비주얼 노벨만 못한 구성에 좌절을 느꼈다. 이걸 깨달았을 때, 이 게임에 무언가를 바라는 건 사치임을 직감했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전투보다는 준비 과정에 초점을 맞춘 시리즈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면 전투에서 도움을 받거나 페르소나 합체에 이점이 생긴다. 길바닥에서 얻은 페르소나와 오랜 시간 합체를 거듭해 단련된 페르소나는 차원이 다르다. 

 

<P5S>의 유일한 커뮤니티 파트

<P5S>는 커뮤니티가 없다. 잘 만든 <P5S>조차 이 모양이니 <P5T>는 없을 게 뻔했다. <P5T>는 커뮤니티 삭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페르소나 합체를 간략화했다. 본편의 핵심 시스템이 사라지자 본질은 사라져 버렸다.

 

약점을 찔러 추가 행동을 얻는다.

<페르소나>의 전투는 프레스 턴 시스템이 핵심이다. 약점 공격으로 상대방을 다운시킨다. 다운되면 추가 행동이 주어진다. 즉, 약점 공격 = 승리의 지름길이다.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P5T>는 속성 공격이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벽에 몸 전체가 가려지면 무효, 반쯤 나와있으면 대미지가 반감된다.

<P5T>의 다운 방식은 독특하다. <P5T>는 벽에 기대어 대미지를 무효, 반감하는 형태를 취했다. 플레이어는 이를 활용해 대미지를 최소화하지만, 문제는 적에게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는 점에 있다. 벽에 기댄 상태를 백날 때려봤자 약점은 뚫리지 않는다. 즉, 추가 행동도 없다.

 

근접공격 - 공격으로 추가 행동을 획득한다.

방어 태세의 적을 상대하는 건 어렵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어서, 적을 근접공격으로 날려버리면 방어 태세가 풀린다. 방어가 해제된 적은 굳이 약점이 아니더라도, 근접공격, 총격, 페르소나 공격 어느 쪽이든 맞으면 다운된다. 속성 공격 없이 약점 공략이 어려웠던 본편과는 천지차이다.

 

벽에서 떨어진 적을 공격하면 찬스를 얻는다. (추가 행동)

따라서 <P5T>의 속성은 차별화가 잘 되지 않는다. 화염은 도트 대미지, 빙결은 턴 스킵 등의 부가효과가 있으나 크게 의미가 없다. 게임이 쉬워 상태이상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긴장감 없는 전투에 지쳐, 하드로 난이도를 조정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뀐 페르소나 시스템은 여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페르소나> 시리즈의 주인공은 유연하게 페르소나를 바꾸면서 상황에 대처한다. (와일드 능력) <P5T>에선 이 기능이 빠져있다. 모든 캐릭터는 자신의 고유 페르소나 외에도 추가로 페르소나를 장착할 수 있다. 주인공 또한 예외는 없다. 말은 페르소나라고 하지만, 이 게임의 페르소나는 스킬 2개가 붙는 장비품에 불과하다.

 

파티원은 겨우 세 명뿐

<P5R>의 조연 '오쿠무라 하루'의 액티브 스킬은 총 8개다. 하루는 염동, 총격 계통의 캐릭터인데, 보조스킬이 많아 서포트 캐릭터로 굴릴 수도 있다.

 

<P5T>의 하루는 스킬이 총 3개다. 기본적으론 염동, 총격 계통의 캐릭터이며, 가끔 힐을 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다. 역할이 축소되면서 전술의 폭도 좁아졌다. 가뜩이나 파티원도 적은데, 스킬의 수가 적어 경우의 수가 대폭 줄었다. 전략성을 중시한 게임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이다.

 

드래곤 타입에 대처하는 자세 (포켓몬스터 레드)

가장 큰 피해자는 주인공이다. <페르소나> 시리즈의 주인공은 마치 <포켓몬스터> 시리즈와 같아서, 상대가 물 포켓몬을 꺼내면 전기 공격으로, 풀 포켓몬을 꺼내면 불 공격으로 응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와일드 능력) 주인공의 역할은 대미지 딜러에서 그치지 않고, 힐, 버프, 디버프, 테크니컬 등 파티에 모자란 부분을 채워 넣는다. 주인공이야말로 페르소나 전투의 과반이다. <P5T>는 이 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주인공과 조연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세 명으로 줄어든 파티원

주인공의 와일드 능력은 이제 없다. 페르소나 스킬도, 파티원의 숫자도 줄었다. 파티원을 전투 도중 바꾸는 시스템마저 빠졌다. 상태이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황에 맞게 상태이상을 골라 쓰고 싶어도, 각 캐릭터 별로 공격스킬을 1~2개 정도 쓰는 시점에서 쓸래야 쓸 수가 없다.

 

플레이어가 취할 입장은 정해져 있다. 제한된 상황에 쓸만한 스킬을 쳐내고, 보편적이고 강한 스킬만을 취한다. 스킬의 T/O가 부족해 생기는 촌극이다. 코어가 흔들리는 게임에 뭘 믿고 기대를 한단 말인가.

 

 

본편의 이야기는 류지, 모르가나, 마코토, 후타바 위주로 흘러간다. 반면 안, 유스케, 하루의 비중은 대단히 부족하다. 사건을 주도하는 일 없이 가끔 추임새나 넣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혼자 비중을 다 먹어버린 마코토

<페르소나>의 등장인물들은 커뮤니티로 묶여 있어, 플레이어는 주인공과 조연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페르소나 4, 2008>(이하 P4)는 커뮤니티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조연과 조연이 빚어내는 관계성은 이야기를 진실되게 만들고, 이들이 진짜 친구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일으킨다.

 

본편에서 묘사된 괴도단은 비즈니스 관계로 묶여 있다. 멤버들은 우정을 얘기하지만, 어두운 분위기의 피카레스크에서 우정을 논할 수가 있을까. 우정을 쌓을 만한 장면도 부족했다. <P5>에는 학원 청춘물 다운 이벤트도 있지만, 긴장과 갈등이 시종일관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의미가 퇴색됐다.

 

<P5S>는 친구로서의 괴도단에 주목했다. 서사에 희생된 류지가 커뮤니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서로 얽힐 일이 적었던 사람들이 농담 따먹기를 건넨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은 영락없는 또래다. 신 캐릭터 소피아, 젠키치는 팬덤에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팬들이 바라 마지않던 괴도단을 보여주면서, 신 캐릭터를 슬며시 끼워 넣는다. 괜히 성공한 파생작이 아니다.

 

<P5T>의 스토리텔링은 기존 파생작과는 명백히 대비된다. 이야기의 중심에 신 캐릭터, 엘과 토시로가 위치하고, 괴도단이 주변을 맴돈다. 본편의 팬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괴도단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역으로 행세한다. 이게 정말 팬 게임이 맞는가.

 

신규 캐릭터 토시로

 

안타깝게도 괴도단의 묘사는 예전만치 못하다. 결국 이 게임을 끝까지 붙잡게 만드는 원동력은 신 캐릭터에게 달렸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들이 마음에 들어 끝까지 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규 캐릭터 엘

 

<P5T>의 상징, 깃발

 

혁명군의 리더, 엘

 

깃발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주입된다. 혁명과 깃발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이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혁명이 가진 이미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깃발이 <P5T>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깃발 땅따먹기 게임이 아니었다니

깃발은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쓰였다. 앞으로 이런 미션이 많아지겠구나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깃발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스토리 컷씬에서 몇 번 등장하는 게 전부, 인게임에서 깃발이 사용되는 장면은 없었다. 줄곧 깃발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치고는 허무한 결말이다. 

 

스토리의 주역이 엘과 토시로라는 건 명백하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인게임에서 엘과 토시로의 역할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토시로는 전략가이자 비전투 요원, 전략가라는 건 설정 상 그렇다는 것뿐이지, 미션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엘의 깃발은 첫 장면 이후로 미션에서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엘은 페르소나 장착이 불가능하고, 이동력이 낮아 미션에서 배제되기 쉽다. 본편의 주인공이 와일드로 특별 취급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주역으로 설정했다면 인게임에서도 더 많은 역할을 맡겨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게임 활약은 기존의 괴도단이, 이야기 속 활약은 엘과 토시로가 맡는 기형적인 구조가 펼쳐진다.

 

각 스테이지마다 부가목표(AWARD)가 설정되어 있다.

엘이 차별화되는 포인트는 총격과 차지다. 총격은 범위 공격이고, 차지는 상대방의 가드를 무시하고 다운시킨다. 총격을 보고 쓰자니 류지와 하루를 밀어내고 쓸 이유가 없다. 차지는 1턴을 쉬고 추가효과를 얻는 옵션인데, 어워드는 턴 제약이 있어 차지와의 궁합이 나쁜 편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고, 엘의 차지 효과는 원체 고성능이라 포기하기 어렵다.)

 

어워드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P5T>는 전투 도중 파티원을 교체하기 어렵다. 파티원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 곧장 다른 파티원으로 교체되는 게 전부. 적어도 나로서는 쓸 일이 없는 기능이었다. 파티원이 쓰러지면 어워드 달성이 불가능하므로 나로서는 재도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어워드가 이런 식이다.

 

<록맨 제로> 시리즈의 사이버 엘프

<록맨 제로, 2002>는 특별한 타이틀이다. <록맨 X> 시리즈의 먼 미래를 그린 이 작품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를 한 데 묶은 설정으로 주목받았다. 여기에 매력적인 캐릭터, 인터넷 보급이 더해지면서 2차 창작이 급물살을 탔고, 하드코어한 액션을 내세워 기존 팬은 물론, 액션 게임의 팬까지 포섭하는 확장력을 보였다.

 

이 화려한 시리즈에도 명암이 있었으니, 바로 사이버 엘프의 존재였다. <록맨 제로> 시리즈는 높은 난이도로 악명을 떨쳤는데, 사이버 엘프를 쓰면 난이도가 정상적인 수준까지 내려온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기는데, 사이버 엘프를 쓰면 미션 랭크가 급락하기 때문에 사용이 꺼려진다는 것이다. 후속작 <록맨 제로 2, 2003>는 한 술 더 떠, A랭크를 유지해야 EX 스킬을 얻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 랭크에 이점을 주는 시스템이 도리어 족쇄로 작용한 셈이다.

 

<록맨 제로>는 랭크를 위해 시스템을 포기한 문제작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P5T>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워드를 달성하면 스킬포인트를 추가로 준다. 플레이어의 눈은 자연스레 어워드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차지와 교체가 희생된다. 차지는 쓸 수라도 있지, 교체는 얄짤없이 어워드 달성 실패로 이어진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페르소나를 교체하면서 적에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핵심. <P5T>는 와일드가 없고, 상황을 멤버 교체로 풀어나갈 수도 없다. 시스템의 모순은 줄곧 플레이어를 괴롭게 만든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적은 네 종류가 끝이다. 이래가지곤 전술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그런 주제에 스테이지는 50개가 넘는다. 후반부에 가면 분량을 늘리기 위한 꼼수가 노골적으로 변한다. 스토리 상 아무 이유 없는 전투를 거듭하고, 과거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에서 자주 볼 법한 팔레트 스왑 재탕까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삼각형 원 패턴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의 부재는 전투에서도 드러난다. <P5T> 전투의 핵심은 총공격이다. 적을 다운시킨 후에 멤버 간의 거리를 삼각형으로 만들면, 트라이앵글 고!! 메시지와 함께 총공격이 활성화된다.

 

택티컬 RPG를 기대하고 이 게임을 구입한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P5T>의 전략·전술 요소는 속 빈 강정에 가까우며, 실제로는 캐릭터의 턴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삼각형을 맞추는데 중점을 둔 퍼즐 게임이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강조한 <클래시 로얄, 2016>

치비(SD 캐릭터) 스타일은 인물 표현을 단순화하여 귀여움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비용 절감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넨도로이드의 선풍적인 인기는 치비 캐릭터의 장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게임은 2등신 캐릭터를 적극 활용한 매체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젤다의 전설> <파이널 판타지> 같은 굴지의 게임조차 2등신을 피해 가지 못했다. 기술의 발전은 인체 비율을 현실적으로 되돌려 놓았다. 기술에 떠밀린 치비 캐릭터는 휴대용 플랫폼으로 이직한다. 작은 화면과 궁합이 좋았던 치비는 지금도 <스플래툰> <클래시 로얄> <블루 아카이브> 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치비의 한계

<페르소나 Q, 2014>는 치비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타이틀이다. 플랫폼이 휴대용 기기였던 DS였고, <세계수의 미궁, 2007> 시스템을 빌려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P5T>가 휴대용 플랫폼에 적합하긴 하나, 모든 플랫폼으로 동시 발매되었기에 일반적인 휴대용 게임으로 인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즉, 플랫폼 방패를 앞세워 치비를 내세울 명분이 없다. 치비 특유의 귀여움을 살리지도 못했다. 만화 <괴짜가족> <디지캐럿> <아즈망가 대왕> 등의 사례로 볼 때, 치비는 부정적인 감정을 살리기에 적절치 않은 디자인이다.

 

진지한 장면과 치비와의 궁합은 최악이다.

<블루 아카이브, 2021>는 밝은 학원청춘물을 모토로 한다. 전투 장면에서 2등신 캐릭터들이 총총 쏘다니는 것도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이다. 이 게임의 전투는 술래잡기와 같은 것이어서,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어도 심각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게끔 묘사한다. 치비의 활용은 귀여움이 강조되는 상황에 국한되며, 시리어스 파트에선 인체 비율을 준수해 무게감을 살렸다. 반면 <P5T>는 굳건이 스타일을 남발했고, 자신의 강점이었던 이야기의 힘마저 퇴색되는 결과를 낳았다.

 

밝고 따스한 장면과 어울리는 치비 풍의 디자인.

 

 

온라인 쇼핑몰의 가격표

 

나는 세일을 참 좋아한다. 평소엔 관심이 없던 물건도 할인 딱지가 붙으면 눈길이 간다. 배달 앱에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 할인 없이 쌩으로 사 먹은 적이 몇 번이나 될까. e-커머스에서 정가에 밑줄선을 쭉 긋고 할인가를 적어놓는 이유도 이런 심리에 근거한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곧잘 가성비로 게임을 논하곤 한다. 이 게임이 돈값을 하니 어쩌니, 50프로 할인하면 살만하다느니 같은 것들 말이다. <P5T>가 돈값을 못한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굿즈라는 게 대부분 그렇다. MLB 유니폼은 20만 원이 훌쩍 넘고, 손 한 뼘 정도 될만한 피규어가 7만 원인 세상이다. 굿즈는 팬심에 기인하기에 가성비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 <페르소나> 팬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어린 시절 속초에 방문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관광지 물가가 비싸다는 말만 들어봤지, 이 정도로 비쌀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서울의 매서운 물가를 우습게 후려치는 매콤함에 정신이 퍼뜩 뜬 나는, 다음부터는 돈을 두둑이 챙겨가리라 다짐했었다. 평소엔 허리띠를 졸라매는 사람도 관광지에 가면 소비에 너그러워진다. 가성비가 나쁜 게임들은 딱 이 짝이다. <P5T>는 관광지에 돈을 쓰러 온 내게 바가지를 안겼다. 2만 원도 아까울 것 같은 퀄리티로 7만 원짜리 게임을 팔아치운다. 일부 캐릭터는 DLC에서만 볼 수 있어, 게임의 실질적인 가격은 9만 원에 육박한다.

 

뱅크시를 모티브로 삼은 DLC 파트

 

 

* 페르소나 시리즈의 약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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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플롯에 현기증이 난다.

<페르소나> 시리즈의 결말은 매번 비슷하다. 심지어 외전작(P5S)에서도 비슷하게 써먹었다.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인간의 의지로 무너뜨리는 전개. 나는 이런 기조의 반복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야기가 뻔히 예상돼서 재미가 없기 때문인데, <P5T>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졌다.

 

<P5T>의 최중요 인물은 단연 토시로다. 이름과 지위 외에는 모른다는 남자.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상처 입고, 조금씩 내딛으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P5T>는 좌절과 체념으로 굴곡진 삶에 파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토시로의 개인 서사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을 때, 나는 이 이야기가 슬슬 끝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남은 건 토시로와 엘의 후일담뿐이라고, 그리 믿고 싶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사실은 원흉이 따로 있고,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괴물과 싸우는 전개다.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데엔 이만한 전개가 없다. 여기까지는 취향의 영역이다. 곧 끝나겠거니 생각했더니 이게 뭐람. 끝없이 펼쳐진 스테이지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겨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니 눈앞에 나타난 건 마리에였다. 이 앞에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짐작이 간다. 오랫동안 빌드업한 토시로의 이야기는 어느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됐다.

 

무의미한 스테이지의 연속.

쉴 새 없이 철길을 내달려온 기차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번 역은 XX, 이 열차의 마지막 역입니다."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기고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나를 붙잡더니 끊임없이 속사포를 쏘아댄다. 잡상인인지 종교인인지 모르겠으나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비슷한 상황이 <P5T>에서도 벌어졌다. 짜증과 함께 연신 늘어나는 피로감. 스테이지 2개쯤 깨면 끝날 줄 알았는데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전 보스의 재등장

 

빌어먹을 게임 같으니

토시로의 서사가 끝나자 이야기도 끝을 맺었다. 그리 생각했는데 최종 보스가 남아 있더란다. 보스의 정체, 목적까지 파악한 채로 끝 모를 재탕이 이어진다. 빨리 보스랑 붙고 끝내지 뭘 이리 질질 끄나, 지루한 잡몹 레이드의 반복에 심신이 피폐해진다. 이딴 걸 하느니 주말 근무가 훨씬 낫다.

 

 

 

평가 점수 ★★

<P5S>는 <페르소나> 시리즈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P5S>은 본편도 해내지 못한 캐릭터의 역할 재분배에 성공했으며, 논란이 많았던 결말을 깔끔히 다듬어 본편보다 발전한 플롯을 선보였다.

 

<P5>의 세련된 연출은 믿기 힘들 정도로 경이롭다. 강조 효과를 극대화한 UI, 게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사운드트랙은 이용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그러나 <P5T>는 <P5S>를 보고 배우기는 커녕, 본편에서조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티가 역력하다. 괴도단의 캐릭터성은 지극히 단순화됐다. 보스전을 앞두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레드카펫을 내달려 보스전을 맞이하는 흥겨움은 이번 작품에서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

 

<P5>에서 "Beneath the Mask"를 배경 삼아 비 오는 온겐자야를 걷던 때가 떠올랐다. 이런 날은 평소보다 감성적인 생각이 깃들기 마련이라서, 오갈 데 없는 주인공의 불행한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 고독이 내 몸을 잠식해갈 때, 르블랑 주인장의 퉁명스러운 인사가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페르소나>는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연출, 즉 몰입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이게 불가능한 <페르소나>를 어찌 <페르소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차피 캐릭터 게임에 게임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 생각하며 애써 넘어가려고 해도, 팬들의 바람을 외면하는 행보는 참을 수가 없다. 다시금 가격표를 보니 내 분노가 정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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