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가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잘 만든 작품에 대한 갈증이 컸다. 9세대 콘솔이 나왔지만 성능을 제대로 사용한 게임이 드물었고,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연기된 게임이 속출했다. 게다가 개인 사정까지 겹치면서 신작을 충분히 해보지 못했다.
뭐가 됐든 나오자마자 해보려고 벼르던 차에, 스팀 넥스트페스트에서 출시 예정 게임들을 해볼 수 있었다. 그때 눈 여겨본 게임이 <인스크립션> <리프트브레이커> <STONKS-9800> 같은 게임들이다. <인스크립션>은 로그라이트 카드게임 장르. 보자마자 <슬레이 더 스파이어, 2019>(이하 슬더스)가 떠올랐다. 평소 카드게임을 즐겨하는 사람으로서 구미가 안 당길 수 없었다. 분위기도 좋고, 이 정도면 찍먹할만 한데?
어두컴컴한 방에서 옅은 조명에 의지해 카드를 치는 기분이란.
하단의 왼쪽(1)이 공격력, 오른쪽(3)이 체력이다.
여기에 희생과 키워드만 숙지하면 끝.
<인스크립션>에 비하면 <슬더스>는 복잡한 게임이다. <슬더스>는 덱 빌딩, 적의 패턴, 유물 유무에 따라 선택지가 계속해서 바뀐다. 대충 해도 되는 빌드가 있는가 하면, 정교한 카운팅을 기반으로 플레이할 때도 있다. <슬더스>는 마치 보드게임 <도미니언>처럼 끊임없는 덱 순환을 요구한다.
인스크립션은 턴 시작 때마다 덱 위(또는 다람쥐 덱)에서 카드 한 장을 가져오며, 모든 덱이 다 떨어지면 남은 자원으로 발버둥쳐야 한다. 즉, <인스크립션>은 덱 순환이 없다. 명색이 로그라이트 덱빌딩 게임인데 덱 순환이 없다니?
승패는 5점 이상 차이를 내면 결정된다. 첫 턴에 5점 이상 대미지를 줄 수 있다면 곧장 게임이 끝난다. 선공 날먹이 확실히 존재하는 게임이지만, 후공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조는 아니었다. 결국 이 게임의 규칙은 PvP가 아닌, PvE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
카드게임은 승패가 확실히 나뉘는 장르다. 카드게임에서 승패 외의 회색지대란 있을 수 없으며, 어렵게 이기든 쉽게 이기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프라인 카드게임이 비디오게임으로 이식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승패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얼마나 큰 차이로 이기느냐에 따라 재화의 양이 달라진다. 싱글 위주의 카드게임은 과정에 따라, 혹은 승패에 따라 추가 보상을 주는 것들이 많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재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포인트 벌이에 특화된 덱을 짜거나, 빠르게 승리를 쟁취하는 위니 덱을 선호하게 된다.
2021.07.14 - [게임 비평] - 유희왕 익스퍼트 2006 (2006)
파밍 부담이 적은 네 가지 이유들 : 1. 매 판마다 덱이 초기화됨 (로그라이트의 특징) 2. 승패가 빠르게 결정됨 3. 파밍 방식이 간단함 4. 파밍이 강제되지 않음 |
<인스크립션>의 승패는 상대와 5점 차이를 벌린 순간 결정된다. (5점 차이가 나면 저울이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운다.) 어차피 5점을 냈든 10점을 냈든 똑같은 승리지만, 더 큰 차이를 낼수록 추가 보상이 기다린다. <인스크립션>의 파밍은 가볍다. 플레이어가 파밍을 노리지 않아도(파밍 덱을 짜지 않아도) 자연스레 파밍이 이루어지는 구조다. 극한의 이득을 위해 파밍을 노려봐도 좋다. 어느 쪽이든 엔딩을 보는 데엔 큰 지장이 없다. '파밍'이라는,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요소를 슬기로운 방법으로 헤쳐나온 것이다.
<인스크립션>의 규칙은 구경꾼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쉽다.
그러나 텍스트가 단순하면 깊이가 떨어지기 마련, <인스크립션>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승패가 빠르게 결정된다면 그만큼 초반 패가 중요해진다.
다른 게임 마냥 1~2턴을 포기하면 게임이 박살나기 딱 좋다. 덱을 짤 때도 중요한 포인트.
튜토리얼은 지루하지 않고, 이해하기 쉽게 설계되었다.
강화는 여러번 할 수 있고, 강화 방법도 다양하다.
강화 자체는 다른 게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개념이지만,
강화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모닥불은 카드의 스탯을 강화하며, 비석은 카드의 특수능력을 다른 카드로 옮긴다. 이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기상천외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함.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담비.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
"날 도와줄 거야?"
이때부터 카드 게임과 별개로 사건의 진상을 쫓으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단순하고 재미난 규칙,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TRPG의 마스터링을 연상시키는 노인의 행동. 데모 버전으로 접한 <인스크립션>은 기대 이상이었다. 나오면 바로 사야지.
어느덧 발매일이 다가왔다. 출시 첫날 <인스크립션>을 구매했고 5일만에 엔딩을 봤으나, 당초 목표로 했던 빠른 리뷰는 불가능했다. <인스크립션>은 기존 게임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 이 리뷰는 인스크립션 초반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BRlnP67TAf4?si=5W-ForZ0zBFrysyw
챕터 1의 보스, 탐광자 역할을 맡아 진지하게 연기한다.
배역에 몰입한 노인장에게 공평함이란 사치와도 같다.
불합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답을 찾아내야 한다.
오우 쉣
한 번쯤 인상 찡그렸을 펜치 연출.
어흑... 내 이빨이 다 뽑히는 것 같네.
곳곳에서 호러의 향취가 배어나오지만,
호러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도록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
노인장은 죽음의 기념품이 갖고싶다며 카드를 골라달라고 한다.
고른 카드는 향후 플레이에 밑거름이 됨. 이걸로 <인스크립션>은 어엿한 로그라이트로 거듭났다.
또 다른 도전자가 게임에 참여했다는 설정.
앞서 플레이한 캐릭터는 죽은 걸까?
새로운 게임 방식이 해금되었다.
카드가 죽으면 뼈가 된다. 뼈를 지불하여 꺼내는 주머니쥐.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오두막을 탐색할 수도 있다.
<인스크립션>의 해금 방식은 반복 플레이가 아닌, 호기심을 유도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껏 대화하는 카드는 담비 뿐이었는데 새로운 녀석이 생겼다.
담비와 방귀벌레가 패에 들어오더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드게임도 재밌지만, 거 참 흥미롭네.
중간중간 새로운 시스템이 추가된다.
덱 빌딩 노선을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큰 도장 시스템.
처음엔 규칙이 단순해서 금방 질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임이 휙휙 바뀐다. 플레이 도중 여길 탈출할 방법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카드들. 어두컴컴한 오두막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 맛깔나는 마스터링이 더해져, 플레이어를 이 세계에 흠뻑 빠뜨린다. 왜 카드가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여길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노인장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등등 머릿속이 뱅뱅 돈다.
이 이상 <인스크립션>을 이야기하려면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다.
* 핵심적인 스포일러 주의 (결말 누설 없음)
챕터 1을 마치면 영상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카드깡 영상이라니, 심각했던 챕터 1과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순서대로 확인하면,
루크는 오래전에 단종된 인스크립션 팩을 헐값에 구하게 된다.
즉시 개봉 장면을 녹화하는데...
팩에는 개봉된 흔적이 있고 위치가 적혀있었다.
루크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에 가보게 된다.
지정 장소를 파보니 인스크립션 디스크가 튀어 나왔다.
디스크가 실행되고 영상이 끝났다.
이윽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다. 덱을 하나 골라야 하는 플레이어.
규칙은 동일해도 덱의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게임인데...
챕터 2는 루크가 산에서 파낸 디스크 '인스크립션'이라는 설정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자 김이 팍 샜다. 나는 <포켓몬 카드 GB, 1998>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고, 비슷한 게임들을 자주 즐겨왔다. 그런데도 챕터 2가 김샌 콜라처럼 느껴진 까닭은, 아무래도 챕터 1과 입장이 달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이야기에 빨려드는 나의 모습. 어떻게 하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게임 속의 주인공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나'였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루크는 챕터 2로 넘어올 때 잠깐 봤을 뿐인 인물,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라니.
챕터 2는 루크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몰입도가 확 떨어지는 순간이다.
루크의 이야기를 보려고 덱을 짜고, 배틀하고, 퍼즐을 푸는 꼴이라니. 마치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 같잖아. 이럴 바에 음침한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게 백 배 낫지.
챕터 1은 참가자의 목숨을 판돈으로 진행되는 승부. 그에 비해 챕터 2의 전개는 지루하고 밋밋하다. 룰은 그대로지만, 온갖 부조리한 고난에 직면했던 챕터 1과 달리 챕터 2는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 패배해도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진다. 챕터 2가 독립적인 게임이었다면 괜찮았을지 모르겠으나, 하필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챕터 1 다음에 배치되었다는 게 아쉽다.
챕터 2는 플레이어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파트가 아니며, 철저하게 게임 속의 게임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플레이어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챕터 2는 챕터 1과 어울리지 않을 뿐, 자체적인 완성도는 준수한 편이다. 허나 챕터 3는 다르다. TRPG는 마스터의 역량에 따라 재미가 요동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 기분을 챕터 3에서 절실히 느꼈다.
메트로이드 시리즈처럼 탐색된 곳을 보여주는 미니맵도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고, 단서는 모르겠고, 마스터는 따분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루크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플레이어의 재미야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닐까. '게임 속의 게임', '게임 바깥의 게임'을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메시지를 챙기다가 구조물이 폭삭 내려앉았다. 챕터 1을 플레이했을 때 2021년 최고의 복병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마스터의 허접한 마스터링과 불편한 길찾기에 지쳐가는 상황. 그래도 보스전 만큼은 괜찮은 편이다. 챕터 3는 다른 것보다도 엔딩 연출이 진국이지만,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미기재.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걸 넣었을까? <인스크립션>이 ARG 게임이기 때문이다.
ARG는 현실에서 진행되는 게임을 말한다. <소드 퀘스트, 1982>는 게임에서 얻은 단서로 현실에서 답을 찾는 게임이었다. 정답자는 결승에 진출해 새로운 문제를 풀고, 가장 빨리 찾아낸 사람에게 황금 장식품을 수여한다. <소드 퀘스트>는 비디오게임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선구자이며, 이스터에그의 시작점이자 집합체였다.
<인스크립션>은 ARG를 위한 게임이 아니다. 트레일러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건 카드게임이고, 사전에 ARG 게임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는다. <인스크립션>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은 크게 두 분류다. 놀라운 분위기와 카드게임에 꽂힌 사람, 개발사의 이력을 통해 <인스크립션>이 ARG라는 걸 유추한 사람.
나는 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카드 게임이 꽂혀 들어왔는데, 챕터가 진행될수록 의구심이 커졌다. 엔딩의 연출은 훌륭했지만 머릿 속에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그동안 이스터에그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는 걸 감안하면 답은 명확했다. 이 게임은 ARG였다는 걸.
좋은 ARG 게임이란 무엇일까, 나는 ARG를 알고 있고, 몇 번 참여한 적도 있지만 ARG 마니아 축에는 끼지도 못한다. <인스크립션>이 마니아 대상 게임이 아니라면, ARG 요소는 덤에서 끝냈어야 했다. <인스크립션>은 작품 내적으로 결말을 알 방법이 없다. 이야기도 불완전하다. <인스크립션>의 ARG 요소는 뒷 설정을 추가로 아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진상을 이해하려면 ARG로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야 했다. ARG를 플레이어에게 반쯤 강요하는 셈이다.
나는 그저 분위기 좋은 카드게임을 골랐을 뿐인데 크게 휘어지는 변화구가 들어온다. ARG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 게임이 ARG 장르인지 스포일러 없이 알 수가 없다. (이 개발사는 이런 게임을 수 차례 만들어왔기에, 개발사의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스포일러 없이 ARG 게임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대상이 너무나 한정적이라 문제였을 뿐)
게임이 끝난 직후 세계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떡밥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ARG란 그런 게임이다. 출시 직후, 떡밥이 풀리지 않았을 때만 즐길 수 있는 놀이다. ARG에 흥미가 있어도 출시 첫날 <인스크립션>을 해보지 않았다면 참여하기 힘들다. 나중엔 이미 모든 비밀이 풀려, 수수께끼를 풀면서 놀 무대가 사라져 버린다.
ARG는 마치 퀴즈게임과 같아서, 언어가 안 되면 참여가 불가능한 장르다. 사람들은 디스코드에 모여 자신이 찾은 떡밥을 올리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한다. 그러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참여는 커녕 이해조차 하기 힘들다. 여기까지는 장르의 특성이니 어쩔 수 없지만...
*주의 : <인스크립션> 밖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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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낸 진실은 참혹했다. 이제는 너무나도 식상한 히틀러 음모론에, 개발사의 전작(인스크립션은 후속작이 아니다.)을 해봐야 알 수 있는 최종보스의 정체라니. 히틀러 음모론이야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The HEX>를 플레이하지 않으면 결말에 다다를 수 없다. 이게 기만이 아니면 무엇인가.
<인스크립션>의 실험적인 시도는 인상적이다. 플레이어는 카드배틀의 규칙을 이해하면서, 담비와 방귀벌레, 늑대 등이 펼치는 게임 속 내러티브에 귀를 기울인다. 난적을 해치운 플레이어는 게임 속 이야기가 각기 다른 두 가지 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두막의 이야기와 루크의 이야기. 플레이어는 챕터 2, 챕터 3를 차례로 탐사하면서 이상한 점을 깨닫는다. 게임 속의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은 무언가가 이상한 형태로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생긴 플레이어는 <인스크립션> 속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신이 찾은 이 '이상한 것'에 대해 전세계의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토론하고, 끝내 새로운 결말에 도달한다. 놀랍고도 흥분되는 기획임엔 분명하나...
그것이 플레이어의 기분을 무시할 만큼 좋은 시도로 보이진 않는다. 오두막의 데스 게임에 한껏 몰입한 플레이어는, 오두막을 탈출하자마자 제작진의 거센 채찍질에 직면한다. 정신을 차린 나는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붙이고 싶지만, 내 마음은 마치 챕터 1 엔딩처럼 어두컴컴한 오두막에 갇혀버린 상태다. 정신이 딴 데 팔린 상태로 평범한 게임을 해봤자 감흥이 있을 리가 없다. 오직 결말을 보기 위해 힘겨운 후반부를 견딘 플레이어에게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모든 챕터를 망라하는 환상적인 광경. 이런 걸 할 수 있으면서도 독특한 구성을 위해 포기한다니, 한편으로 괘씸하기도 하고,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스크립션>의 마법은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존재를 깨닫고 밧줄에 자신의 몸을 동여매기라도 했지, <인스크립션>을 구매한 소비자들은 귀마개도 없이 세이렌의 섬으로 나아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11/10, 2021)
11/22, 2023 추가)
* 핵심적인 스포일러 포함
* 케이시 모드
케이시 모드는 출시 초기부터 예정된 업데이트였다. 챕터 1의 캄캄한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카드게임만을 따와 무한히 즐기는 모드. 챕터 2, 챕터 3에 실망한 이들이 바라 마지않던 구조다.
케이시 모드가 추가되었다는 이야기는 진즉 들었지만, 일에 치이고, 다른 게임에 치이면서 차일피일 미뤄왔다. 어느새 1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케이시 모드는 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케이시 모드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미가 동한 나는 재차 <인스크립션>을 설치하고 케이시 모드로의 여정을 떠났다.
케이시 모드는 챕터 1을 베이스로, 챕터 2를 한 스푼 얹은 결과물이다.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가죽을 얻은 채로 출발해, 무작위로 선정된 카드와 교환할 기회를 얻는다. 마치 TCG의 드래프트를 연상케 한다. 플레이의 흐름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클리어를 거듭하면서 게임에 변주가 생긴다.
당신이 <슬더스>를 사랑한다면, <인스크립션> 또한 사랑해 마지않는 게임이 될 터다. 케이시 모드는 단순히 챕터 1의 오두막을 무한히 플레이하게 만드는 공간이 아니며, 게임 속 추가적인 떡밥, 새로운 도전 과제, 난이도 조절, 다양한 덱 빌딩 등 다채로운 옵션을 제공한다.
챕터 2에서 호평받았던, 덱 빌딩 시스템 또한 일부 계승되었다. 자신이 고른 시작 덱으로 출발해, 공짜로 받은 토끼 가죽으로 원하는 카드를 두 장 고른다. 시작 덱 (3장) + 토끼 가죽으로 교환한 카드 (2장) = 합계 5장의 카드를 고르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랜덤성이 아예 배제된다면 플레이의 의외성이 경직되기 쉽다. 따라서 토끼 가죽과 교환하는 카드의 라인업은 랜덤이며, 진행 가능 선택지, 도장 전투, 심지어 보스 전투의 순서마저 랜덤하게 배치되었다. 보스의 기믹이 한정적인 건 아쉽지만, 공략법을 알고 있어도 게임이 시시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슬더스>의 대표적인 다회차 요소는 승천이다. <인스크립션>에는 챌린지 레벨이란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어째 <슬더스>의 승천보다는 <하데스, 2020>의 규약 모드를 연상케 한다. 자신이 짊어질 패널티를 챌린지 포인트에 맞춰 선택하는 행위는 영락없는 규약 모드의 그것이다.
2021.07.19 - [게임 비평] - 하데스 (2020)
<슬더스>는 카타르시스가 적은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채로 전투에 임한다. 전투의 템포는 상당히 느린 편이다. 따라서 덱의 사이클이 잘 돌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이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순간, 플레이어에게 무자비한 대미지가 덮쳐온다. 적의 기믹도 이 사이클을 망가뜨리는 것들이 많다. (덱에 화상, 공허 등의 카드를 섞어놓는다던지)
<인스크립션>에는 사이클이 없다. 상대방의 의도는 알 수 있지만, <슬더스>처럼 대량으로 패를 조정하지 않기 때문에 탑 드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파워 카드가 많은 TCG(예 : 유희왕)에서 자주 보이는, 탑 드로 싸움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떤 카드가 나오느냐에 따라 이 위험을 타파할 수도,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인스크립션>의 승부는 고작 5점차로 결정된다. 시종일관 불리해도 단번에 승부가 뒤집히기 일수. 플레이어는 잘 나가다가도 온갖 불합리에 무릎을 꿇지만, <인스크립션>의 다양한 카드 개조 시스템은 게임 디자이너의 의도를 넘어, 나만의 사기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한다. 난관을 극복하고 소위 '사기'를 쳤을 때야말로 <인스크립션>이 가장 빛나는 시기다.
<슬더스>에선 첫 중간 보스가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어려운 싸움을 강요받는다. 귀족 그렘린은 스킬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힘이 강화되는 몬스터. 따라서 덱 압축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귀족 그렘린을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슬더스>의 1막에선 덱 압축에 도움되는 카드보다는, 깡딜이 좋은 카드를 초반에 챙기는 게 우선시된다. 혹은 특정 몬스터가 안 나오길 기도할 수밖에.
그나마 1막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2막의 노예 관리자는 특정 카드 없이 돌파가 대단히 어렵다. 폭딜, 광역계 카드를 덱에 넣는다고 해도, 첫 턴, 두 번째 턴에 집히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초반에 노예 관리자가 폭딜을 꽂아넣기에 그렇다.) <슬더스>는 훌륭한 게임이지만, 온갖 '억까'로 가득찬 게임이기도 하다.
케이시 모드는 한계가 뚜렷했던 <인스크립션>에 무한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두막의 음침한 분위기를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이미 노인장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때의 추억은 그때의 것으로 남겨두자. 플레이어가 <인스크립션>에 재차 방문할 방법은, 불완전한 카드 게임을 완성된 형태로 내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케이시 모드가 뒤늦게 업데이트된 것도 이해가 된다. (정식 출시까지 약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케이시 모드를 진즉 내놨다면, 사람들이 케이시 모드에 정신 팔려 ARG에 전념하지 않았을 것이다. ARG 장르를 선택한 이상 늦은 업데이트는 필연적이었다. ARG는 <인스크립션>의 특수성을 돋보이게 만든 장치이자, 역린이기도 하다.
챕터 3에 실망한 나는 오랫동안 <인스크립션>을 저평가해 왔다. 지금도 <인스크립션>의 구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원체 잠재력이 뛰어난 작품이었기에 가진 아쉬움이다. 비록 단점이 뚜렷하다곤 하나, 챕터 1의 완성도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챕터 2 또한 챕터 1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했지만, 못 만든 녀석으로 치부하기엔 아까운 작품이었다.
케이시 모드는 각자의 아쉬움을 한 데 묶어 멋진 솜씨로 완성했다. 호불호가 갈렸던 ARG조차 한 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산으로 가다 못해 개발자의 별개의 작품까지 알아야 이해가 가능했던 결말과 달리, 케이시 모드의 ARG는 그야말로 덤 수준이다. 이쯤되면 나로서도 기존의 평가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인스크립션>에 갈채를 보낸다.
평가 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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