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간 JRPG의 트렌드를 이끈 프랜차이즈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페르소나다. 이들이 처음부터 잘 나갔던 건 아니다. 초기작 여신이문록 페르소나, 페르소나 2 죄・벌은 시장의 큰 반향을 끌어내지 못했고, 진 여신전생의 이름값에 눌려 파생작 취급을 받곤 했다.
그래서일까, <페르소나 3, 2006>(이하 P3)는 다른 노선을 취했다. 여신전생의 음울한 색채는 유지하되, 오컬트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학원 일상물 파트를 대폭 증강했다. <P3>는 헤비메탈의 하드코어함을 줄이고, 팝의 색채를 입혀 재단장한 타이틀이었다.
<P3>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형편없는 던전 디자인, 단순 스펙으로 때려 부수는 보스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타르타로스의 이미지, 악마 합성의 불편함 등등. 원작 팬이 듣기에는 거북한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이 작품의 팬이다. <P3>는 여신전생과 페르소나의 페이소스를 적절히 섞어, 꿈도 희망도 없는 본가 시리즈에 대중성을 더해 주었다. 커뮤니티 시스템은 JRPG의 스토리 텔링 문법을 바꾼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재즈, 힙합, 일렉트로닉 등의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면서 팝 스타일의 보컬을 입힌 사운드트랙은 시리즈의 분위기를 정의하는 주요 포인트였다.
휘청거리던 아틀러스는 이 작품으로 분위기를 일신한다. 이듬해 확장판 격인 <페르소나 3 FES>(이하 FES)가 출시되었다. <FES>는 문제 개선보다 컨텐츠 확장을 선택했다. 신규 커뮤니티, 일정 조정, 리버스 완화, 후일담까지. 제작진의 승부수는 결과적으로 옳은 방향이었다. <FES>는 자신들의 단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물이다.
얼굴 없는 등장인물, 무표정 캐릭터,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살벌한 이미지까지. 이래 봬도 진 여신전생에 비하면 순한 맛이다. 여신전생에서 페르소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답다.
벌벌 떨면서 권총을 자신의 이마에 들이미는 여성.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보이는 남성. 밤이 드리우자 전자 장비가 작동을 멈추고, 노란 달빛이 세상을 비춘다. 거리에는 관이 살아있다는 듯이 직립 상태로 놓여 있고, 남자는 쓱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자기 갈 길을 간다. 참으로 기묘한 세상이다.
도입부
적막이 흐르는 건물.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고작 문을 열었을 뿐인데 총성이 울릴 뻔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듯한데...
수상한 게 한 둘이 아니다.
학원을 안내해 주기로 한 타케바.
표정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만 보면 영락없는 학원 청춘물인데...
묘한 오해를 산 주인공.
아무래도 이상하다.
달이 샛노랗게 변하는 것도, 거리를 가득 메운 관도,
수상할 정도로 호전적인 소년도, 다들 무언가를 감추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관찰 대상이 된 주인공.
순찰 도중 쉐도와 맞닥뜨린 사나다.
쉐도에게 쫓겨 기숙사로 도망치게 된다.
기숙사로 침입하는 쉐도.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된다.
자신의 힘을 각성해 쉐도를 물리친 주인공.
이내 힘이 다해 쓰러지고 만다.
형편없는 전투와 던전 파트
<P3>는 동료들을 직접 조작할 수 없다. 행동 방침을 정해 동료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AI다. 전투 흐름과 상관없이 텐타라후, 타룬다를 남발하니 동료가 짐짝처럼 느껴진다. 광역기 2번이면 끝날 전투가 디버프기를 남발하면서 늘어진다. 사나다, 미츠루가 멍청이도 아닐텐데, 왜 이렇게 구현했는지 모를 일이다.
후속작에선 행동 방침조차 불편하다는 의견이 속출, 결국 동료를 직접 조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페르소나 3 포터블>(이하 P3P)은 직접 동료를 조작, 팀원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크게 줄었다.
동료 조작 문제는 특별과외활동부의 인간관계를 대변하는 듯하다. <P3>의 동료들은 서로 간섭하는 일 따위 없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던전 공략이 길어지면 피로도가 쌓여 오래 싸우지 못하고 귀가하기 일쑤다. 전투 도중 자신이 위기에 쳐하면 혼자 도망치기도 한다. 결국 이 문제는 설정과 분위기를 충실하게 지킬 것이냐, 이용자 편의를 신경 쓸 것이냐의 양자택일이다. 동료들이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똘똘한 AI'였다면 모를까, 어설프게 분위기를 구현하려다 이도저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P3>는 <진 여신전생 3 녹턴, 2003>의 프레스 턴 시스템을 계승했다. 단순히 레벨로 찍어 누르는 배틀 양상에서 벗어나 턴제 배틀에 전략성을 첨가한 시스템, 약점 공격 혹은 크리티컬에 성공하면 추가 행동을 얻어 전세가 급격히 기울게 된다. 이 규칙은 적들도 똑같이 적용된다.
페르소나는 전투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플레이어는 적의 장단점을 파악해, 상성에 맞는 페르소나로 바꿔가며 전투를 진두지휘한다. 스킬 배치에 따라 페르소나의 단점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다. 아바돈의 약점은 빙결(氷)과 빛(光), 계승 스킬로 빙결 내성과 빛 무효를 습득하면 약점 없는 페르소나가 탄생한다. 문제는 합성 결과가 랜덤이라는 것이다.
악마 합체는 여신전생 시리즈의 정체성이다. <진 여신전생 3 녹턴>은 원하는 스킬의 악마를 뽑기 위해 합성 - 해제를 질릴 정도로 반복하는 악마적인 게임이었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높은 난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난이도를 굳이 불편함으로 구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불편함은 자칫하면 불쾌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P3>는 <진 여신전생 3 녹턴> 식의 합체 노가다를 고집했고, 확장판 <FES>에서도 개선되지 않았다. 아틀러스가 백기를 든 것은 <페르소나 4> 이후의 일이었다. (본가 시리즈 또한 이 방식을 버렸다.)
악마 합체는 페르소나 합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굳이 페르소나 편에서 악마 합체 시스템을 소상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신전생 ~ 페르소나의 세계에는 다양한 악마(페르소나)가 널려있고, 악마와 악마를 합성하여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정도면 알면 충분하지 않을까.
<P3>는 남들에게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고전 특유의 불친절함은 대강 넘어가더라도, 던전 파트의 완성도는 가히 재앙 수준이기 때문이다. 타르타로스는 월광관이 변화한 기이한 공간이지만, 탐색하는 내내 같은 풍경, 같은 소리가 반복되며 플레이어를 지치게 만든다. 심령 스팟 같은 공간은 어느새 노잼 구역으로 둔갑하여, 오랜 방치로 '거둬들이는 자'가 출현하는 것 외에는 음울한 분위기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어딜 가더라도 비슷비슷한 형태에, 특유의 분위기마저 훼손된 공간. 도저히 탐험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동료들을 풀어 자동 탐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노가다도 줄었다. 거꾸로 말하면 맵에 볼 게 없으니 동료들 보내서 탐색하고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페르소나 시리즈의 보스전은 아군 버프, 적군 디버프가 핵심이다. 적의 패턴에 따라 페르소나를 교체해 가며 싸우는 재미 따위 잘 구현되지 않았다. 보스는 약점은커녕 공략법조차 희미한 녀석들이 태반이다. 이미 10년도 더 전에 <파이널 판타지 6, 1994> <크로노트리거, 1995> 등이 보스 공략의 즐거움을 선사한 바 있다. 달팽이가 껍질에 숨으면 공격을 자제하고, 회오리 에너지를 모을 때 바람의 칼날로 상쇄한다. 안타깝게도 <P3>엔 그런 것이 없다. 던전과 전투, RPG를 구성하는 핵심축이 풍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커뮤니티 시스템, JRPG 스토리 텔링의 문법을 새롭게 정의하다
캐릭터 게임은 부실한 완성도를 캐릭터의 매력으로 채우는 작품들이 많다. 확실히 <P3>의 전투는 엉성하다. 전략 전술의 폭을 넓히려면 페르소나 합체가 필수적이다. 페르소나를 합성하고, 보다 적절한 스킬을 붙이기 위해 노력한다. 강한 페르소나를 갖추어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전투는 페르소나의 시연장으로 거듭난다. 여기에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첨가되어, 맥 빠진 전투가 그럴듯한 전투로 포장되었다.
줄기차게 사용되는 컷인 역시 시리즈의 핵심 축이다.
컷인은 강조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일상 회화, 심각한 장면, 전투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약점을 찌를 때 간헐적으로 컷인이 발생한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연출이 게임 분위기를 얼마나 좌우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이후 페르소나 시리즈는 컷인 연출을 적극 사용하여, 아니메 풍의 세련된 디자인을 적극 어필하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커뮤니티 대상 캐릭터는 메인 스토리와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를 갖췄다. 유우코 커뮤니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인공(플레이어 캐릭터)이 아닌 유우코다. 플레이어는 유우코의 고민을 듣고 지지해 주는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플레이어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이야기를 탐색한다. 내가 흥미를 느낀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고, 이야기의 순서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캐릭터에 애정을 느낀다.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면 그가 몸담은 세계도 관심이 가는 법이다. 서브 퀘스트라고 생각했던 커뮤니티가 어느새 한 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캐릭터에 집중하면 서사가 매몰되기 쉽다"는 문제를 슬기로운 방식으로 헤쳐나간 것이다.
커뮤니티 레벨이 성장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이성 캐릭터와 친해졌다면 종국에는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연인이 될 것인지 묻는 선택지는 페르소나 4에서 최초로 도입되었다.)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데이트에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인 이후 볼 수 있는 이벤트가 많은 것도 아니다. RPG에서 연애 시뮬레이션 같은 볼륨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것이다. 커뮤니티는 페르소나가 여신전생의 꼬리표에서 벗어나, 시리즈의 노선이 전과 다름을 공고히 했다. <여신이문록 페르소나> <페르소나 2 죄・벌> 팬에겐 아쉽겠지만, 이 시점부터 우리가 익히 아는 페르소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키메키 메모리얼, 1994>(이하 도키메모)의 사회적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내수용에 마이너 장르로 출발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성공한 게임이었고, 온갖 미디어 믹스(원 소스 멀티 유즈)로 전파되어 금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이 게임의 여파는 현재의 아이돌 게임, 나아가 캐릭터 산업에게까지 이어져 새로운 마케팅 모델을 탄생시켰다.
<도키메모>가 유행하면서 온갖 연애 게임들이 우후죽순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신은 부족했고, 연애 게임 붐은 빠르게 식었다. 그중에는 <동급생 2> <하급생>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게임도 있었지만, 태생이 성인 게임인지라 접근성이 떨어졌고 판매량도 <도키메모>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도키메모>의 특별함은 비단 게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키메모>를 둘러싼 총체적 사업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2021.08.30 - [게임 비평] - 도키메키 메모리얼 (1994)
<P3>의 스테이터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전투 계열은 힘, 마력, 내구처럼 전투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커뮤니티 계열은 플레이어의 커뮤니티 활동에 쓰인다. 예를 들어 매력 수치가 낮으면 유카리 커뮤를 진행시킬 수 없고, 용기 수치가 낮으면 후카 공략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커뮤니티 계열의 스탯)
자신을 육성하여 다른 캐릭터를 공략하는 행위, 개개인의 이야기, 등장인물과 연인 관계로 나아가는 컨셉 등은 <도키메모>의 영향을 받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키메모>의 일상은 평범하다. 주중에는 자기 개발과 부활동에 투자하고, 주말에는 연애 전선에 뛰어든다. 이성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거나, 미리 약속한 사람과 데이트를 즐길 수도 있다. 쇼핑, 동물원, 영화관 등 영락없는 데이트 코스지만 상대방은 그다지 데이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상점가에서 만나 잠시 쇼핑을 하고, 감상을 나누다가 헤어진다. 데이트 같은 주요 이벤트마저 일상의 한 갈래로 소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는 소린 아니다. 조건을 맞추면 데이트 도중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고, 하츠모데, 수학여행, 문화제,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굵직한 이벤트가 산재해 있다. <P3> 또한 이런 탬플릿을 취했다. 비록 <도키메모> 만큼 연애 이벤트의 볼륨이 크진 않지만, <도키메모>가 연애 시뮬레이션, 나아가 청춘 시뮬레이션으로 제작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되려 RPG임에도 학창 시절의 이벤트, 방대한 커뮤니티를 덧붙였다는 게 놀랍다.
커뮤니티는 총 10단계까지 존재하며,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즐길 수 있다. <P3>는 스케줄 관리 게임이다. 메인 스토리 외의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게 핵심이다. 노래방에서 노래 연습에 매진해 용기 스탯을 올리거나, 타르타로스(던전)를 탐색하여 진행도를 높일 수 있다. 커뮤니티를 진행하여 헌책방 노부부의 이야기를 감상할 수도 있다. 사이가 깊어지면 페르소나 합성에 이점이 붙어, 커뮤니티를 활발하게 진행하는 편이 게임 진행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성과의 커뮤니티 랭크가 올라가면 연인 단계로 발전한다. 처음이야 좋지만 두 번째가 문제다. 이미 연인이 생긴 상태로 새로운 연인이 생긴다면 이것은 바람이 아닌가. 대부분의 게임들이 연애 대상을 한 명으로 한정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도키메모>는 연애의 딜레마를 슬기롭게 극복한 타이틀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갈고닦아 히로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히로인들이 꼬인다. 잘난 남자를 마다할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주인공을 가장 좋아하는 히로인이 전설의 나무 아래에서 고백한다. 주인공은 고백받기 전에 수많은 여자들과 데이트를 거듭하며 합법적?인 연애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놀러 다니는 걸 데이트로 인지하는가는 의문이지만)
<P3>는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스토리다.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 주인공과 히로인의 유대감이 깊어진다. 서로 유대감이 깊어지면 전투 파트가 훨씬 수월하게 작동한다. 시스템과 스토리가 일치하는 좋은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연인 관계를 남발하는 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주인공에게 여자친구가 많을수록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서로 불신하면서도 이해관계가 맞아 모인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면서 진정한 원 팀으로 거듭난다. 믿고 의지하는 동료인데도 못난 남자 하나 때문에 팀 전체를 좀먹는 것이다. 그럼에도 메인 시나리오에선 큰 갈등 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운다. 이게 뭥미?
그래서 <P3>에는 리버스란 것이 있다. 리버스란 연인 관계가 여럿이 되면 서로 눈치를 채고 싸한 기류가 흐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리버스를 오래 방치하면 브로큰 상태가 되어 관계가 파탄 난다. 파탄난 관계는 전투 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관련 페르소나를 전서에서 불러낼 수 없게 된다. 양다리 남발을 막는 그럴듯한 시스템이지만, 리버스-브로큰이 게임을 흥미롭게 만들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도키메모>에는 상심도란 숨겨진 스탯이 있다. 상심도가 오르면 '요즘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이 흐르는 듯하다'라는 문구가 뜬다. 폭탄이 생긴 것이다. 이 상태로 방치하면 폭탄이 터지고, 학교에 나쁜 소문이 돌면서 주인공에 대한 평가가 급락한다. 폭탄을 해체하는 유일한 방법은 데이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치 않는 히로인이라도 폭탄이 생기면 얄짤없이 데이트 약속을 잡아야 한다.
폭탄은 합법적인 문어발 연애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게임의 난이도를 좌우하는 핵심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도키메모>는 히로인이 고백하면 거절할 방법이 일절 없어, 관심 없는 히로인의 호감도가 오르지 않도록 (폭탄이 안 터지게끔 주의하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일상 파트는 스케줄 관리가 핵심이다. 리버스를 해소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FES>의 커뮤니티는 높은 스탯을 요구하거나 후반부에 개방되는 것들이 많고, 심지어 기간 한정으로 진행되는 녀석도 있다. 전투, 육성, 커뮤 할 게 태산인 게임에서 일주일의 공백은 치명적이다. 커뮤가 몰린 시기에는 더더욱. 리버스 시스템은 바람둥이 플레이어를 제어할 안전장치였을 터다.
그러나 <도키메모>의 폭탄 시스템과 비교하면 초라해진다. 폭탄이 터지면 여태껏 쌓아온 관계가 허물어진다. 특히 시오리처럼 호감도가 잘 오르지 않는 타입은 치명적이다. 여태껏 시오리만 보고 달려왔는데, 메구미 & 유미에게 붙은 폭탄을 방치할 수도 없다. 불가피하게 그녀들과의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만남을 거듭하면 메구미 & 유미의 호감도가 높아져, 전설의 나무 밑에서 고백하는 히로인이 메구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불안감이 마음 속에 싹튼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도키메모>를 명작으로 이끌었다.
리버스 시스템은 게임을 흥미롭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안전장치로서의 역할도 불안정하다. 플레이어는 개인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원치 않은 연인이 된다. (이 문제는 후속작에서 교정되었다.) 리버스는 매번 잘 작동하지 않고, 가끔씩 고개를 들이밀고 나타나 플레이어를 피곤하게 만든다. 타인과의 교류로 힘을 얻는 설정과, 커뮤니티의 매끄러운 연결이 무분별한 연인 남발로 인해 손상된다. 나와 히로인의 교류는 깊어질지 몰라도, 같은 동료일 터인 히로인과 히로인의 유대 관계는 땅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후속작(P4, P3P)이 발매되자 리버스는 자취를 감췄다. 리버스는 설정과 편의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비운의 시스템이었다. 주인공의 카사노바 기질은 후속작에서도 이어져, 문어발 연애는 페르소나의 정체성으로 남았다. 유대와 양다리 모두를 고집하는 한, 이야기의 짜임새는 앞으로도 미심쩍을 전망이다.
* 후속작의 가벼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밸런타인)
문어발 연애의 대가는 죄책감과 씁쓸함 뿐이다.
바람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히로인들, 그나마 이 정도면 양반이다.
최신작은 양다리의 대가로 주인공이 처맞고 끝내는 방식을 취했다. 이것도 페널티라면 페널티지만, 이야기를 잘 매듭지었다고 보기에는 아쉬웠다. 결국 최종전을 앞두고 팀 워크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 아니던가. 유대가 핵심인 게임에서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꼴이라니. 그래서인지 문어발을 걸쳐도 메인 스토리는 차질 없이 진행된다. <페르소나 5>의 밸런타인 이벤트는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었다. 이것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으나, 이야기의 흐름과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진다.
카미키의 이야기 (커뮤니티 랭크 2)
커뮤니티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렸다. <P3>의 구성원들은 어딘가 고장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유카리, 준페이, 아마다, 아이기스, 카미키...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결핍된 인간들이 자아내는 드라마는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동료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목적을 숨기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에서 힘껏 발버둥 치는 사람들. 주인공은 그들과 진지하게 마주하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걸 느낀다.
삐걱거리는 관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타르타로스 탐사는 끝이 없다. 동료들은 방대한 던전에 질려, 하나둘씩 컨디션이 다운되어 떨어져 나간다. 전투 시스템은 한 술 더 뜬다. 멤버들은 플레이어의 의향과 상관없이 자기 할 일을 한다. 화력을 집중해 쓰러뜨려야 할 판에 디버프 기술을 남발한다. 마치 협력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 같다. 위기에 빠지면 혼자 도망칠 때도 있다. 이쯤 되면 동료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동료들은 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않는다. 유카리는 여름, 미츠루는 겨울 즈음 되어야 첫 커뮤니티가 열린다. 어째 동료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훨씬 쉽다. 향후 전개를 감안하면 99% 의도된 사양일 가능성이 크다.
엔딩 장면의 아련함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용두사미 작품이 팽배한 세상에서(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딱 이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퇴장을 지켜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P3>의 스토리는 후반부에 쏠려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초중반의 이야기가 결코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불안정한 사람들이기에, 서로 보듬어주는 이들을 만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전개가 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의 소년 만화에서 걸핏하면 찾는 인연의 힘이다. 서로 뒷통수치고 의심하는 여신전생 시리즈와 달리, 페르소나 시리즈(특히 3편 이후의)의 키워드는 유대와 신뢰다.
인연, 유대 운운하는 소리는 진부하게 들리기 쉬우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동료애를 내세웠다고 해서 비판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라면과 짜장면, 뼈해장국을 수십 년째 즐겨 찾는 데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진부함이 도를 넘으면 익숙함을 넘어 유치하게 들린다. 뻔한 이야기를 세련되게 다듬는 효과적인 방법은 디테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P3>는 80시간 동안 이야기를 섬세하게 쌓아 올렸고, 처음에는 별 거 아니었던 이야기들이 모여 후반부에 폭발하게끔 세심한 조정을 가했다.
<FES>는 한 술 더 뜬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서사에 후일담을 입혀, 등장인물들이 겪을 후폭풍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등장인물들은 본편에서 정신적 성장을 거듭했지만, 후일담에선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로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 이래서야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주인공은 특별한 사람이다. 스스로 구심점이 되어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인연을 맺어 자신의 힘을 증폭시킨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당을 베어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전형적인 용사물의 플롯이다. <P3>는 평범한 용사물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 타인에게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들, 삶의 답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말이다.
<P3>는 흔하디 흔한 구세주 전설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은유로 가득 찬 작품이다. 현실의 나는 세상을 구할 힘도 없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려워하는 말 더듬이 샌님에 불과하다. 특별과외활동부 사람들이라고 해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려워하고, 때로는 죄책감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커뮤니티 스토리는 훨씬 직접적으로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부부싸움에 시달리는 학생, 시한부 청년, 가족을 버린 파계승, 온라인 게임에 푹 빠진 Y양 등을 등장시켜 현실의 이야기를 그렸다. 종국에는 고민을 떨치고 스스로 일어서, 주인공의 곁을 떠나가는 이도 많다. 남녀 간의 이별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P3>의 이별은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품는다고 해서 꼭 잘 되리라는 법은 없다. 나보다 잘난 사람쯤이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평가 점수 ★★★★★
당초 <P3> <FES> <P3P> 모두 모난 게임이라 생각해 왔다. RPG의 메인 플롯과 개인의 이야기를 결합한 커뮤니티 시스템은 탁월했지만, 던전과 전투 파트의 허술함은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든 <FES>는 막연한 추억 속 이미지보다 훨씬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본편, 커뮤니티, 후일담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게임의 형식을 빌려 비틀어 놓은 것이었다.
최근 <P3P>이 리마스터되면서 <FES>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예전엔 2회차가 즐겁고 편의성이 좋은 <P3P>를 선호했는데, 최근 두 작품을 차례로 즐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훗날 두 작품을 보는 눈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아틀러스의 P3P 리마스터 결정은 여러모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P3P 리뷰에서 계속)
2023.03.19 - [게임 비평] - 페르소나 3 포터블 (2009)
'게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2022) (0) | 2023.07.30 |
---|---|
페르소나 3 포터블 (2009) (0) | 2023.03.19 |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 (0) | 2022.12.31 |
428 봉쇄된 시부야에서 (2008) (0) | 2022.12.08 |
백 년의 봄날은 가고 (2022) (0) | 2022.10.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