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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428 봉쇄된 시부야에서 (2008)

by 눈다랑어 2022. 12. 8.

솔직히 고백하건대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블로그에서 종종 연애 게임을 다루기도 하고, 비주얼 노벨 게임을 언급한 적도 있었다. 근시일 내에 엘프 게임을 하나쯤 더 조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럼에도 비주얼 노벨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비주얼 노벨을 이해하려면 우선 사운드 노벨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춘소프트는 소설의 게임화를 꿈꾸며 <제절초, 1992>를 출시, 사운드 노벨이란 장르를 제창했다. 배경화면을 뒤로 한채 텍스트가 화면을 덮는 구성. 적절한 효과음이 글에 몰입감을 더해준다.

 

사운드 노벨이란 이런 것

 

소설의 게임화 (제절초)

춘소프트는 <카마이타치의 밤, 1994>을 내놓으며 사운드 노벨의 가능성을 한껏 펼쳐 보았다. 춘소프트의 성공은 성인 게임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그 시절 성인 게임들은 비주얼 노벨 같은 게임들이 즐비했다. <미친 과실, 1992> <카와라자키 가의 일족, 1993>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 1994> <몽환포영, 1995> 등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게임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꼭 비주얼 노벨로 연결되진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노벨류 게임은 지향점부터 다르다.

 

글과 그림, 선택지로 이루어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이런 흐름을 바꾼 것이 리프였다. 리프는 <시즈쿠, 1996> <키즈아토, 1996> <투하트, 1997>를 연이어 내놓으며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배경을 덮는 방대한 텍스트는 사운드 노벨의 방향성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글과 그림, 선택지로 이루어진 게임은 <시즈쿠> 이전에도 많았지만,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 리프의 역할이었다. 비주얼 '노벨'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단어였으며, 처음부터 철저한 마케팅 의도를 갖고 기획되었다.

 

플레이어의 역할이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비주얼 노벨은 텍스트 어드벤처의 하위 장르다. 사실 비주얼 노벨이나 (2000년대 이전의) 텍스트 어드벤처나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성은 동일하되 텍스트 출력 방식이 살짝 다를 뿐이다. 그러나 지향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2000년대 이전의 노벨류 게임은 '게임적 요소'를 중시한 것들이 많았다. 스스로 탐색하고, 추리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행위 말이다.

 

예컨대 <카와라자키 가의 일족>은 독특한 분기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선택지가 나올 때 저장, ⓐ-① 선택지가 오답이라면 ⓐ-② 선택지를 골라야겠다"같은 방식은 이 게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목표를 설정하고, 어떤 선택지가 잘못되었는지 처음부터 검증해야 한다.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형식에 게임적 사고가 탑재된 것이다.

 

비주얼 노벨은 편안한 이야기 감상에 초점을 맞췄다. 저장은 상시 가능하고, 선택지를 잘못 골라도 곧장 되돌아가서 플레이할 수 있다. 플레이어를 고뇌하게 하는 질문 따위 던지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고민거리는 대개 하나뿐, A 캐릭터 루트로 가느냐, B 캐릭터 루트로 가느냐 정도다. 플레이어의 역할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춘소프트는 고전 텍스트 어드벤처의 작법을 따랐다. 그들은 사운드 노벨의 선구자였음에도 플레이어의 개입을 중시한 회사였다. <거리, 1998>(이하 마치)의 ZAP 시스템은 시나리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장르의 경직성을 유연하게 뛰어넘었다.

 

실사풍 게임은 서구권에서 많이 시도되던 방식이었다. <모탈 컴뱃> <NBA 잼> <7번째 손님> 등 셀 수 없이 많은 게임들이 지나갔다. 그에 비해 일본의 실사풍 게임은 요원한 것이었다. <마치>는 실사 없는 일본 시장에 실사 게임으로 도전했다. 배우들의 연기를 필름에 담아 게임과 융합시키려 했다. 사운드 노벨과 실사의 결합, <마치>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시부야 거리를 로케 삼아 수많은 엑스트라를 기용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돈이다. <마치>는 일부 마니아, 리뷰어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판매량은 썩 좋지 않았다.

 

거리 ~운명의 교차점~

<마치>의 독창성은 군상극에서 나왔다. 주인공은 8명이며 서로 남이다. 시나리오는 주인공 각자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마치 독립된 8개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 같다. <마치>의 시스템은 영화 <나비효과, 2004>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주인공의 사소한 행동이 각자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게끔 구현한 것이다.

 

군상극은 문학,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사랑받은 서술 방식이다. <삼국지 연의>는 등장인물이 무수히 많은 작품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축은 둘, 셋 정도로 정해져 있다. 조조의 상대는 원소, 여포, 한수 등으로 상황에 따라 바뀌곤 하나, 전체적인 틀은 유비 조조의 대립, 이들을 견제하는 제3 세력 손권 정도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amazon.co.jp/PS-one-Books-%E8%A1%97-%E9%81%8B%E5%91%BD%E3%81%AE%E4%BA%A4%E5%B7%AE%E7%82%B9-%E3%82%B5%E3%82%A6%E3%83%B3%E3%83%89%E3%83%8E%E3%83%99%E3%83%AB%E3%83%BB%E3%82%A8%E3%83%9C%E3%83%AA%E3%83%A5%E3%83%BC%E3%82%B7%E3%83%A7%E3%83%B33/dp/B0000634MI

기록물 수집조차 사이드 퀘스트의 일종이다. (베요네타)

게임의 군상극은 타 매체보다 유연하게 작동한다. 게임은 메인 스토리를 중심으로 하되, 수십 수백 개의 사이드 퀘스트를 제공한다. 플랫포머 액션 게임인 <베요네타, 2009>는 사이드 퀘스트가 없다시피 한 작품이지만, ~의 기록 찾기, 까마귀 찾기, 스테이지 트로피, 하드 난이도 등등 숨은 과제들이 상당히 많다. 즉, 게임은 무수한 옴니버스의 집합체다. 옴니버스에 유리한 매체라면 군상극의 표현에도 적합할 터, 메인 스토리가 빈약하거나 아예 없는 게임도 나오는 판에, 유비와 조조처럼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을 반드시 구현할 필요가 없다.

 

게임과 군상극 (대항해시대 2)

<대항해시대 2, 1993>는 6명의 인생사를 메인 스토리 없이 다뤘다.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영유하지만, 때때로 다른 주인공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곤 한다. 다른 매체였다면 쉬이 도전하기 힘든 기획이다.

 

<제절초>가 발매되었을 때 사람들은 '왜 소설을 게임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춘소프트의 발자취를 보면 답은 명백하다. 게임이 아니면 그들이 꿈꾸는 그림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마치> 발매로부터 10년 후, 춘소프트는 재차 실사 게임에 도전장을 냈다. <428 봉쇄된 시부야에서>(이하 428), 무대는 여전히 시부야였다. <마치>의 실질적인 후속작을 출시한 것이다.

 

<428> 또한 기본 골자는 같다. 복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군상극.

 

처음에는 카노우 신야, 엔도우 아치 두 사람의 이야기만 열람할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다양한 캐릭터가 해금되는 방식.

 

<428>은 전작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중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실사, 시부야, 시스템, 사운드 노벨, 때때로 과장된 연기까지... <마치>의 구성 요소 태반이 <428>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마치>가 철저한 옴니버스 구성이었다면, <428>은 각 주인공의 이야기가 메인 시나리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 드라마 24시 1-1

<428>는 대단히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초반부터 후반까지, 잠시 숨을 돌릴만하면 새로운 반전이 기다린다. 설정은커녕 캐릭터조차 잘 모르는 상태에서 급박한 전개가 이어진다. 이 앞에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 궁금한 나머지 책의 뒷 페이지를 넘긴다. 독자가 눈을 뗄 수 없게 설계된 것이다. 발 빠른 전개는 미국 드라마 <24시>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유괴범을 찾아서

처음부터 이야기가 가파르게 진행된다.

 

수상쩍은 남자가 히토미에게 다가가고 있다.

혹시 이 사람이 용의자가 아닐까?

 

아무래도 미심쩍다.

체포하는 게 좋겠어.

 

순식간에 용의자를 체포한 경찰. 용의자를 확보한 순간, 엉뚱한 사람에게 몸값을 빼앗기고 말았다.

 

용의자 아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결국 배드 엔드로 직행한다.

 

이제 아치의 이야기를 확인할 차례.

 

아치가 히토미에게 접근하지 않게 유도하면 경찰이 덮치지 않는다.

B를 선택하여 아치의 행동을 바꿔보자.

 

아치의 행동으로 인해 상황이 변했을 터.

카노우의 이야기로 돌아가 뒷 내용을 확인하자.

 

진행이 막히면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를 확인해보자.

십중팔구 이야기가 바뀌었을 것이다.

 

힘껏 노력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했다. 이대로 배드 엔딩인걸까.

 

이야기는 1시간 단위로 진행되며, 주인공도 그때그때 다르다.

각 캐릭터의 이야기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일관된 문체를 보여준다.

 

아치 스토리

쫓기는 히토미를 돕다가 온갖 해프닝이 발생하는 이야기.

 

타마 스토리

귀엽고 포근한 인상의 타마.

개그 코드가 많이 묻어나는 에피소드다.

 

미노리카와 스토리

툭하면 삿대질하는 남자 미노리카와.

프라라이터로서의 촉을 믿고 사건에 뛰어든다.

 

카노우 스토리

신참 형사 카노우, 시종일관 진지한 에피소드지만 깨알같은 웃음 포인트가 많다.

 

웃기게 연출해서 그렇지, 화보 같은 장면이 꽤 많다.

내수를 신경쓴 게임이니만큼 일본 특유의 개그 코드가 눈에 띈다.

이 게임이 취향에 안 맞는다면 바로 이런 감성 때문일 것이다.

 

오오사와 스토리

엄청난 사회적 명성에 가려진 처참한 인간 관계.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힌트를 안 보고 싶으면 무시하고 넘어가도 된다.

익숙해지면 굳이 힌트를 보지 않아도 어딜 건드려야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게임 시스템은 <마치>와 동일하다.

 

사건 현장의 노란 테이프를 연상케 한다.

KEEP OUT이란 문구와 함께 이야기가 중단되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 점프하면 뒷 얘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아치의 17:35를 보려면 카노우 17:35에서 접근하는 방식.

 

점프란 이런 것

 

점프도 조건이 있다.

점프를 하려면 이야기를 올바른 형태로 조립할 필요가 있다. 14:20분경, 카노우가 오오사와에게 전화하는 그림을 연출하고 알맞는 답변을 받아내야 한다. <428>은 일직선형 게임이다. 장편 소설을 군상극이란 형태로 파편화하여, 이야기를 짜맞춰야 다음 챕터가 진행되는 방식을 택했다. 퍼즐 게임의 정의에 딱 부합하는 형태다.

 

<이브 버스트 에러, 1995>(이하 EBE)는 퍼즐 요소를 적극 활용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다. 이 게임은 코지로와 마리나, 두 명을 번갈아 진행해야 진상에 다다를 수 있다. 이 게임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후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게임이 <마치>와 <바이오하자드 2>일 것이다.

 

사실 <EBE>는 퍼즐 게임이 아니다. 스스로 추론하는 과정 없이, 이곳저곳 클릭하면 이야기가 알아야 진행된다. 도중에 진행이 막혀도 대체 왜 막힌 건지 알기 어렵다. <EBE>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음에도 활용 방법이 영 신통찮은 것이다. 새삼 <428>의 내러티브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시간대 별로 행적을 알 수 있는 타임 차트.

갈림길이나 점프 구간도 친절히 표시되어 있다.

 

튼실한 볼륨

노벨류 게임들은 분량이 짧은 편이다. 대충 10시간 이내. 가장 큰 이유는 탐색하고 헤메이는 과정이 생략되서일 것이다. <428>은 노벨 게임이자 퍼즐 게임이다. 결말에 다다르려면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다. 글의 분량도 제법 방대하다. 클리어에 20시간 이상, 이것저것 즐기면 30시간은 너끈하다. 

 

즐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다양한 배드 엔드를 수집하는 재미.

 

농부가 된 카노우

 

진짜 '배드 엔드'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타마

 

에필로그 1

본편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나리오 라이터는 추리소설 작가이자 <카마이타치의 밤>에도 참여한 아비코 타케마루.

 

다양한 라이터를 기용하여 색다른 느낌을 준다.

두 번째 에필로그.

가장 이질적인 에피소드로, 실사를 버리고 애니메이션의 컷씬을 사용했다.

첫 문장부터 나스 키노코의 향취가 듬뿍 느껴진다.

 

느닷없는 애니메이션 풍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본편의 미디어믹스(원 소스 멀티 유스)로 활용된 카난 편.

애니메이션 <CANAAN, 2009>에서 <428>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밖에도 엑스트라 캐릭터의 숨겨진 이야기라든가,

 

숨겨진 단서를 찾아 점프할 수 있는 코믹 에피소드도 있다. 이야기 중심의 게임은 대개 2회차 플레이가 꺼려지기 마련. 이쯤되면 2회차 플레이가 없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분량이다.

 

호불호를 결정짓는 남자

캐릭터는 또 어떤가. 80년대 말 한국에서도 유행하던 헤어스타일. (드라마 인간시장의 장종찬이 딱 이런 스타일이다.) 촌스러운데 어째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미노리카와의 독특한 이미지는 캐릭터의 의외성, 발빠른 전개와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만약 미노리카와에게 별다른 매력을 못 느꼈다면 이 게임과 상성이 안 맞을 가능성이 높다.

 

 

 

평가 점수 ★★★★★

게임의 군상극을 이처럼 영리하게 표현한 게임은 드물다. 구심점이 될 메인 스토리를 쌓되, 각자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끔 풀어나가는 것 말이다. <428>의 성취는 <마치>의 유산에서 나왔다. 시스템조차 영락없는 <마치>다. <마치>를 새턴의 숨은 명작으로 꼽는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428>은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마치>가 놓친 부분을 잡아내어 요술같은 솜씨로 마무리했을 뿐이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명작이란 단어가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428>이 그저 그런 흥행을 기록한 것은,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에 굳이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처럼 들린다. 많은 노벨류 게임이 캐릭터 소비에 집중하지만, 시스템을 갈고 닦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은 캐릭터 소비 중심으로 변했다. 애꿎은 소비자를 탓할 수도 없다. 스스로 장르의 가능성을 열고 스스로 가능성을 닫은 작품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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