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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1993)

by 눈다랑어 2022. 12. 31.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젤다의 전설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젤다의 노선은 슈퍼마리오, 소닉, 테트리스 같은 게임들과 결이 달랐다. 그곳엔 진짜배기 모험이 있었다.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즐거움, 숨겨진 장치를 찾을 때의 반가움 등. 기존 게임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어렸던 탓이었을까, 젤다의 유려한 게임 디자인은 도전이 아닌 장벽으로 다가왔다.

 

 젤다에 다시 도전하기까지 수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무렵 나는 몸도 마음도 한 층 커져 있었고, 젤다의 도전장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받아 든 성적표는 처참했다. <젤다의 전설, 1986>은 보통 어려운 게임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진행이 막혀,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별의별 시도를 했다. 공략을 보고 싶어도 주변엔 깬 사람이 없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다. 가장 믿을만한 공략법은 책이었는데, 물 건너 일본이나 미국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선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잡지 공략조차 찾지 못해 결국 포기, 초대작 <젤다의 전설>은 내게 좌절을 안기고 떠났다. 

 

연이은 패배감도 잠시, 이윽고 눈앞에 들어온 것은 게임보이 타이틀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이하 꿈꾸는 섬)이었다.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이하 트라이포스)는 전작의 어려운 난이도를 고려했는지 맵 곳곳에 길잡이를 배치함으로써 한결 쾌적한 경험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게임 자체가 꽤 어려웠다.) <꿈꾸는 섬>은 <트라이포스>를 기반으로 매운맛을 줄이고 친절함을 더한 작품이었다. "이 게임이라면 내가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꿈꾸는 섬>에 겁 없이 도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꿈꾸는 섬>은 공략 없이 클리어한 최초의 젤다 게임으로 남았다. 코호린트 섬의 아름다운 정경은 내 마음 한켠에 오래도록 자리 잡았다.

 

아름다운 추억은 한 때의 꿈이었을까, 코호린트 섬의 마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호기심이 동한 나는 오래 전 기억 저편에서 <꿈꾸는 섬>을 꺼내 들었다. 재방문한 코호린트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DX의 스크린샷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심한 풍랑에 휘청거리는 배 한 척.

 

링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마는데...

 

해변에 표류한 링크를 한 여인이 구해준다.

 

Link is Awake, 모험이 가득한 이 땅에 신비로움을 더하다.

<꿈꾸는 섬>은 '젤다' 없는 젤다 게임으로 기획된 외전 격 작품.

'젤다'가 나오는 유일한 파트가 이 장면이다. 

 

게임보이판(원본)의 대사

엣? 젤다??

아니야. 나는, 마린.

 

The Wise Owl, 부엉이의 테마

 

부엉이는 종종 나타나 플레이어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신비로운 섬에 얽힌 비밀을 차례로 공개한다. 

 

여전한 젤다식 퍼즐.

이외에도 새의 이미지는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던전마다 존재하는 부엉이 석상.

 

마린과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갈매기.

 

故) 하늘을 나는 닭.

 

새처럼 하늘을 나는 윈드 피시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새의 이미지는 엔딩 장면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마을 테마

마을 사람들의 대사는 자주 바뀌지 않고, 볼거리가 풍성한 마을도 아니다. 그래도 어쩐지 머무르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여기라면 정착해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닌텐도 키드라면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젤다에 요시가 웬 말?

단순한 닌텐도 콜라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엉뚱한 이미지야말로 <꿈꾸는 섬>의 의도처럼 보인다.

 

윈드 피시의 발라드

<꿈꾸는 섬>의 사운드트랙은 코호린트 섬에 평온함과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윈드 피시는 섬의 신, 흑막처럼 묘사되는 존재임에도 섬에 전해지는 윈드 피시의 발라드는 감미롭다. 어디 이뿐만인가.

 

어느 시점에선가 마린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다.

바닷가에 가면 마린을 볼 수 있는데,

 

젤다 시리즈에 부족했던 서사가 채워졌다.

바다를 바라보는 두 사람, 마린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링크와 마린의 대화

마린과 동행하게 된 링크.

길을 가로막은 바다코끼리를 노래로 깨우기 위함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데이트 아니냐며 놀리기 바쁘다.

 

꿈꾸는 섬 DX의 신규 기능 (촬영)

<꿈꾸는 섬 DX>은 원작에 몇 가지 요소를 추가한 버전이다. DX판의 사진 기능은 불편하다. 촬영 가능한 장면은 10개 남짓, 전용 주변기기(포켓 프린터)가 없으면 인쇄할 수 없다. 나중에 갤러리에서 사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진 기능만 떼어놓고 보면 이런 걸 왜 추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허접한 사진 기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다.

<꿈꾸는 섬>에서 데이트 이벤트가 발생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뀐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 기간 한정 이벤트, 링크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는 마린의 반응 등. 플레이어는 언제든지 이벤트를 끝낼 수 있지만, 이곳저곳 들쑤시는 취향의 게이머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린과의 데이트야말로 코호린트 섬에 애착을 갖게 되는 최중요 이벤트다. 바로 이 장면에 사진 촬영 기능(DX판)이 들어갔다. 언덕에서 뛰어내리면 마린이 떨어지는 이벤트가 발생하고, 섬의 최남단에 가면 바다를 보며 이야기하는 두 남녀가 기다린다. 허접한 기능일지라도 게임의 내러티브와 연결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굳이 해변에서 사랑의 말을 속삭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꿈꾸는 섬>의 무대는 아름답다. 푸켓의 바다처럼 첫눈에 탄성이 나오는 경치도 있지만, 은은히 스며드는 아름다움 만큼 값진 것은 없다. 역대 모든 젤다 게임을 포함해, 이만큼 감수성을 흔들어 놓는 타이틀도 없다. <꿈꾸는 섬>은 젤다 시리즈라면 하나쯤 있을 혁신적인 시스템이 없는 게임이다. 그래도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오.

 

핵심 스포일러 주의 

 

더보기

게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플레이어는 딜레마에 빠진다. 윈드 피시가 잠에서 깨면, 당신이 사랑한 코호린트의 모든 것들이 떠나간다. '젤다'다운 정교한 던전, 다채로운 풍경,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아이들, 진행이 막힐 때마다 힌트를 쥐어준 영감님, 마린, 감미로운 사운드트랙까지. 링크가 섬을 나가는 방법은 윈드 피시를 깨우는 것뿐이다.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는 나이트메어. 결말을 알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링크. 원치 않는 악당이 된 기분도 잠시, 어디선가 바다내음이 몰려온다. 무사히 코호린트 섬의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일까. 

 

1993년의 게임계에서 이만큼 선과 악이 불분명한 게임은 매우 드물다. 악당을 쳐부수고(드래곤 퀘스트, 악마성, 소닉), 닥치고 쳐부수는(모탈 컴뱃, 둠, 퍼니셔, 버추어 파이터) 직선적인 게임이 가득한 세계에서 이런 타이틀이 나왔다는 건 참으로 놀랍다. 더욱이 게임보이는 휴대성만 강조되었을 뿐, 가정용 콘솔의 하위호환이란 인식이 파다한 게임기였다. <꿈꾸는 섬>의 성공은 더 이상 게임보이 타이틀이 가정용 콘솔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정용 게임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진정한 타이틀이 나왔음을 의미했다. 만약 <꿈꾸는 섬>이 없었다면 <포켓몬스터>는 성공적으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안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코호린트 섬이니 마린이니 하는 얘기만 했지, 게임 플레이 얘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전작 <트라이포스>는 길잡이를 배치했음에도 불구, 퍼즐의 난이도는 어려웠고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모를 때가 많았다. 반면 <꿈꾸는 섬>은 부엉이만 따라가도 절반은 간다. 부엉이는 안내자이자 이야기꾼이며, 던전에선 조각상의 형상으로 나타나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부리를 얻으면 퍼즐 풀이가 몇 배로 쉬워진다.

 

힌트 주는 할아버지 우르리라

메인 스토리 진행은 부엉이, 던전 퍼즐 파트는 부엉이 조각상이 맡았다. 그렇다면 사이드 퀘스트는 누구에게 정보를 얻어야 할까? 바로 우르리라 할아버지다. 오랜만에 켜서 진행 상황을 잊어버려도 통화 한 방이면 안심이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전화로 힌트를 얻는 기능은 <트라이포스>에도 구현되었다. 그러나 힌트 장소가 드물고 맵이 원체 넓어, 힌트를 얻으러 가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 힌트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그런 점에서 <꿈꾸는 섬>의 힌트 타이밍은 매우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사방 어디를 가도 전화기가 없는 곳이 없으니.

 

 

 

 

평가 점수 ★★★★★

게임보이의 가능성을 100% 발휘한 작품. 당대 게임들이 한 번씩 거쳐간 열화 이식의 불명예는 젤다 시리즈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꿈꾸는 섬>은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았고, 본가 시리즈 이상으로 매력적인 세계를 만들었으며, (붙잡힌 히로인 외에 존재감이 없었던) 젤다를 단번에 잊어버리게 만든 새로운 히로인을 탄생시켰다.

 

<꿈꾸는 섬>에는 <트라이포스> 같은 컬러풀한 색채도 없고, 이면 세계를 활용한 화려한 퍼즐도 없다. 그러나 휴대용 게임기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칼로리를 덜어내면서도 음식 본연의 맛을 잃지 않았다. 섬세한 던전 디자인, 다양한 상호작용, 게임의 컨셉과 놀라우리만치 어울리는 사운드트랙까지. 기존 젤다 시리즈만큼 혁신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이만큼 짜임새가 탄탄한 젤다는 일찍이 없었다.

 

<꿈꾸는 섬>의 영향은 이후 본편 시리즈에도 이어져, <시간의 오카리나> <무쥬라의 가면> <바람의 택트>는 게임 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젤다를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로 끌어올렸다. 고작 외전이었을 터인 <꿈꾸는 섬>의 존재감이 이에 못지 않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믿는다.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섬, 코호린트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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