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을 넘어서 그려지는 13명의 소년 소녀의 군상극. 그들은 파멸의 운명에 맞서 '기병'이라 불리는 로봇에 탑승하여 인류의 존망이 걸린 마지막 싸움에 몸을 던진다. 스토리는 '13명의 주인공' 각자의 시점으로 전개. 13개의 스토리로 '파멸의 운명'의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스토리 기반 게임은 리뷰가 참 어렵다. 최신 게임일수록, 추천하고 싶은 게임일수록 스포일러를 피해야 한다. 물론 <투더문, 2011 > <디스트레인트, 2015>처럼 스토리 빼면 시체인 게임들도 있다. 스포일러를 자제하면서 이 게임의 좋은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다지 자신이 없다.
미리 못을 박고 시작하도록 하자. <13기병방위권>(이하 13기병)은 바닐라웨어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게임이며, 오랫동안 훌륭한 내러티브의 예시로 언급될만한 물건이다. 만약 당신이 <13기병>에 관심이 있다면, 어떠한 사전 정보도 접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걸 추천한다. 이 리뷰를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다.
스포일러는 싫은데 대체 뭐하는 게임인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에게 이 리뷰가 안내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PS4판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초장부터 몰입감이 장난 아니다.

승리 조건은 간단하다.
중앙에 있는 터미널이 파괴되기 전에 적을 섬멸하는 것.

전투는 리얼 타임으로 진행되며 자신의 차례가 오면 시간이 멈춘다. 마치 <파이널 판타지>의 ATB 시스템을 보는 것 같다. <13기병>은 전투 연출이 없다. 유닛 표현이 간략화되다 못해 체스말이나 바둑알만도 못하다. 유닛이 많으면 버벅거리기 일수. 로봇물 특유의 가슴 벅찬 뽕은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스킬을 세팅하고 스킬을 강화하는 파트.
밋밋한 전투를 그나마 게임답게 만들어준다.

튜토리얼이 끝나면 곧바로 회상편에 접어든다.

급박한 상황은 마치 꿈이었다는 듯, 평화로운 학창 시절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드벤처 파트는 과거의 일을 다룬다. 왜 기병을 타는 건지, 기병이란 뭔지, 침략자의 정체는 뭔지, 그 실마리가 회상편에 있다.

회상편의 게임 디자인은 클래식 어드벤처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키워드를 수집하고, 키워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적절한 곳에 키워드를 사용해 실마리를 찾는다.

이쯤에서 옛 어드벤처 게임들(ex 인디아나 존스: 아틀란티스의 운명)을 상기해보자. 맵에는 상호작용 가능한 온갖 것들이 널려있다. 플레이어는 주다, 가져가다, 사용하다, 말하다, 보다 등의 행동을 사용해, 퍼즐을 풀고 실마리를 찾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선택지를 하나하나 검증하자니 너무나도 선택지가 많다. 결국 단서 수집과 추론을 통해 선택지를 좁혀야 한다.
우측 상단의 도형은 읽지 않은 키워드, 사용할 수 있는 키워드의 수, 필요한 키워드의 수를 보여준다. 상호작용은 적고, 제시할 키워드는 명료하다. 이쯤되면 퍼즐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회상편은 <13기병>의 핵심 가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쉬운 게 당연하지 않을까?

스토리는 각 캐릭터 별로 주어진다. 스토리를 마치려면 그 캐릭터의 모든 루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게임이 알아서 다 떠먹여주는 게임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키워드를 얻는 방법 만큼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키워드를 쉽게 알 수 있는 맵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시도를 요구하는 맵도 있다.
<13기병>은 추리를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때때로 비주얼 노벨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루트를 탐색하는 과정, 각 사건들을 짜맞추는 과정은 미스터리 장르의 그것이다. 상호작용과는 거리가 먼 장르에서, 의외로 '인터랙티브'한 감정을 느꼈다.

플레이어는 붕괴편(전투), 회상편(어드벤처), 탐구편을 넘나들며 사건의 진상에 다가선다.
처음엔 단순 설정집인 줄 알았는데, 탐구편이야말로 게임의 핵심 파트다.

13인의 이야기는 얼핏 보기에 독립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사건의 진상을 찾는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들이 밝혀진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어느새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잘게 찢어진 스토리의 퍼즐을 짜맞추어 진상에 다다르는 것이야말로, <13기병>의 핵심 게임플레이 경험이라고 본다.

회상편은 13인의 이야기를 다룬 군상극이다. 군상극답게 화자의 시점도 바뀐다. 회상편은 이야기를 내가 원하는 순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줘, 플레이 경험을 다채롭게 만들고, 이야기 도중 떡밥을 해소함으로써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13기병>은 대단히 복잡한 타임라인을 갖췄다. 어떤 이야기를 먼저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대개 이렇게 만들면 플레이 경험이 극단적으로 갈리거나, 잦은 설정 방해로 이야기의 감상을 방해한다. 게다가 13인의 주인공이라니. 이야기가 산만해지진 않을까.
이야기 순서에 따른 문제는 잠금 해제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단, 초반에는 서사가 복잡해 캐릭터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뚜렷한데, 흥미없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강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는 쉬이 해결할 수 없는 작품의 구조적인 문제다.) 복잡한 타임라인은 탐구편으로, 설정 붕괴와 군상극의 난해함은 개발진의 역량으로 풀어냈다. 만약 <13기병>이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도저히 이런 시나리오를 구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대가 엉망이고, 주인공이 너무 많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소설은 철저히 작가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컨텐츠다. 소설에서 "챕터 A를 읽다가 B를 건너뛰고 C를 읽는다." 같은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화자가 많아지면 내용이 산만해져 읽기 어렵다. 시간대가 뒤죽박죽 섞여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소설의 군상극은 시점이 바뀌더라도 일관된 구심점이 필요하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조조, 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듯이)
구심점이 약한 작품이라면 대개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게임은 다르다. 게임은 군상극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다. 메인 스토리를 멈춰두고 사이드 퀘스트로 빠지는 일이야 얼마든지 봐온 일 아니던가. 게임은 일종의 옴니버스다. 적게는 한 개부터 수백 개의 이야기를 한 작품에 담는다.
<13기병>은 게임이기에 가능한 내러티브에 도전한다. 제각기 다른 시간대, 너무나 많은 주인공들, 구심점이 부족해 보이는 이야기... 아무리 게임이 군상극에 유리하다지만, 이만큼 어려운 소재에 도전한 게임은 없었다.

빛과 색채의 사용은 바닐라웨어가 만든 게임들 중 단연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칙칙하다 못해 황폐화된 도시에서조차 풍부한 색감이 느껴진다. <13기병>의 시각적 아름다움은 가히 마스터피스란 말이 아깝지 않다. 캐릭터의 색조는 칙칙하고 무덤덤하게 표현되어 종말론적 SF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이 작품 특유의 무미건조한 색깔은 자칫 인물과 배경의 경계를 흐려지게 만들어 캐릭터를 묻어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13기병>은 이 문제는 캐릭터 뒤편에서 넘어오는 역광으로 처리하고, 동시에 배경의 거리감을 살리는 효과를 누렸다. 1985년 시퀀스는 빛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바닐라웨어의 대답을 보여준다. 일본의 경제적 풍요, 그리운 그 때를 표현하기에 황금빛 노을만한 답변은 없다.

숄더 뷰는 AAA 게임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점 표현 방법이다. 이 시점은 공간을 넓게 쓰면서 현장감을 살리는 대신, 캐릭터의 앞모습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반면 바닐라웨어의 사이드뷰는 공간 표현 제약이 생기는 대신, 제작자가 의도한 연출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바닐라웨어는 <오딘 스피어, 2007>에서도 입증했듯이 연극적 표현에 이골이 난 회사다. 줄곧 갈고닦은 강점이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과 만나 날개를 달았다.




<13기병>의 성취는 시각적 표현과 내러티브의 치밀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게임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사운드트랙이며, Basiscape는 <13기병>에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각 음악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한 앨범에 수록되어 있을 법한 일관성이 느껴진다.
교정에서 쓰인 음악. 따스한 햇살과 목조 건물이 연상되면서도 밑바닥에는 전자음이 흐르고 있어, 80년대와 2000년대를 섞은 것 같은, 평온한 학창시절과 다가올 시련을 함께 그려낸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인상적이다.
<13기병>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
불협화음을 사용하여 불안정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인트로에도 등장한 괴수와의 결전에 쓰인 음악.
가파른 언덕을 뛰어 내려가듯 여전히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평가 점수 ★★★★★

<13기병>은 고전 SF물에 대한 오마쥬로 가득하다. 캐릭터와 고전 SF 명작의 구도를 일대일로 배치하면서, 미스리딩을 유도하여 플레이어를 착각하게 만든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면서, 복잡한 플롯들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한다.
명작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모난 곳 없이 두루두루 잘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꼭 모든 걸 잘해야 명작이 되는 건 아니다. 이 게임은 결점이 많다. 앞서 칭찬해 마지않은 시나리오조차 결함이 있다. 한 명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어도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를 안 보면 진행이 안 된다. 플레이어는 수많은 캐릭터의 이야기를 짧게 잘라 보게 되는데, 시나리오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면 흥미를 잃기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
분명 <13기병>의 전투 연출은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다. 굳이 붕괴편과 회상편, 전혀 다른 두 게임을 만든 이유가 뭘까. 퀄리티를 포기하면서까지 붕괴편(전투)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붕괴편이, 회상편에서 한껏 몰입한 감정을 사정없이 내던질 수 있는 장으로서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플레이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가 올 것이다. 몇 년 후 이 게임을 다시 집어들었을 때,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돌이켜 보며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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