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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그란디아 2 (2000)

by 눈다랑어 2022. 3. 10.

메가드라이브, 세가 새턴, 드림캐스트에 이르기까지, 세가의 RPG 수난시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새턴은 밀리언 셀러 타이틀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실적이 저조한 콘솔이었다. 출시 당시 그란디아의 일본 판매량은 50만 장이 채 안 되었을 거라는 견해가 많다. 이만하면 불티나게 팔린 셈이지만,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이었다면 단위가 달라졌을 것이다.

 

세가는 일찌감치 새턴의 패배를 인정하고 드림캐스트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데 어째 RPG 라인업은 신통치 않았다. 대작 타이틀은 커녕 중견 라인업도 턱없이 부족했다. 새턴보다 심각한 RPG 가뭄 속에, 드림캐스트 유저들은 대작 RPG 출시를 오매불망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란디아 2 같은 게임을 말이다. 

 

* 이 리뷰는 스위치판 <그란디아 HD 컬렉션>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란디아 2의 드림캐스트 버전

 

그란디아 HD 컬렉션

화질 개선 작업을 거친 만큼 HD 컬렉션 쪽의 선명도가 좋다.

 

클로즈 업하면 이렇게 된다. (그란디아 HD 컬렉션)

암만 2D~3D의 과도기에 출시된 게임이라지만 그래픽이 영 신통찮다. 스킬 이펙트는 전작보다 열화되어 싸구려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술 부족을 잘 감추는 것도 능력인데, 이 게임은 자신의 단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란디아>가 그저 그런 타이틀이었다면 변명이 통했겠지만, 세가 진영에서 <그란디아>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니 영 실망스럽다.

 

흥미로운 주인공

주인공은 입이 거칠고 지오하운드에 대한 차별에 익숙해져 있다.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지오하운드.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하면서도 온갖 더러운 일에 고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동안 JRPG의 단골 레퍼토리(용사, 착한 주인공)과는 상당히 다른 타입의 인물이다.

 

류도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비꼬는 재주가 일품이다.

류도처럼 때묻은 캐릭터에게 순수한 모험이 가능한 걸까?

장르가 JRPG인만큼 류도가 '세상을 구하는 모험'을 떠난다는 것은 명확했다. 그러나 류도의 모험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여정이다. 먹고 살기 급급한 사람이 낭만을 쫓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모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모험의 감동이 없어졌을 뿐.

전작의 주인공은 세계의 끝 너머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꿈꿨다. 류도는 받은 의뢰를 철저하게 완수하기 위해 엘레나를 센트하임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즉, <그란디아 2>의 모험은 '모험을 위한 모험'이 아니다.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boy meets girl의 유쾌한 모험 활극 대신 시리어스한 호위 임무로 바뀌었다.

<그란디아>의 캐치프레이즈는 '잊을 수 없는 모험이 될 것이다'였다. 이 인상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탓인지, 전작의 많은 팬들은 <그란디아 2>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주제가 바뀐 것은 "이게 정녕 <그란디아>의 후속작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22.03.04 - [게임 비평] - 그란디아 (1997)

 

그란디아 (1997)

때는 바야흐로 1997년, 플레이스테이션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무렵이었다. 스퀘어는 RPG의 황금기를 선도했고, 파트너를 소니로 갈아치우면서 비즈니스에서도 한 발짝 앞서가고 있었다. 스퀘어를

daisy1024.tistory.com

초반부터 바뀐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다.

 

없는 살림에 서로 돕고 사는 마을.

 

빛의 신 그라나스

사람들은 그라나스 교의 가르침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류도를 부른 사람은 그라나스 교의 신부.

신부가 지오하운드를 고용하다니?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류도의 무뢰배 같은 모습에 동행을 거절하는 엘레나.

카리우스 신부는 의식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엘레나를 설득한다.

 

내면이 따듯한 남자

퉁명스럽고 입이 험한 것은 겉모습뿐, 류도의 내면에는 선함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엔 입씨름을 벌이던 엘레나가 류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의식이 끝나길 기다리는 류도

꼭 이럴 때 뭔 일 난다.

 

*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주요 사건을 자세히 다루지 않습니다.

후속작 답지 않은 후속작

게임의 목적은 '바르마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란디아>는 '잊을 수 없는 모험'을 내세운 게임이다. 전작의 주요 플롯이 모험 ☞ 세계를 구하는 모험 ☞ 모험의 구조라면, <그란디아 2>는 세계를 구하는 모험만 있을뿐, 가슴을 뛰게 하는 '잊을 수 없는 모험'이 빠져 있다.

 

바르마의 조각

바르마는 빛의 신 그라나스의 숙적으로, 세계 곳곳에 육체를 조각내어 봉인되었다. 류도 일행은 바르마 부활의 조짐이 보이자 바르마의 조각을 찾으러 다니는 여행을 떠난다.

 

이는 <드래곤퀘스트, 1986>의 플롯을 떠올리게 한다. <드래곤 퀘스트>는 세 가지 상징물을 찾아 용왕의 성으로 가는 길을 뚫어야 한다. <드래곤 퀘스트>의 진행 방식은 비선형적이다. 드넓은 세계에서 수소문 끝에 상징물의 위치를 특정하고, 온갖 방해를 뚫고 미로를 정복한다. <드래곤 퀘스트>는 '상징물을 찾는 결과'가 아닌, '상징물을 찾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그란디아 2>는 전형적인 JRPG다. 스토리 분기 없음, 스토리 순서 변경 불가, 제한된 길 찾기, 탐색 파트의 가벼움 등등. 흔히 하는 말로 자유도가 부족한 게임이다. 바르마의 조각을 찾는 여행은 <드래곤 퀘스트>와 달리 '과정'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췄다. 정보를 얻고, 세계 곳곳을 누비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고, 던전을 정복하는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스토리 전달이 쉬운 대신, 플레이하는 맛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인상 깊은 에피소드 (미름 마을)

<갓 오브 워, 2018>로 예를 들어보자. <갓 오브 워>의 전투는 쉽지 않은 편이고, 퍼즐 파트가 많아 중간에 막힐 때가 많다. 게다가 탐색할 곳이 많아 삼천포로 빠지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토리에 몰입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난이도가 오를수록, 갈 수 있는 곳이 많을수록 스토리 전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갓오브워는 내러티브의 함정을 잘 극복한 편이다.)

 

<그란디아 2>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게끔 일직선 방식을 택했다. <그란디아 2>의 스토리가 좋다면 이 선택은 좋은 것이 된다. 던전 탐색 파트가 부실해도 전투가 즐거우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전투는 던전과 상호보완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란디아 2>의 스토리는 탄탄하다. 비록 부실한 연출로 개연성이 증발한 상황도 있었고, <그란디아> 답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것도 아쉬웠다. 그러나 눈에 띄는 하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란디아 2> 스토리의 백미는 미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자세한 얘기는 직접 플레이할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도록 하자.

 

아쉬운 주인공

아쉬운 점은 류도의 정체성이다. 류도가 점차 마음을 여는 과정은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바뀐다고 해도, 주변에서 지오하운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오하운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대단히 나쁘다. 그럼에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따스하게 대하는 걸 보면 위화감이 든다.

 

지오하운드란 장치는 초반 이야기를 끌어나갈 때만 유용했을 뿐, 중반부터 무의미한 설정으로 전락했다. 모처럼 잘 만든 설정을 못 써먹은 것 같아 아쉽다.

 

쉬워진 길 찾기, 줄어든 볼륨

전작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해 <그란디아 2>의 길 찾기는 수월한 편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명백한 데다, 길 찾기 분량이 제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막히는 구간이 줄어들어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어차피 던전 파트를 성의있게 꾸미지 못할 거라면, 쾌적한 노선이야말로 바람직한 게 아닐까.

 

그러나 쾌적함으로 포장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란디아 2>는 메인스토리 외에 즐길 거리가 전무하다. 숨겨진 장소는 커녕 일체의 사이드 퀘스트조차 없다. 탐험이 간략한 건 좋은데, 아예 탐험의 구성요소를 빼버리면 쓰나.

 

전투 시스템

다음으로 시스템을 체크해보자.

커서가 COM 위치에 도달하면 커맨드를 입력할 수 있다.

 

ACT 위치에 도달하면 커맨드가 발동된다.

 

그란디아 전투의 꽃, 턴 밀어내기

범위마법 일색이었던 전작과 달리, <그란디아 2>는 연출 시간이 짧은 공격(콤보, 크리티컬, 필살기)의 비중이 늘었다. 따라서 템포가 빨라졌고, 캔슬하는 맛이 살아나면서 세련된 전투가 가능해졌다.

 

다만 일부 스킬이 얼척없을 정도로 강해, 보스가 보스답지 못한 게 아쉬웠다. 따라서 보스전은 <그란디아>, 잡몹전은 <그란디아 2>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잡몹 비중이 많은만큼 전투의 전반적인 재미는 좋아졌지만, 보스전을 재미있게 즐기려면 제약을 두고 플레이하는 것을 추천한다. 

 

신규 시스템 '스킬'

마나에그가 달라졌다. 기존 마나에그가 소모품이었다면, 지금은 엄연한 장비 아이템으로 탈바꿈했다. 세팅의 다양성이 훨씬 늘어난 것이다. 예를 들어 '대쉬' 스킬을 장비하면 전투 시 이동속도가 빨라진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전투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기본적인 속도, 스킬 '대시'를 넣으면 더 빨라진다

공격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느릿느릿 가다가 얻어맞기 쉽다.

적에게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 적의 행동 시간, 위치 등을 예상해 움직이는 재미가 있음.

 

엘레나, 류도, 밀레니아

밀레니아의 파격적인 디자인과 섹시, 백치미 컨셉은 큰 호평을 받았다. <드래곤 퀘스트 5, 1992>처럼 더블 히로인 구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소재는 좋은데 어째 만들다 만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세가의 재촉이 있었던 걸까, 혹은 게임아츠의 저력이 여기까지였던 걸까. 

 

이미지 출처 : https://www.gunghoonline.com/game/grandia-2-hd-remaster

 

 

 

 

평가 점수 ★★★★

시리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 게임. 전투 시스템을 제외하면 이 게임이 왜 <그란디아>의 후속작인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좋은 소재를 잘 활용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이만큼 전투 시스템을 훌륭하게 다듬은 게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독특한 선악의 구도, 흥미로운 설정, 충격적인 분위기까지. 전작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이 차고 넘친다. <그란디아 2>는 드림캐스트 시대를 대표하는 RPG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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