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국내에서 인기있는 JRPG를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 페르소나 시리즈일 것이다. (혹은 파이널 판타지거나) 전 세계를 휩쓴 JRPG 광풍이 저물고 21세기의 서막이 올랐다. 온라인 환경이 발달하면서 JRPG의 입지는 주류 장르로 보기 힘들 정도로 격하되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페르소나 3>가 비집고 들어왔다.
다양한 히로인과 연애를 즐기고, 주변인물과 친해질수록 나 자신이 강해진다는 설정은 수많은 덕후들의 심금을 울렸다. 여기에 감각적인 디자인과 사운드트랙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페르소나의 틀이 형성되었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프랜차이즈의 위상이 올라갔고, 일부 마니아만 알던 게임이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게 됐다. <페르소나 3>가 등장한지 벌써 15년이 넘게 흘렀다. 긴 세월은 페르소나를 JRPG의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로 바꿔 놓았다.
<페르소나>가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온갖 미디어믹스와 파생작들이 뒤를 이었다. 본편의 완전판 상술과 더불어 우려먹기가 심하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고 파생작들의 완성도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퀄리티는 준수했지만, 계급장 떼고 보면 아쉬운 면이 많았다. 그동안 가장 훌륭한 페르소나 파생작은 <페르소나 Q, 2014>라고 생각해왔고, 본편의 팬 서비스 게임으로서 손색없는 결과물이었다.
<P5S>는 아틀러스와 오메가 포스 공동 제작, 오메가 포스는 코에이테크모의 무쌍게임 전담 팀이다. 세상에 무쌍? 무쌍은 언제나 집 앞 흔한 국밥집 같은 맛을 보여주지만, 그동안 무쌍류의 천편일률적인 메카닉에 질려있어 걱정이 앞섰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걸, <P5S>는 굉장히 이질적이고 독창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이걸 무쌍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액션 RPG로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주의 :
이 게임은 <페르소나 5>의 후반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평가 점수 항목만 봐주세요. (핵심 스포일러 X)
그동안 페르소나 파생작들은 본편 이후 시점을 다뤘음에도 외전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정식 후속작과 외전작은 받아들이는 느낌부터 완전히 다르다. 후속작이라면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외전작이라면 "굳이 안 해도 상관없겠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틀러스도 이 점을 뼈저리게 느꼈는지 <P5S>는 타이틀 화면부터 <페르소나 5>(이하 P5)의 정식 후속작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확실히 타이틀 화면부터 전작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주인공 일행이 시련을 끝내고 맘 편히 캠핑이라도 가는가 보다. 확실히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구성이다.
다짜고짜 공격받는 주인공.
이게 대체 어쩐 일이지?
□ 버튼 연타에 처참하게 썰려나가는 적들.
<P5S>는 무쌍류 게임과 어떤 점이 다를까?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도입부를 살펴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괴도단이 돌아왔다. 벌써부터 설레이네.
<페르소나 5>가 끝나고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여름방학을 맞아 만나기로 한 괴도단 일행.
최근 일어난 괴사건들이 개심 행위와 연관된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경찰.
본편에서 개심 사건에 연루되었던 '마음의 괴도단'에게 수사망이 뻗치고 있었다.
전작을 재미있게 해서 그런지, 동료들을 만날 생각에 들뜨게 된다.
고작 1년 산 곳일 뿐인데 고향처럼 느껴진다.
어서 르블랑으로.
뭐지?
짜잔~!
본편과 달라진 모델링이 외주작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
페르소나 특유의 컷씬 연출.
대화 패턴만 달라질 뿐 결과는 동일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즐겁다. 이제 괴도단을 괴롭히는 시련들은 사라졌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캠핑도 하고 바베큐를 구워먹는다. 다 좋은데, 전작 팬의 입장으로서 상당히 불쾌한 점이 있었다. 키 배치가 전작과 달랐던 것이다. 본편을 한 후 바로 이어서 플레이하기엔 이질감이 상당하다. 아무래도 장르가 달라 그런 것 같은데, <갓 오브 워, 2018>처럼 클래식 키를 지원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전작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또 갇혔어?
이제 이런 취급 그만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시부야에서는 마침 인기 탤런트 히이라기 앨리스의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런 맘에 보러가기로 한 류지 일행.
앨리스에게 안내 어플 EMMA의 초대 카드를 받았다.
본편과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사건들이 꽤 많다.
이미지 출처 : https://jp.mercari.com/item/m73196465285
연예인과 카톡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
키워드를 입력하자 알아서 EMMA가 안내해준다.
그런데,
화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아니 이건?
페르소나 능력은 이세계에서만 구현되는 것.
그렇다면 이곳은..
사람들의 소원을 빼앗는 마녀가 나타났다.
속성 공격으로 약점을 찔러 상대를 다운시킨다.
분명 페르소나 시리즈다운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게임에 '페르소나5 무쌍' 같은 이름이 붙지 않은 이유는 뭘까. 첫 번째로 본편에서 동떨어진 외전작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더 간단하다. 이 게임이 무쌍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쌍처럼 적 액션에 대응하면서 플레이할 수도 있지만, <P5S>는 적 공격이 빠르고 전조가 별로 없어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상대하기 쉬운 적들은 □ □ □ △ 같은 무쌍 스타일의 커맨드를 주로 사용하고, 어려운 적일수록 페르소나 능력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페르소나 능력은 시전시간이 짧고 시전거리가 길며, 대미지를 확정적으로 줄 수 있는 데다 약점공격으로 가드를 깰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작을 즐기지 않은 사람들에겐 잘 이해가 안 되는 개념들이 나온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맥락으로 알 수 있고, 간략하게 설명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상황, 감정선을 곧장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몰입감을 해치기 쉽다. <P5S>는 전작과 상관없이 자체적인 완결성을 갖춘 게임이지만, 이왕이면 <P5> 또는 <P5R>을 즐긴 후 플레이하는 걸 권장하고 싶다.
조사 도중 함정에 빠진 주인공 일행.
앨리스가 악인이라니, 이거 원 세상에.
쓸모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쓰레기장에 버려지게 된다.
그곳에서 엉뚱한 인물과 만나게 되는데...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소피아.
괴도단 일행이 곤란에 처한 것을 보고 돕겠다고 한다.
수상쩍은 구석이 너무 많다.
적과 마주치면 전투화면 창으로 넘어갔던 본편과 달리,
<P5S>는 바로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장르는 다르지만 확실히 본편의 후속작이라고 할 만하다.
한가득 구현된 본편의 시스템.
우여곡절 끝에 탈출 포인트를 찾았다.
어째서인지 스마트폰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 소피아.
액션 파트의 완성도에 비해 조사 파트는 어설픈 편이다.
퍼즐, 추론 같은 요소가 없어, 동네방네 구경다니는 것 외에는 컨텐츠가 전무한 수준.
조사를 진행하면 동료가 도움을 준다.
인기녀는 시기질투도 한 몸에 받는 법.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고자 괴도단을 찾아온 젠키치.
괴도단을 압박하며 거래를 제안한다.
앨리스 건을 해결하고 싶은 나머지 젠키치에게 협력을 요청하게 된 괴도단.
그 대신 전국의 개심 사건 해결에 협력하기로 한다.
사건을 쫓아 전국의 관광지를 유람하는 괴도단.
요리, 관광 파트의 아쉬운 점은 깊이가 얕다는 데 있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처럼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제작하는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음식을 처음 만들었을 때 멤버들이 한 마디씩 하는 게 고작.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정성 들여 만들었으면 했다.
관광 파트 또한 마찬가지다. 곳곳에 지역 음식이 널려있지만, 구입한다 한들 음식을 먹을 때의 컷씬이나 만화적 연출이 전무하다. 볼거리가 제한되어 있고 시점을 바꿀 수도 없다. 시점 변경이 가능했다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그랬을 텐데. 하다못해 텍스트가 맛깔나게 쓰여진 것도 아니다.
괴도단이 전국일주를 하며 관광을 다니는 컨셉은 좋지만, 관광 카탈로그에서 1페이지 짜리 요약본을 본 느낌이다. 관광하는 즐거움보다는 '관광하는 기분만 내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이러쿵 저러쿵 따졌지만 사실 팬 게임으로서는 이만하면 된 것 아닐까. 본편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해방되어 친한 친구처럼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퀄리티가 준수하다보니 괜한 욕심이 생겨서 그랬나 보다.
<P5S>는 캐릭터들의 비중 분배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또한 <P5>처럼 서사의 희생양이 되어 급발진하는 캐릭터도 없다. 덕분에 캐릭터들의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인 부분이 잘 살아날 수 있었다.
전작의 감각적인 UI를 <P5S>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커서의 표시 방식, 움직이는 모델링 등이 흥미롭게 표현되었다.
그동안 메뉴는 따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메뉴를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P5S>는 코옵(커뮤니티) 시스템 대신 밴드가 추가되었다.
전투를 거듭하면 밴드 경험치가 쌓이고, 밴드 레벨을 올려 특수 기능들을 해금하는 방식.
본편과는 별개로 즐길 수 있는 이야기.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 자신도 강해지는 것, 그것이 코옵이다. <P5S>의 BAND는 가볍게 스펙 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코옵의 또다른 장점인 스토리 파트가 증발하면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거야말로 페르소나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 아니었을까.
앞서 아쉬운 점을 몇 가지 이야기하긴 했지만, 의외로 이렇다 할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 게임이다.
특출난 완성도는 아닐지라도 짜임새는 탄탄하고 차별적이며,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즐거움을 양껏 채웠다. 분량은 약 40시간 정도로 적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거슬리는 점이 없었던 건 아니기에 이 기회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다.
* 몇 가지 단점들
ⓐ 마나 회복
P5S은 마나가 상당히 부족한 게임이다. 마나 물약도 부족하다. '제일'을 나갔다 들어오면 마나가 회복되지만, PS4판은 로딩 시간이 상당히 길어 템포가 뚝뚝 끊긴다. 상쾌함이 매력인 무쌍 스타일의 게임에서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울 스틸'을 배우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소울 스틸은 마나를 상시 100%로 유지할 수 있는 데다, 극초반부터 페르소나에게 계승시킬 수 있어, 밸런스가 잡혀있는 디자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차라리 마나 소모를 전체적으로 줄이고 소울 스틸을 약화시키거나, 체크 포인트 중간에 마나를 소량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으면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 달리기
던전 안에선 가능하지만 마을은 불가능하다. 마을 맵이 작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관광하는 기분을 내라고 이렇게 만들었다면 볼거리가 더 풍성해야 했던 것 아닐까. 시점 변경을 제공한다든지, 관광 기분을 낼 수 있도록 컷씬이나 이벤트를 추가한다든지.
ⓒ 불편한 아이템 사용
전투 도중 아이템 사용이 잦은 편인데도 아이템 사용이 불편하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아군이 픽픽 쓰러지는 일이 잦은데, 부활약 탭 찾자고 몇 번씩이나 버튼을 누르고 있자니 게임 템포가 뚝뚝 끊긴다. 즐겨찾기 기능이 있었다면 훨씬 상쾌한 액션이 가능했을 것이다.
ⓓ 로딩 시간
마나를 회복하려고 '제일'을 나갔다 오는 문제가 얽혀 역 시너지를 낸다. PS4 일반판으로 즐기기에도 거슬리는데 스위치판으로 플레이했으면 복장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PS5 하위호환이나 PC판으로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 페르소나 + 액션의 불안정한 배분
잡졸부터 보스까지 슈퍼아머가 없는 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슈퍼아머의 남발로 콤보 넣는 재미가 줄었고, 적 패턴이 빨라 보고 피하기에 버겁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연속 전투에 다대다 전투. 피로감이 안 쌓일 수가 없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자원이 넉넉해져, 페르소나 + 총공격 일변도로 가는 게 빠르고 안정적이다. 이 방법은 적 패턴을 몰라도 깰 수 있어, 액션게임으로서의 본질이 희석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 현상은 난이도가 높을수록 두드러졌다. 적 패턴을 커버로 피하고, 적 공격에 맞춰 저스트 회피를 하고 반격한다. 컨트롤 요소는 충분히 많고 재미있는데, 정작 불안정한 레벨디자인이 많은 걸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 안티 앨리어싱
캐릭터, 사물의 모델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구분선이 흐릿하여 그래픽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픽 옵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렌더링 배율, 안티 앨리어싱 기능이 있는 PC판을 추천한다.
ⓖ 페르소나 5의 후속작
이 게임은 P5의 후속작이지 P5R의 후속작이 아니다. 분명 잘 만든 후속작인 건 맞지만 '요시자와 카스미'가 없는 괴도단은 P5R을 즐긴 이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다. 물론 스포일러 없이 '요시자와 카스미'를 출연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P5S는 P5의 일러스트를 사용했는데, P5R을 즐긴 직후 플레이하면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P5S는 제작사가 공인한 정사(正史)이지만 정사로 보기에는 약간 아쉬운 타이틀이다. 이래서야 외전작의 그늘을 완전히 벗었다고 할 수 있을까.
평가 점수 ★★★
페르소나 시리즈의 수많은 파생작 중 가장 대중성을 많이 고려한 타이틀이다. 본편의 아쉬운 스토리와 달리 군더더기 없는 전개를 보여주고, 신규 캐릭터의 괴도단 합류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P5S>는 더 이상 외전작 취급이 아니라, 정규 후속작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타이틀이다.
그러나< P5R>을 포용하지 못한 점, 본편에 종속된 '후속작으로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명색이 액션게임인데 액션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 같아 아쉽다. 스토리 게임을 좋아하고< P5> <P5R>를 재미있게 즐겼다면 추천할만한 게임, 그 외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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