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드의 역사는 길다. 처음에는 생물을 차용한 로봇 완구 제품으로 출발, 여기에 공화국과 제국의 대립이라는 세계관이 더해지면서 한 편의 전쟁물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기체 하나의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은 메카물(ex 건담)과는 달리, 조이드에서 묘사하는 전쟁은 공병대, 기계화 보병사단, 제공권, 전략폭격, 보급선 차단 등 현실 전쟁을 연상케 하는 단어들이 많다.
2차 세계대전, 중동전쟁 같은 현대전을 전차, 비행기, 잠수함이 아닌 공룡, 동물, 곤충 모양의 기체로 즐긴다?
나같은 괴짜는 설정만 봐도 하트 뿅뿅이지만, 조이드는 시장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프랜차이즈 확대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래도 주력 상품이 완구라면 설정의 묘를 잘 살리기 어렵다. 조이드 애니메이션은 적당히 성공했을 뿐 마크로스, 건담 시리즈 같은 파급력은 없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총아 게임 분야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조이드 게임은 판매량을 떠나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조이드 ip를 사용한 제대로 된 게임'은 정말로 없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스트를 쭉 훑어봤다. 그 중 흥미로운 게임이 있었다. 나무위키에 적혀있는 조이드 게임 리스트에 없고, 국내는 커녕 국외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게임이었다. 기대감이 없으니 실망도 적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게임을 실행했다.
이미지 출처 : https://zoids.fandom.com/wiki/List_of_Zoids_Video_Games#Overview
<조이드 배틀카드게임 서방대륙전기>는 헤릭 공화국, 제네바스 제국 시나리오를 선택하여 진행된다.
출격시킬 수 있는 조이드는 다음과 같다.
1) 출격시킨 조이드의 합계 중량 제한을 넘지 않을 것 (103/999)
2) 자신이 소유한 조이드일 것
* 조이드의 사이즈
울트라 사우루스 = LL 사이즈
데스자우러, 고쥬라스 = L 사이즈
와일드 울프, 세이버 타이거, 실드 라이거, 스톰 소더 = M 사이즈
데스 스팅거, 프테라스, 고도스, 모루가 = S 사이즈
사이즈가 클수록 중량 제한이 빡세지기 때문에 가성비의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
스토리 모드를 진행하면 맵을 보여주지만, 지도 상의 맵과 스테이지의 실제 지형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형을 이용한 전략성도 부실하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전차부대를 사용하거나, 보병을 전차 위에 태워 빠른 기동전을 한다거나, 항구를 점령해서 보급선을 끊는 등의 플레이는 일절 없다. 그럼 대체 무슨 게임인가?
<조이드 배틀카드게임 서방대륙전기>라는 이름 답게 덱을 짜서 카드배틀을 하는 게임이다.
조이드들은 덱에 넣을 수 없지만, 기체 선택 창에서 따로 고를 수 있다.
* 게임 룰 설명
덱은 40장 이상 필수
장비 카드
- 단일 유닛을 강화하는 장비 카드.
한 유닛에 여러 장비를 장비할 수 있지만, 유닛마다 장비할 수 있는 파츠의 수가 다르다.
파일럿 카드
- 단일 유닛에 딱 1명밖에 탑승시킬 수 없는 카드.
장비 카드는 파괴하기 쉽지만 파일럿 카드는 파괴하기 힘들다.
파일럿 = 고급 장비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이벤트 카드
- 어떤 타이밍이든 사용할 수 있다. 타 TCG의 스펠(마법) 카드 같은 역할.
특이한 카드들은 대부분 이벤트 카드에 몰려있다.
~ 게임의 흐름
(1) 턴 시작 시 2장을 덱 위에서 뽑는다.
(2) 장비를 붙이는 단계
- 장비를 장착하거나 파일럿을 탑승시킬 수 있음. 이벤트 카드 사용 가능
(3) 이동 및 전투 단계
- 유닛을 이동, 공격할 수 있고 이벤트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유닛의 행동을 끝내면 상대 턴으로 넘어감.
<조이드 배틀카드게임 서방대륙전기>는 조이드 기반 오프라인 카드게임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조이드 TCG를 그대로 옮겨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선입견은 첫 전투를 치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동 시스템은 마치 SRPG 장르 같다. 체스, 장기 등의 턴제 이동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카드는 유닛을 강화하고 보조하는 역할로 쓰인다. SRPG와 카드게임, 관련성이 적은 두 장르를 어떻게 결합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
커맨드 울프 LC는 특수능력 '롱 라이플'을 가지고 있다.
'롱 라이플'을 사용하면 명중률이 보정되고 사거리가 매우 길어진다. 이 게임은 명중률을 올리는 게 매우 어려워, 왜 롱 라이플 횟수제한을 두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기라고 욕 먹어도 할 말 없는 수준.
커맨드 울프LC의 롱 라이플로 적을 요리하러 간다.
이 게임은 통상 공격을 하면 반격 판정을 굴리며, 반격 성공률은 1/3이다. 그런데 상대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공격한다면? 반격이 불가능하다. 이 정도면 레벨 디자인이 의미가 없게 만드는 수준이다. 초반에 얻을 수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
바리케이트 카드를 사용해 바리케이트를 만든다. 전술적으로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활용도가 낮다. 대부분의 맵에는 좁은 협곡, 다리 같은 게 없다. 교통로가 넓어 바리케이트를 쌓아도 우회하면 그만이다.
바리케이트의 성능도 아쉽다. 기체 뒤를 보호하려고 뒤쪽에 바리케이트를 쌓아봤자 원거리 공격에 뚫린다. 만약 원거리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면 모를까, 이래서는 지형을 이용하는 재미가 없다.
전용 유닛이 아니면 도하 도중 반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몰려온다면?
이 게임은 브리핑 화면에서 정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가 전장인지 알려줘야 덱과 기체를 알맞게 준비할 것 아닌가. 스테이지에 진입해 맵의 특성을 살펴본 뒤, 미션을 재시작해서 덱과 유닛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수 속성 기체가 부족하다보니 물 속에서 큰 패널티를 안고 싸워야 한다.
헤릭 공화국 시나리오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맵이 적어 체감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브리핑 제대로 해주고, 지형지물을 살릴 수 있는 맵들이 많았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파일럿은 전용기에 태울 때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처럼 공격 연출이 나오지만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는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그래픽이 아쉽다. 저예산으로 만든 게 아닐까.
아군 유닛 1개를 폭파시키고 반경 1칸에 300 데미지를, 반경 2칸에 200 데미지를 준다.
이 게임의 공격은 명중 판정을 거치기 때문에 확정 대미지를 주는 카드가 귀중하다. 또한 이벤트 카드의 발동 타이밍이 매우 자유롭기 때문에, 이벤트 카드 한 번으로 상대 동선을 낭비하게 만들 수 있어 카드를 쓰는 맛이 쏠쏠하다.
모든 공격은 명중 판정을 거쳐야 하는데,
공격 명중률은 66.64%, 반격 명중률은 33.32% 정도의 확률이다. 아군의 명중률을 올리고 싶어도 그런 카드가 거의 없다. 가뜩이나 템포가 느린데 허구한 날 빗나가니 답답하다. 명중이 실패해도 100~200 정도의 대미지가 들어가거나, 기본 명중률이 조금 더 높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
<조이드 배틀카드게임 서방대륙전기>는 전략 시뮬레이션과 카드게임이라는 두 가지 장르를 혼합한 특이한 게임이다. 그러나 두 가지 장르를 섞어서 시너지를 냈는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전략 시뮬레이션, 카드게임, 조이드 모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왔지만, 각 장르의 팬들에게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이상한 게임으로 느껴지기 쉽다.
전략 시뮬레이션의 '전략성'을 높이기 위해 카드배틀과 섞는다는 시도는 훌륭하다. 그러나 결과물은 어떨까? 이 게임을 하면서 느낀 아쉬움은 크게 세 가지다.
(1) 느린 템포
(2) 대전 없음
(3) 카드 외에 전략, 전술 부재
(지형, 유닛 간의 개성, 상성 같은 게 잘 구현되어 있지 않음)
템포가 느려지는 가장 큰 원인은 명중률이다. 공격 성공률이 66%밖에 안 된다. <포켓몬스터>의 하이드로펌프(명중률 80%)도 못 믿을 판에 어떻게 66%를 믿으란 말인가. 서로 맞추질 못하니 당연히 게임템포가 느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게임 전개는 왜 이렇게 느린가, 반격 유무를 물어보는 데도 천천히 창이 뜨고, 자동으로 스킵되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편의성이 중요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정작 편의성이 꽝이다.
루즈한 게임 템포, 구린 사운드트랙.
심지어 전투 음악은 똑같은 음악이 계속 나온다.
반복해서 이것만 나오는데 버틸 재간이 있나.
전투의 양상은 괜찮은 편이다. 비록 각 유닛별 상성이나 지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유닛을 조작하면서 카드로 변수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다. 게임 내 상황으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
(1) 적이 접근해서 공격하려고 할 때 자폭 카드를 사용한다.
"어차피 맞으면 죽을 유닛, 공격 받기 전에 자폭 대미지나 주자"
▶ 적은 공격기회를 날리고 대미지를 입는다.
(이동이 끝난 상태이므로 적절한 타겟이 없으면 턴이 종료된다.)
(2) 강을 방어선 삼아 적 유닛이 대기하고 있다.
▶ 물을 도하할 수 있는 카드를 사용하거나, 지형을 뛰어넘는 이벤트 카드를 사용해 공격한다.
(3) 적이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한 직후, 이벤트 카드를 사용해 적 유닛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 사거리가 닿지 않으니 공격은 불발.
(4) 미리 상대 패를 확인해 방해계 카드를 제거하고 전투를 시작한다.
▶ 변수가 줄어들어 계산대로 플레이하기 쉬워진다.
(5) 아군 유닛의 공격을 끝낸 직후, 유닛의 위치를 옮기는 카드를 사용해 상대방의 대응 거리에서 벗어난다.
▶ 유닛을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음.
----------------------------------
카드배틀의 도입은 전술 파트를 흥미롭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CPU가 다양한 전술을 쓰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대전하는 기능도 없다.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를 냈는데 전술을 펼칠 놀이터가 없는 것이다.
<조이드 배틀카드게임 서방대륙전기>는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한 게임이지만, 완성도는 썩 좋지 않다. 만약 충분한 피드백을 거친 후, 온라인 대전을 지원하는 시대에 발매했다면 게임의 평가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평가점수 ★★★
좀처럼 맞지 않는 공격, 느려터진 게임 플레이 때문에 템포가 많이 아쉽다.
모처럼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었지만 전략은 부재 중, 전술은 카드배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삼국지 영걸전> <대전략> 시리즈처럼 멀티 시나리오를 탑재하던지, 협소한 다리, 고지전, 상륙, 매복, 함정 등 맵을 활용하는 요소가 많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전략 게임으로서는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만약 이 게임이 보드게임이었다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느린 템포는 직접 플레이하면 대부분의 과정을 생략할 수 있으니 문제 없고, 온라인 대전은 지원할 수 없어도 오프라인 대전을 즐길 수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일회성으로 소모한 것 같아 아쉽다.
'게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비치 인벡터 (2017) (0) | 2021.07.15 |
---|---|
사요나라 와일드 하트 (2019) (0) | 2021.07.15 |
다이나 브라더스 (1992) (0) | 2021.07.15 |
유희왕 듀얼링크스 (2016) (0) | 2021.07.14 |
유희왕 익스퍼트 2006 (2006) (0) | 2021.07.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