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의 제철이 왔다. 예로부터 게임프리크는 리메이크와 관련이 깊다.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세대 단절을 파이어레드·리프그린으로 정면 돌파하고, 하트골드·소울실버를 앞세워 2세대를 완성시켰으며, 6세대의 혁신을 또 다른 혁신의 상징 3세대와 엮어 오메가루비·알파사파이어를 탄생시켰다. 원작의 감동을 한 층 깊은 레이어로 탄생시킨 이 회사는, 한때는 명실상부 리메이크의 명가처럼 여겨졌다.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리메이크 요구가 제기되는 세대가 있다. 1~3세대는 꾸준히 리메이크를 거쳤고, 4세대는 프리퀄 <포켓몬 레전즈 아르세우스>(이하 아르세우스)로 리메이크를 대체한다. (굳건이는 잊자...) 남은 건 5~9세대인데 스위치 세대는 아직 이르다.
최근 5세대 리메이크를 요구하는 팬들을 많이 본다. 가장 오래된 타이틀이자, 독특한 매력을 가진 세대임에는 분명하다. 나 역시도 바란다. 그러나 제작자 입장에서 보는 5세대는 과제가 많다. <B2W2>의 어마어마한 콘텐츠 분량, <BW> <B2W2>를 전부 다뤄야 의미 있는 구성, 프리퀄/시퀄 소재의 부족 등등 어려움이 가득하다. <하트골드·소울실버>처럼 리메이크를 하기엔 돈과 시간이 부족하고, <아르세우스>처럼 과거(미래)를 다루자니 떡밥이 없다. 5세대는 언젠가 리메이크가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포켓몬스터 X·Y>(이하 XY)는 다루기 쉬운 소재다. 원작은 텅텅 비었고, 떡밥은 놀라우리만치 장대하다. <DP>가 <플라티나>로 부실한 설정을 덧붙였듯이 <XY>도 그렇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끝내 <Z> 버전은 나오지 않았고, 6세대 혁신의 과실은 <ORAS>가 차지한다. 칼로스에는 작품을 완성시킬 모종강이 필요했다.
2025.11.11 - [게임 리뷰] - 포켓몬스터 X·Y (2013)
포켓몬스터 X·Y (2013)
포켓몬 6세대가 발매된 지 어느덧 12년이 흘렀다. 메가진화가 첫 등장한 이 타이틀은, 포켓몬 게임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차지한다. 메가진화 시스템, 풀 3D로의 전환, 학습장치 개편, 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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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QgTpjpErlI?si=Y55TcFJh1DV8pEgj
24년 2월 27일 포켓몬 프레젠트가 열렸다. 이날은 <포켓몬 카드 게임 포켓>을 포함해 12분가량의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영상의 말미에는 낯익은 형상들이 줄을 이었다. 유럽풍 도시, 화염레오, 트리미앙, 플라엣테, 여기에 에펠 탑을 연상시키는 프리즘 타워까지. 영상의 의도는 명백했다. 10년째 미완으로 남은 칼로스가, 이제야 껍질을 깨고 진정한 6세대 경험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https://youtu.be/8YSTbg9MGT8?si=kM_GPKr9ScOXhB7I
이것으로 <포켓몬 레전즈>의 시리즈화가 분명해졌다. 기존 시리즈는 전통을, 레전즈는 혁신을 담당한다. 이듬해 포켓몬 프레젠트에서 막연한 추측은 현실로 드러났다. 도시 내에 존재하는 와일드 존, 실시간으로 기술을 피하고 공격하는 모습. <레전즈 아르세우스>에서 그토록 바라던 미래 포켓몬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2025년 가을 발매, 기대감이 늘자 걱정도 커졌다. 발매까지 1년이 채 안 남은 상황에서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미르시티는 비슷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건물의 디테일은 지나치게 부실해, 입체감을 잃고 평면 상의 그림처럼 보였다. 건물 속 방들은 아무런 개성 없이 모든 공간이 동일하게 표현됐다. 단조로운 텍스쳐, 고정된 광원... 유령도시도 사람 살던 흔적은 남아있던데 어째서 이 모양인가.
프랑스 파리는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꼽힌다. 파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브랜드다. 6세대 칼로스 지방은 프랑스를 모티브로 삼아, 파리까지 구현하는 야심 찬 시도를 감행한다.




미르시티에 들어서자 제작진의 노력을 실감했다. 이곳은 특별하다. 플레이어는 가까운 시점으로 미르시티의 거대함을 체감한다. 야심과 혁신을 동시에 갖춘 역대 최고의 도시가 될 터였다. 미르시티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다. 형편없는 마감에서 알 수 있듯, 게임프리크는 거대한 야심을 뒷받침할 능력이 없었다.
미르시티는 파리를 제대로 구현했는가? 내 대답은 NO다. 파리 특유의 화려함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가. 일단 인터페이스(UI), 그래픽-디자인 파트를 연이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3DS의 듀얼 스크린에서 상단 스크린은 게임 화면(메인 디스플레이)을, 하단 스크린은 인터페이스를 나타낸다. <XY>의 UI는 포켓몬을 육성하고, 싸우고, 교감하는 '포켓몬 퍼스트'를 설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으로 포켓몬에 친근함이 더해졌다.










3D 포켓몬은 좋은 인상을 남겼다. 내게는 특히 배틀 장면이 그랬다. 3D 모델의 입체감은 말할 것도 없고, 포켓몬을 확대하거나, 한 바퀴 돌아 무대 전체를 보여주는 등 배틀 연출 전반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트레이너가 참여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스탠딩 모션으로 퉁치는 연출이라니.
<XY>는 수많은 변화를 꾀했다. 포켓몬에 집중한 UI, UX, 3D 그래픽, 신 시스템(메가진화)까지,전부 포켓몬을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러나 미르시티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낭만적이고 세련된 도시의 이미지는 게임프리크의 어설픈 표현력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에는 마치 서사와 세계, 포켓몬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위치 2로 플레이하였으며, 약간의 스포일러와 DLC 파트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6세대는 봉합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포켓몬 레전즈 Z-A>(이하 ZA)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미르시티의 가능성을 증명하여, 칼로스의 매력을 사방에 퍼뜨릴 필요가 있었다. <ZA>는 원작의 기억을 딛고 과거를 추억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주인공이 여행자이고, 미르역에 의도적으로 내렸다는 건 알겠다. 이 작품은 끝끝내 주인공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찍어둔 스크린샷을 넘기다 <루비·사파이어>의 첫 장면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낯선 땅에 도착한 주인공에게 나는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사로 시작하는 장면은 <XY> 역시 마찬가지다.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동기다. <포켓몬>이 동기에 소홀한 게 하루이틀 문제는 아니나, 주인공이 여행자 신분이라는 점, 미르에 장기 체류한다는 점, 전작 <아르세우스>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그냥 묻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이상했다. 엔딩이 가까워지면서 게임은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이 고생을 하면서 네가 미르에 있을 이유는 뭐지? 뭐? 모른다고?"
2024.08.05 - [게임 리뷰] -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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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는 이번에도 자취를 감췄다. 이곳은 파리가 아니다. 파리 특유의 정서, 낭만과 권태, 사색과 논쟁, 자유, 오만, 자부심이 공존하는 도시는 이곳에 없었다. 가상의 세계를 다룬 <포켓몬>에서 왜 리얼리티를 찾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리얼리티는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는 도구다. 허구의 캐릭터에 이입해 같은 감정을 느끼고, 흐름에 몸을 맡기며, 긴장을 유지한 채 극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리얼리티가 없다면 극은 '남 일'이 되고 무게감을 잃어버린다. 미르시티가 도시 재개발을 내세운 것도 19세기 중반, 파리 재개발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정작 도시 재개발은 구호로 끝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만...
파리의 리얼리티를 구현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뭘까. 나는 괴리감이라고 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파리의 이미지'와 '현실의 파리' 사이의 괴리 말이다. 각종 매체에서 본 아름다운 거리의 풍경이 뇌내에 새겨져 파리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강박을 심는다. 그곳에는 이민자, 인종, 계급, 주거 문제, 보기 불편한 것들을 몰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팽배하다.
파리는 아름답다. 거대한 박물관이 도시 전체로 뻗어나간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파리의 브랜드 이미지에 매달린 결과, 그들이 지불하는 아름다움의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세계의 부유한 나그네들은 오늘도 이곳을 찾는다. 파리는 그들에게 테마파크이자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다.
게임프리크가 파리의 이미지에만 몰두했다는 뜻은 아니다. <XY>는 핸섬 스토리를 통해 미르시티 속 거리의 부랑아들을 조명했고, <ZA>는 좁은 골목길 속, 보르쥐와 냐스퍼, 깨봉이의 모습을 통해 파리의 이면을 드러낸다. 플레어단의 모순은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차별에 맞닿아 있다. 미르시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스타일리시'는, 플레이어의 숨은 스탯으로 활용되어 시설 이용에 불이익(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구현됐다.


이 모든 것은 아름다움으로 질식할 것 같은, 우리가 생각하는 파리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았을 때야말로 극대화된다. 애초에 프랑스의 '아름다움'이란 뭘까. 문자 그대로의 아름다움일까, 권력일까, 허무주의일까. 프랑스의 정서를 함양함에 있어 갖은 어려움이 따르는 이유다.




게임프리크는 고증을 이해하고 창작물에 녹여낼 줄 아는 회사다. 한편으로 불완전한 퀄리티를 매번 거듭하는 회사이기도 하다. 스위치 세대에 접어들어 이러한 문제는 더더욱 심화되어, 매번 "그래픽이 이게 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게임프리크는 <어새신 크리드: 유니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아름다움이 정체성인 도시에서, 미르시티는 크나큰 페널티를 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ZA>의 내부는 어떨까. 실은 한계가 있다. 파리의 다층적 매력을 전연령이 알 수 있는 형태로 말하는 건 쉽지 않은 문제다. <ZA>는 말한다. "우리는 포켓몬과 함께 산다." "미르시티는 살아 있다." "아름다움에는 비용이 있다." 이건 <BW> 이후 가장 적극적인 문제 의식이다. 그런데 왜 메시지는 허울 뿐인가. <BW>와 비교하면 명백하다. 질문이 캐릭터의 말로 나오지 않고, 플롯의 갈등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그때 플레이어는 느낀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은데... 정작 아무도 책임지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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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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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가 공간을 사용하는 법

<ZA>의 맵 디자인 철학은 전작 <아르세우스>와 완벽하게 상충된다. <아르세우스>가 오픈월드를 목표로 수평적 탐험에 초점을 둔다면, <ZA>는 미르시티라는 한정된 무대에서 수직과 밀도를 논한다. 건물 옥상을 뛰어넘는 경험,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경험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따라서 <아르세우스>는 광활함을, <ZA>는 밀집된 경험을 제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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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의 메인 스토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배틀 존과 폭주 메가진화. 배틀 존은 제한 시간 내에 트레이너를 해치워 점수를 쌓는 것이 핵심이다. 마을 어딘가에 위치한 폭주 메가진화 포켓몬을 쓰러뜨리면 메가스톤을 획득할 수 있다.



<ZA>는 파쿠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확실히 마을을 탐색하는 구조와 잘 어울리고, 역사적 당위성도 분명하다. 프랑스는 파쿠르의 탄생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으며, 그 중심에는 파리가 있다.
마을 곳곳에 위치한 기술머신, 컬러풀한 나사는 여정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건물 옥상에서 보랏빛 빛줄기가 올라오던 날이면 눈에 불을 켜고 건너갈 길을 둘러보곤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파쿠르의 질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이 게임은 점프가 없다. 턱을 한 손으로 짚고 뛰어넘는 일 또한 없으며, 난간을 잡고 기어오를 수도 없다. 액션이 달리기, 구르기, 짧은 활강 정도인 상황에서, 파쿠르의 본질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맵 화면에서 보이는 노란색 화살표 아이콘은 홀로베이터, 건물 끝에서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워프 존이다. 한 번 탐색한 홀로베이터는 맵에 영구적으로 표시된다. 파쿠르 게임에서 워프 존이라니 좀 이상하지만, 게이머 편의를 위한 처사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건물은 홀로베이터 없이, 다른 건물에서 건너가거나 비계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ZA>는 맵에 비계 정보를 일절 표시하지 않음으로써 길을 헤매게 만든다. <ZA>의 길찾기가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원인은 길이 '이야기'를 안내하지 않는 점에 있다. 공간적 좌절이 맥락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미르시티는 관찰과 판단을 요구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강요한다.
마을 주변을 맴돌면서 파쿠르 생각이 났다. 탐험 액션 파트가 제 기능을 했다면 이 문제는 덜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난간에 매달리든 점프를 하든 악착같이 기어올라갔을 터다. 가벼운 게임성을 추구했다면 맵에 비계 위치를 표시해야 했고, 밀도와 경험이 중요했다면 공간 활용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했다. 아케이드성을 살리는 파쿠르 액션 보강도 좋은 선택이었으리라. 어찌 됐든 이 작품은 가벼움과 밀도, 조작감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이를 문제 의식과 연계시키면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실은 "파리를 닮지 않아서"는 부차적인 문제고, 미르시티라는 공간이 플레이를 설득하지 못해서 실패한 것에 가깝다고.
* 캐릭터 게임의 진면목

<ZA>가 꼭 대중을 설득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포켓몬>은 자체 팬덤 만으로도 국가를 세울 지경에 이르렀다. 시장성은 차고 넘친다. 이제 남은 희망은 캐릭터에 달렸다. 팬이 만족한다는데 굳이 비판할 이유가 있을까. 캐릭터 게임이란 그런 것이다. <ZA>는 좋은 캐릭터 게임인가? 그렇다고 본다. 30여 년간 쌓아온 노하우는 이번 작에서도 빛을 발했다.





포켓몬이 경외와 공포를 한 몸에 받던 시기가 있었다. 몬스터볼조차 낯선 발명품으로 여겨지던 시기를 지나, 무대는 백 년 후의 칼로스. 인간은 포켓몬과 공존하며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꿈꾼다.






사이드 퀘스트의 향연은 본작에서도 이어졌다. 이들 퀘스트는 포켓몬이 미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퀘스트는 '팬텀' 사이드 스토리. 메인 스토리에서 슬쩍 모습을 비춘 팬텀이, 실은 뒷얘기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호기심이 생겼다. 팬텀을 찾아 오만 곳을 돌아다니는 주인공 일행. 후일담을 보여주는 방식은 포켓몬식 스토리텔링의 극치를 보여준다.


동행은 계속된다. 공존을 얘기하는 작품답게 탐험에서도, 배틀에서도 항상 포켓몬이 함께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쫄래쫄래 따라오는 포켓몬의 모습. 턴제에 액션을 한 움큼 집어넣은 듯한 과도기의 액션이다. <ZA>는 확정적으로 쳐맞는 기술(10만 볼트)도 있고, 지진처럼 넓은 범위를 공격하는 기술도 있고, 추적 성능이 강한 일부 돌진기도 존재한다. 기술 설명과 실제 성능이 판이하게 다른 상황에서, 나는 추적 성능이 강한 기술 위주로 재미를 봤다. "액션 게임인데 실은 못 피하는 거 아니야?"하는 의문을 가친 채...


배틀의 깊이가 얕다고, 이래서는 실시간 배틀로 만든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내 안일한 생각은 폭주메가진화를 상대하며 바뀌기 시작했고, 랭크 배틀을 거치면서 가능성을 보았다. <ZA>의 실시간 배틀은 관찰과 교체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시스템이다. 자신보다 강한, 최소한 동급인 상대를 상대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대전은 <포켓몬>의 오랜 고민 중 하나였다. 밸런스는 앳저녁에 물 건너갔고 사실상 마니아 한줌단을 위한 콘텐츠로 전락했다. 대전은 즐기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1%가 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ZA>는 대전의 허들을 낮추는데 집중한다. 포켓몬 센터에서 도핑약을 팔고, 돈은 메인 퀘스트에서 넉넉하게 채워준다. (ZA 로열을 그렇게 뺑뺑이 돌리는데 돈이 없을 리가 없다.) 1:1 대전의 부담스러움은 4인 배틀로 완화시켰다. 문제가 있다면 고랭크. 서로 눈치 보느라 빙빙 돌기 일쑤다. 먼저 때리는 놈이 손해 보게 만들면 어떡하나. 그래도 뭐, 첫 작품이니 이해는 한다만.
* 인간 르네상스의 개막


<포켓몬>에서 인간 전성시대가 열린 지 어연 15년, <ZA>는 조연 전성시대의 정점을 보여준다. <XY>의 등장인물이 많아서? 전혀 그렇지 않다. 전작 등장인물은 명백히 소수이고, 극을 이끌어가는 얼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디자인이 좋다"로 끝나지 않고, 사이드 스토리에서, 메인 스토리에서 플레이어와 부대끼며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





조연들의 이미지는 메가진화와 함께 선명해진다. 멋진 음악, 저스티스 포즈에서 이어지는 정권 지르기, 대여르가 진화의 빛으로 건담이 되는 장면까지 연결되면, <영웅본색>의 풍림각 씬처럼 오랫동안 회자될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녹청파는 독특한 조직이다. 작중에서 녹청단은 가이(타니)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빚 상환을 요구하며 MZ단을 압박한다. MZ단은 꼼짝없이 카라스바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회봉사를 수행한다. 이후의 카라스바가 '입 험한 착한 놈' 정도로 그려지는 걸 감안하면 괴리감이 드는 설정이다. (어쩌면 서사를 위해 캐릭터가 희생된 걸지도 모르겠다.) 카라스바의 압도적인 인기는 <페르소나 5>의 아케치 고로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설정의 실패는 가이(타니) 또한 만만치 않다. 돈을 빌려? 그럴 수 있다. MZ단에게 민폐를 끼친다? 납득할 수 있다. 사채를 쓰긴 했는데 나름 이해는 간다, 그건 사기였으니까. 근데 이 녀석 미안함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포켓몬 승부가 곧 정의이자 권리로 연결되는 세계에서, 승부에 지고도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 서사를 위해 캐릭터가 희생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의외로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많지 않다. <XY>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것 같은데, 사실 약간은 도움이 된다. 꼭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설정 정도는 알아두면 좋다. (플레어단, 플라드리, AZ)






<XY>를 알면 플레어단 누보를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이들은 플레어단의 교육생 출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플레어단을 버리지 않았다. 플레어단을 보는 사회적 낙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플레어단이 추구한 순수한 이념과 긍지, 선인과 악인, 두 얼굴의 플라드리를 바라보는 복잡함, 오갈 데 없는 원망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사람들이다.


과거는 훌륭히 봉합됐다. 더 살펴볼 사람이 없을까? 실은 한 명 더 있다. <XY>의 진 주인공으로 치켜세워지는 모 국제경찰과, 실질적 딸내미 역할을 수행한 소녀의 얘기다. 어디 어디, 어떻게 변했나 한 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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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등 너머로 포커스를 잡는다. 그녀를 볼 때마다 시선이 엉덩이에 쏠린다. 지금껏 <포켓몬>에서 이 정도의 노골적인 섹스어필을 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나는 처음 본다. 심지어 대상이 <XY> 감동 스토리의 주역 마티에르라니.
https://pokemoncard.co.kr/cards/detail/BS2018002072

핸섬의 의지는 코트로, 크세로시키의 의지는 바디슈트로 계승됐다. 놀라운 점은 롱 코트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숏 코트로 편집했다는 데에 있다. 서사와 본능, 미학을 동시에 갖춘 디자인에 감탄이 나온다. 이렇게 힘을 팍 줬으니 비중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비중이 적다.
마티에르의 도발적인 등장 씬은 단순히 팬 서비스였을지도 모른다. 비중이 적어도 이상할 건 없는데, 캐릭터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미르시티의 탐정'으로서의 역할은 사이드 퀘스트와 연계되지 못했다. 메인 퀘스트에서도 중반 이후로 단역 수준에 그친다. 카라스바가 맡은 역할(DLC)의 상당수는 마티에르와 겹친다. 조사원(마티에르), 연구자(모미지)를 냅두고 조폭 두목이 비중을 차지할 이유가 무엇인가. 탐정인데 탐정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악당인데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결과적으로 카라스바는 조폭 미화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마티에르는 엉덩이 외에 별다른 존재감을 표출하지 못했다. 이게 과연 맞는 방향성인가.





캐릭터 게임의 종착지는 전설의 포켓몬이 장식한다. <XY>의 전설 잔혹사는 <ZA>에서도 이어졌다. 미르시티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오질 않나(실은 편의적 조치라고 봐야 한다.) 노루가 마실 나오듯, 비무장지대의 독수리처럼 활강하는 제르네아스&이벨타르. 전설의 포켓몬의 위엄을 보여주는 연출로는 조금 부족해 보였다.




물론 3세대 전설이 구도 상 보여주기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땅과 바다, 불(마그마)와 물로 대비되는 이미지는, 생명(삶)과 파괴(죽음)로 대비되는 6세대의 콘셉트보다 훨씬 직관적이다. 이해한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소외감은 숨기기 어렵다. 좀 더 신경 써달라는 말이 이다지도 어려운 요구였던가.
* 파밍의 늪


이로치(색이 다른 포켓몬) 포획은 <포켓몬> 최고의 엔드게임 콘텐츠로 평가받는다. 야생에서의 출현율은 1/8192(2~5세대), 잉어킹 일만 마리 중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의 확률이다. <포켓몬>은 편의성을 꾸준히 향상시켰고 거기에는 이로치 등장률도 포함됐다. 이제 이로치는 꿈에 그리던 것이 아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했다.
포켓몬 덕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게임이란 스토리 보고 치우는 것 아니었던가. <ZA>는 '일반인'들에게 고인물 콘텐츠를 권한다. 대전, 볼맞춤, 이로치, 우두머리. 어지간한 애정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게임프리크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편의성 또한 문제가 생겼다. 왜 볼은 대량구매가 되고 열매, 민트는 하나씩 구입해야 하나. 인플레이션이 문제라면 가격을 올리는 걸로 충분했다. DLC 파트는 반복의 집약판이다. 우선 하나씩 노가다해서 산 아이템을 갈아 넣어 도넛을 만든다. 효과가 맘에 안 들면 백업 데이터를 불러온다.

<ZA>에서 반복되는 콘텐츠에 대한 불만은, 실은 <포켓몬>이 추구해 온 엔드게임 콘텐츠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ZA 로열을 반복하여 자금을 확보, 도핑약을 투여해 실전 포켓몬을 만든다. 공중날기를 50번, 100번씩 시도해 원하는 포켓몬을 찾고, 세이브 로드를 반복해 원하는 볼로 포획한다. <ZA>는 파밍 난이도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엔드게임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도 사실이다.(이로치 확정 도넛) 그러나 엔드게임의 본질이 노가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만든 걸까.
클래식 세대(크리스탈 버전~B2W2)는 배틀시설로 대표되는, 실력과 전략을 동시에 요구하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변화의 조짐은 6세대였다. 배틀시설을 축소하고, 수집, 알까기, 레이드에 초점을 맞췄다. 현재의 <포켓몬>은 엔드게임을 수집, 반복 플레이로 해석한다.
그동안 개발 비용은 꾸준히 올랐고, <포켓몬>은 주기적으로 결과물을 내야하는 상태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섬세한 세팅이 필요한 실력(전략) 콘텐츠보다 반복 플레이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그 편이 만들기 쉽고, 수집 장르의 특성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캐주얼 유저의 증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엔드게임을 만들자니 실력 콘텐츠는 부담스럽다. <포켓몬>의 오랜 팬으로서 아쉬운 일이나, 이것밖에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을 것이다.
평가점수 ★★★
<ZA>는 실패작이 아니다. 성공작으로 보기에도 미묘하다. 이 작품은 현재의 게임프리크가 할 수 있는 경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도시 재개발, 공존과 관리를 말하지만, 구조를 끝내 바꾸지는 못했다. 미르시티는 기능적 무대로 남았고, 플레이는 여전히 수집, 배틀의 반복. 도시는 '사는 곳'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던전. 즉, 도시에 대한 질문은 있지만, 도시에서 '다르게 살아보게' 만들지는 않았다. <ZA>는 BW가 던졌던 질문을 더 세련된 외형으로 다시 던졌을 뿐, 밀어붙이지는 못한 작품이다.
<XY>의 상처는 언뜻 치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적, 구조적 결함은 내 가슴 속 아린 곳을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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