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과 '게임성'은 양립할 수 없을까. 어느샌가 게임프리크는 나태한 회사의 전형으로 뽑힌다. 조금씩 개선은 있었다. 4세대가 그랬고, 5세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이너 체인지 버전조차 작업량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저 게임의 뼈대를 바꾸는데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예컨대 *랜덤 인카운터는 이미 90년대 말 쇠락의 조짐을 보였다. 시스템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동일 행동을 수백 번 반복시키는 게임에서, 화면 전환과 긴 연출이 '마찰'로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이 그 무렵부터였다는 의미다.
오랜 전통이었던 비전머신은 2016년에 이르러서야 폐기됐다. <포켓몬>식 턴제(Turn-based) 전투는 큰 변화 없이 꾸준한 유지 보수를 거쳤다. 포켓몬은 풀숲에서 번쩍이는 화면과 함께 랜덤 조우하는 형태로 구현됐으며, 예외 없이 인카운터 - 암전 - 전투 화면 - 전투 단계를 밟았다.

전투는 내게 있어 가장 큰 불만거리였다. 포획 단계에서는 번거로운 화면 전환 없이, 포켓몬을 발견하면 즉시 볼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포켓몬이 풀숲에서 뛰노는, 심볼 인카운터를 채택했다는 전제 하의 얘기다.) "앞으로 전투 화면을 수 백 번 이상 볼 텐데 템포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6세대 <ORAS> "too much water" 리뷰는 포켓몬 계의 대표적인 밈이다. 이 말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는데, 내게는 잦은 인카운터에 대한 피로감처럼 들렸다. 아무리 스프레이가 있다한들 항상 쓰고 싶진 않으니까.
https://youtu.be/ERAhGia6azE?si=fEMFNnpX5YB0JTLz

기도가 통했던 모양이다. <포켓몬 레전즈 아르세우스>(이하 PLA)는 별도의 화면 전환 없이 필드의 포켓몬을 포획하는 최초의 본가 <포켓몬> 게임이다. 포획 단계에 볼 조준이 추가되거나, 등을 돌려 냅다 도망칠 수 있는 등 액션 게임을 참고한 티가 역력하다. 포켓몬의 행동을 관찰하고, 습성에 맞는 포획법을 궁리한다. 느리고 반복적인 포획 파트는 심리스와 결탁해 빠르고 긴장감 넘치는 순간으로 재탄생한다.
오래된 프랜차이즈가 변화를 꾀한다는 것, 꼭 게임이 아니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생판 운동 안 하던 사람이 시작하는 운동과 같은, 독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영역이다. <레전드> 시리즈는 게임프리크가 간만에 독한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외전이 아니어서 더 놀랍다.) 첫 주자가 갖는 의미는 잠깐 뒤로 치워두자. <PLA>는 좋은 게임일까?
* 신화가 깃든 땅, 신오의 과거를 엿보다.





<PLA>는 시작부터 신화적이다. "태초에 아르세우스가 있었다." "모든 포켓몬을 만나라, 그리하면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니..." 같은 이야기들. 눈을 뜨자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이제 막 개발된 몬스터볼, 갓 만들어진 마을. 오래된 복장. 아무래도 나는 먼 옛날의 세계로 타임슬립한 모양이다. 여기 사람들은 포켓몬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나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주인공은 라벤 박사에 의지해, 의식주를 제공받는 대가로 협력을 약속한다.

이곳은 히스이 지방으로 불린다. 히스이에는 은하단, 금강단, 진주단, 은행상회 등 다양한 집단이 존재하는데, 특히 금강단과 진주단의 갈등은 예사롭지 않다. 주인공은 은하단 조사단원이 되어 히스이의 미개척지를 탐사하고, 마을의 작은 문제부터 시작해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는 게임 속 얘기고, 실제로는 '포켓몬 포획'과 '주인 포켓몬 제압' 두 가지만 잘하면 충분하다.




* 액션과 심리스


<포켓몬> 게임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8개의 체육관을 정복하고, 챔피언과 싸워 새 챔프로 거듭나는 것. 둘째, 모든 포켓몬을 잡아 포켓몬 도감을 완성하는 것. <포켓몬스터 썬·문>은 처음으로 게임의 목표를 바꾼 작품이다. 체육관 전투를 폐지하고 섬 순례를 도입, 캡틴의 미션을 클리어하고 주인 포켓몬과 대결하는 형태로 구현됐다.
<썬·문>의 유산은 오랫동안 단절되었다가 신오(4세대)의 프리퀄 <PLA>에서 되살아났다. 예컨대 포켓라이드는 심리스 방식에 적합하고, 주인 포켓몬은 액션 게임의 보스로 최적의 소재다. 리전폼과 프리퀄이 잘 어울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프리퀄은 같은 종, 다른 시대, 다른 포켓몬을 보여주기 좋다.)






액션의 깊이는 크게 뒤떨어진다. 몬스터의 공격 패턴은 단조롭고 투박하며, 플레이어는 회피 외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다. 보스전은 예외 없이 공격 회피, 진정환 투척, 턴제 배틀 강행 순으로 진행되며, 지형 및 아이템을 이용한 전투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회피를 못하면 게임이 어려워진다. 이 게임 의외로 난이도가 맵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액션 게임을 제작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PLA>에서 액션이란, '몸의 위험'을 부여해 포켓몬 세계를 재해석하게 만든다. 그동안 <포켓몬>은 UI가 이끄는 설계, 일명 '여행의 시대'를 구축하는 데 진심이었고, 마찰과 판단을 요구하던 세계는 과거의 저편으로 밀려나 버렸다.
<PLA>는 '모험의 시대'를 다시 불러와 현대 <포켓몬>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말한다. <PLA>야말로 <포켓몬>의 원형을 계승한 작품이라고. 그래서 이 작품은 불편하다. 과거의 <포켓몬>에는 길을 잃고, 우회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많았다. <PLA>는 여기에 위험을 얹었다. 플레이어에게 친절하지 않은 설계. 현대 <포켓몬>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히스이의 각박한 환경은 <PLA>의 핵심 플레이 루프와 만나 "<포켓몬>이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도감은 사실상의 사이드 퀘스트가 되어, 포켓몬을 잡고 자잘한 미션을 수행하는 발사대로 쓰였다. 히스이 지방을 개척하고, 주인 포켓몬을 제압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궁극적으로는 '히스이 도감 완성'을 위한 한 걸음이다. 인트로에서 아르세우스가 얘기했던 '모든 포켓몬을 만나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플레이어는 포켓몬을 타고 히스이의 대지를 누빈다. 저 멀리 묘한 포켓몬이 보인다. 나는 발 빠르게 포켓몬에서 내려 수풀에, 바위 뒤에 몸을 숨긴다. 들키지 않게 다가가며 신중히 아이템을 고른다.
<PLA>의 포획, 스텔스 액션의 완성도는 아쉬운 점이 가득하다. 페더 볼을 제외하면 특색 있는 볼이 없고, 불편한 UX는 끊임없이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주로 전환 파트가 문제였다.) 포획 일변도의 콘텐츠 또한 아쉬움을 남겼다. 과거의 <포켓몬>은 할 거리로 넘쳐나는 게임이었으니까. 시대가, 개발 환경이 변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만.


그러나 포획과 심리스의 결합은 그 자체로 효과적이다. 앞으로의 <포켓몬>은 '인카운터 - 암전 - 전투 화면 - 턴제 전투 '의 불필요한 프로세스 없이, 이동, 공격, 포획이 물 흐르듯이 연결된 형태였으면 한다. 죽은 시간을 줄이고 재미의 밀도를 높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PLA>의 가장 큰 공로가 아니겠는가.

<PLA>의 가능성은 24년 1분기 히트작 <팰월드>에서 현실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팰월드>는 <PLA> <아크: 서바이벌 이볼브드>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게임이다.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 나쁘게 말하면 대놓고 베낀 수준에 가깝다...) <팰월드>는 몬스터의 필드 액션을 수집, 포획 파트에 활용하여 진보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한다. <포켓몬>의 차기작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으면 한다.
* 투박한 그릇에 세계를 담다.

게임프리크의 기술력은 그다지 나아질 기미가 없다. 개발 기간이 촉박하다는 건 알겠다. 고작 1개월 간격으로 <PLA> <스칼렛·바이올렛>을 출시했으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게임프리크는 왜 심리스 방식을 선택했을까. "업계 트렌드가 그렇다"고 설명하는 건 너무 순진한 것 같고, 오픈월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본다.
오픈월드는 단순히 지도를 넓히는 기술적 선택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세계를 ‘체험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하는 구조다. 지형의 형태, 변화하는 환경, 오브젝트, 멀리 보이는 랜드마크까지 세계 구축의 중요한 축이 된다.
물론 저사양 그래픽으로도 뛰어난 오픈월드는 존재한다. 다만 <포켓몬>은 '지형을 탐험하는 재미'보다 '생명체를 찾고 접근하는 재미'에 초점을 맞췄다. 이때 그래픽은 미관이 아닌 포켓몬을 읽는 인터페이스가 되고, 그 인터페이스가 흐트러지면 체험이 바로 깨진다. <PLA>에서도 곧잘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지형 생성이 눈 앞에서 벌어졌을 때, 이 세계를 "살고 있다"는 감각은 다소 희생될 수밖에 없다.

포켓몬 모델링은 봐줄만하다. <PLA>는 평면적인 지형, 하천, 초목까지 빠지는 곳 없이 플레이어를 괴롭힌다. 빠와 까를 미치게 만드는 존재. 이래서 <포켓몬>이 슈퍼스타인가, 누가 보면 소규모 인디 개발사인줄 알겠다.
그런데 이 게임, 막상 해보니 그래픽은 부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형편없는데, 묘하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PLA>에서 축복마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곳에서는 퀘스트를 수주할 수 있고, 흑요 들판, 순백 동토 등으로 연결되는 허브 역할이자, 사람과 포켓몬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4세대와 허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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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마을은 은하단이 집단 이주하여 만든 정착촌이다. 그런데 꽤나 추운 모양이다. 곳곳에는 개화기 특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4세대와의 연관성을 고려했을 때, <PLA>의 무대 역시 홋카이도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홋카이도 개척사를 다룬 작품으로 보인다. 민가의 이로리, 신카베 공법, 벽에 붙은 목판 인쇄물(에도카와라판) 등의 고증이 이를 뒷받침한다.
축복마을에는 근미래의 요소가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붉은 벽돌 청사, 1888~)를 모티브로 한 은하단 건물, 사진관의 컬러 사진(1945~) 등이 특히 인상적이다. 시대 고증이 엄격하다고 볼 순 없으나, 근대화의 상징으로 선택한 게 아닌가 추정해 본다.




그런데 이 동네 참으로 특이하다. 마을 내에 유럽식 벤치가 놓여있고, 아르 데코 풍의 건물이 존재하는 등 동서양이 혼합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 원래 그런 것이었다. 신오지방의 정중앙, 천관산 정상에 창기둥이란 곳이 있다.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보는 듯했던 이 건물 터는, <PLA>에서 온전한 형태로 손님을 맞이한다. 홋카이도와 파르테논 신전이라니 참 이상도 하지.
전근대 홋카이도를 다룬 작품에서, 시기 상으로 맞지 않는 유럽 문물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부분은 진짜 추측의 영역이다. 유럽식 벤치나 아르 데코 스타일은 역사적 배경을 몰라도 위화감을 느낄만한 것들이다. 전근대 일본과 아이누의 문화 속에 유럽 문화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보통은 "판타지니 그런가 보다"라며 넘어가기 쉽다. 실은 <PLA>의 후반부 전개, 신오신전(창기둥)과의 연결고리를 위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PLA>의 독특한 설정은 캐릭터의 표현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왼쪽의 <소드·실드>는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연출을 지향한다. 굵은 윤곽선은 이를 위한 선택이다. 반면 <PLA>의 윤곽선은 없다시피 하여, 자연과 포켓몬이 융화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윤곽선의 소멸은 때때로 단점이 된다. <스칼렛·바이올렛>은 이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오픈월드를 표방했음에도 자연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고, 수풀이 지나치게 크거나, 작은 포켓몬을 못 보고 지나쳐 교통사고가 나는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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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포켓몬은 약속이 단순했다. 풀숲에 들어가면 캐터피가 있고, 동굴 끝에는 뮤츠가 숨어있다. “여기엔 뭔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이 세계를 기억하게 만든다. 도시 이름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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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의 풍경은 전통 미술과 심리스를 절충한 결과물이다. 화면 전체에 두드러지는 통일성은 빛의 부드러운 사용, 은은한 색조에 기반하며, 윤곽선을 지워 히스이의 생명들이 히스이와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표현했다. 멀리 보이는 지형은 옅고 흐린 인상을 주며, 캐릭터는 평면적으로 디자인됐다. (수묵화, 우키요에의 영향)
음악은 날개를 더해준다. 일본풍의 음악, 민속음악의 감성, 악기 선정까지 세심한 고려가 발휘되었다. 여기에 서양식 진행을 입혀, 광활한 대지를 탐험하는 경험을 질적으로 높였다. 필드에 사용된 음악은 그야말로 '배경음악'이며, 플레이어가 탐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은은히 밀어주는 느낌이 든다. 포획 파트는 음악의 효과를 보다 뚜렷한 형태로 체감시킨다. 야생 포켓몬에 슬며시 다가갈 때의 음악과, 노출되어 기습에 걸렸을 때의 전환이 흥미롭다.
평가점수 ★★★★
이제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을 때다. <레전즈 아르세우스>는 <포켓몬>의 새 챕터를 열어젖히고, 전에 없이 신선한 시도로 관객들을 현혹한다. 롱테이크를 장착한 <포켓몬>은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의외로 탄탄한 고증이 포켓몬 세계에 어울리는 형태로 재조립됐다. 세상에, 야생 포켓몬에게 습격당해 생명을 위협받는 전개라니. 와우. 포켓몬이 생명으로 보였던 시기가 언제였을까, 상당히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프랜차이즈의 변화는 생명을 데이터로 되돌렸고, 생명이 사라진 세계는 모험을 안전한 여행으로 바꿔 놓았다. <PLA>는 포켓몬이 수 년간 외면해온 '모험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한 결과물이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많이들 지적하는 그래픽을 빼고 봐도 그렇다. 포켓몬은 위협적이지만, 그들의 생태계는 여전히 잘 구현되지 못했다. 지형은 텅 비었고, 지형지물은 반복적이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지기에는 아직 오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PLA>는 권태기처럼 보였던 프랜차이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정제된 동물원처럼 보였던 세계에 살아있는 생명이 뛰놀고, 포켓몬은 리얼리티와 접목되어 허구의 진실을 얻었다. 음악과 미(美)로 빚어낸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끔찍한 기술적 한계를 뒤로하고, 이 작품을 스위치 최고의 <포켓몬>으로 이끌었다. <PLA>는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프랜차이즈의 전환점일지, 시대를 앞서 간 혁명가일지... 기왕이면 전자였으면 한다. <PLA>의 철학이 이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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