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 게임 티어리스트를 매길 때, 항상 상위권에는 기존 작품의 개선판이 꼽힌다. 크리스탈, 에메랄드, 플라티나, 하트골드·소울실버 같은 것들 말이다. 포켓몬 게임은 항상 차이가 거의 없는 두 가지 버전을 내놓았고, 몇 년 뒤 완전판을 출시하여 수익을 이중으로 빨아먹는 구조를 취했다.
<금·은>이 <크리스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전설의 포켓몬에 서사가 입혀졌다. 색감은 더욱 명료해졌고, 포켓몬 등장 연출, 여주인공 추가, 오야지기, 배틀 타워 등 다방면에서 강화가 이뤄졌다. 이처럼 <포켓몬> 게임의 후속작은 기존작의 완전판을 추구하되, 특별한 혁신에 도전하지 않았다.
<블랙 2·화이트 2>(이하 B2W2)는 후속작의 법칙을 정면으로 깨부순다. 무대는 2년 뒤의 하나 지방. 시작 마을, 체육관, 등장 포켓몬까지 세세하게 다르다. 컨텐츠는 큰 폭으로 늘어났고, 비선형적 맵 디자인 또한 일부 개선되었다. 확실히 좋은 후속작이다. '후속작'은 그 자체로 단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BW2>는 전작 의존적인 타이틀이다. 전작 <블랙·화이트>(이하 BW)를 모르면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025.04.26 - [게임 리뷰] -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2010)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2010)
5세대는 줄곧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떤 이들은 5세대를 스토리 GOAT, 도트 최후의 근본 게임으로 여기는가 하면, 반대편은 스토리는 과장되었고, 이렇다 할 혁신이 없는 게임으로 여긴다. 블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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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W2>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을 전망이다. 어차피 <포켓몬>의 골자라고 해봐야 4세대 이후로는 큰 차이가 없고, <BW> 리뷰에서 다룬 내용들도 있다. 요점은 <BW>에서 "무엇이 변했고 발전했는가"다.

"Catch them all", 포켓몬의 오랜 캐치 프레이즈와 무색하게, 나는 포켓몬 도감을 완성시킨 경험이 꽤 적은 편이다. 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포켓몬 수가 늘어나 엄두가 안 나고, 풀 컴플리트에 복수 타이틀 구매는 반 필수이며, 게임 내에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포켓몬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특히 후자가 문제였다. 공략이 필수적인 게임 구조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B2W2>는 이 부분을 훌륭하게 극복했다. 각 지역별로 서식지 리스트를 제공하고, 리스트를 완성시켜 달성감을 얻는다. 처음부터 649마리 포켓몬을 전부 잡는다고 결심하면 엄두가 안 나지만, 서식지 리스트를 완성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 된다.




라이브캐스터는 <BW>의 계륵처럼 보였다. 영상 통화는 좋다. 그런데 정작 평소에는 못 쓰고, 스토리 상 연출에만 사용되어 아쉬움이 크다. <B2W2>는 라이브캐스터의 역할을 대폭 강화하였다. 라이브캐스터는 게임 속 공략 사이트와 같다. 주박사는 포켓몬의 진화 조건을, 체렌은 타입 및 특성에 대한 설명, 엄마는 현재 장소의 정보를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외부 사이트를 참조하지 않고 게임을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다.
번외)

뇌문시티 유원지(구 체육관 터) 벤치를 거닐면 물건이 하나 떨어져 있다.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 소리. 받아보니 물건을 잃어버린 장본인이란다. 사정이 있어 바로 받으러 갈 수 없다고. 종종 통화하는 두 사람.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진다. 어느 날 물건 주인이 직접 만나자고 요청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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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드디어 만난 두 남녀.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싹튼다. 딱딱했던 명칭은 어느새 반말이 되어있고, 이따금 약속을 잡고 관람차 데이트를 즐긴다. 통화 조건이 다소 빡센 게 흠.

만남 이벤트가 한정돼있어 아쉽지만 대화 패턴은 많은 편.
통화를 이어가면 뜬금없는 해프닝이 발생하는데...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 가정집 TV 속 예능 코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아이돌, 천마·루루. 힌트는 충분했다. TV 프로그램의 내용과 대화 내용이 일치하는 점, 유원지 인근 NPC의 증언, 가끔 튀어나오는 철권·루리의 말실수 등. 그간 짐작해 온 가설이 현실로 다가왔다. 급히 실수를 알아채고 통화를 끊는 상대. 다시 전화해 보니 직장 동료가 받았다고. 속아주는 게 도리겠지.

철권·루리 이벤트는 <B2W2>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상적이다. 아직 메인 컨텐츠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B2W2>는 <포켓몬> 게임에서 상상하기 힘든, 방대한 콘텐츠로 무장해 팬심을 홀린다.


<BW>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포켓몬>이다. 포켓몬 세계의 모순을 지적하는 플라즈마단에게, 포켓몬 배틀로 입을 막아버리는 행위는 이치에 맞지 않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으로,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B2W2>는 <BW>와 같은 복잡한 논쟁이 없다. 플라스마단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과거를 반성하는 사람과, 악당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 작품은 담론을 콘텐츠로 대체했다. 시스템과 윤리의 충돌이, 게치스는 악당, 문제는 구조가 아닌 인물의 타락 정도로 그려진다. <B2W2>는 질문을 철회하고 <포켓몬>을 다시 '안전한 놀이'로 되돌렸다. 앞서 <BW> 리뷰에서 "담론을 감당할 구조의 설계가 부족했다"고 했었다. <B2W2>는 이렇게 말한다. "포켓몬은 그런 게임이 될 수 없으니, 우리는 다시 포켓몬을 만들겠다"라고.



체육관 연출은 한층 화려해졌다. 아티는 벌레와 예술을 앞세워 시선을 빼앗고, 기존의 체육관 테마를 비틀어 전위적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보미카는 라이브하우스를 테마로 신나는 DOGARS(해외판은 POKEMON) 락을 선보인다. 카밀레는 패션쇼의 런웨이라는 콘셉트를 살려 펑키한 무대를 연출한다.
그러나 혁신은 여기에서 멈췄다. 물풍경시티 이후의 체육관은 구작 체육관의 구성과 판박이다. 짐 리더의 본업과 타입을 잘 버무려낸 구성이, 물풍경, 귈수, 쌍용체육관 등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쌍용체육관이 드래곤 타입이라는 이유로, 퍼즐을 드래곤 대가리로 만든 아이디어는 게으른 선택처럼 보였다. (짐 리더의 특색을 전혀 살리지 못한 구성이다.)
https://youtu.be/XW6Ql-e7sy4?si=9mXIUXHPvcqEAbgk
https://youtu.be/8T6dvEuV7hk?si=JzDUozc_YwSjmrez
https://youtu.be/7pTFLxeg6tg?si=6Ex20Jbb3Nd3rvzu


'포켓몬 뮤지컬'은 최악의 서브 콘텐츠였다. 반복 플레이가 무의미한 따분한 구성. 뮤지컬의 신화는 <B2W2>에서도 이어졌다. 불행 중 다행일까. <B2W2>는 포켓몬 뮤지컬에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B2W2>의 가장 훌륭한 판단이 여기서 나왔다. 뮤지컬 콘텐츠를 강화하기보다, 신규 콘텐츠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인 것이다. 이른바 포켓우드.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에서 따온 이 콘텐츠는 지금도 이따금 회자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포켓몬 영화를 촬영하는 기획. 완성된 필름은 즉시 어쩌구 저쩌구 기술로 가공되어 극장에 내걸린다. 플레이어는 그냥 몸만 가면 충분하다. 어차피 렌탈 포켓몬 빌려주고, 상대 배우 알아서 매칭시켜 준다. 포켓우드는 5세대 전반에 녹아든, '인간 전성시대'의 대미를 장식한다. <포켓몬> 특유의 과묵한 주인공은 이제 옛말이다. 톡톡 튀는 대사와 행동이 우릴 맞이할지니.










포켓우드로 만족하면 섭하다. <B2W2>는 무궁무진한 콘텐츠로 가득 차 있으며, PWT(포켓몬 월드 토너먼트)는 가장 알기 쉬운 형태로 향수를 자극한다. 어릴 적 <엑스맨 VS 스트리트 파이터, 1996> <마블 대 캡콤, 1998>을 오락실에서 접하고 설레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캐리건과 일리단이 싸우면 어떻게 되나요?" 같은 아이다운 질문들, 그 꿈이 <B2W2>에서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토너먼트에서 실적을 쌓아 각 지방의 강자들과 대결하고, 목호, 성호, 난천, 레드, 그린 같은 끝판왕과 마주한다. 제약을 풀고 미쳐 날뛰는 짐 리더들. 이게 낭만이지.





'조인애버뉴'로 대표되는 협력 콘텐츠 또한 돌아보고자 한다. 기존의 협력 콘텐츠는 타인의 도움 없이 즐길 수 없는, 다소 아쉬운 디자인으로 불만을 샀다. <B2W2>는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강제하지 않는다. 조인애버뉴를 방문하는 수많은 NPC들, 그들을 초대하여 나만의 상가를 조성한다. 여러모로 배려가 돋보이는 작품.

언젠가부터 타지방 전설의 포켓몬을 잡을 수 있게 배려한 작품이 늘어났다. 옛 포켓몬을 얻을 수 있으니 참 좋은 일인데, 대사 한 줄 없는 꼬락서니라니... 썬더를 위한 지역이 하나쯤 있으면 좋았잖아.

<B2W2>는 과거의 유산을 대충 표현하지 않았다. 레지락, 레지아이스, 레지스틸 같은 호연지방의 포켓몬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고, 호수의 수호신을 위해 주박사가 등장하는 이벤트를 삽입한다. 라티오스, 라티아스는 여러 번 마주치게 만들어 특정 장소로 유도해야 잡을 수 있는 기믹을 추가했다. 추억링크는 <BW>의 세이브 데이터와 연동하여 전작 인물들의 회상 씬을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B2W2>는 팬 서비스의 극한을 보여준다.
평가점수 ★★★★
스토리를 끝내고 치우는 플레이어는 이 작품의 좋은 점을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후속작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전작을 알아야 100% 즐길 수 있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B2W2>를 끝으로 <포켓몬> 프랜차이즈는 풀 3D 게임으로의 도전을 선언한다. 첫 작품으로부터 15년, 그동안 쌓은 노하우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통 밑바닥까지 훑어먹는 마니아에게 있어, 이 이상의 완성도를 지닌 테마파크는 감히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개발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한 지금, 그래픽을 일신하며 이 정도의 완성도로 마무리하는 앞날은 상상하기 힘들다.
<BW>는 포켓몬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질문이었다. <B2W2>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질문을 접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가장 잘 만든 <포켓몬>이자, 가장 안전한 <포켓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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