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동급생 리메이크가 출시되었다.
그동안 동급생은 다양한 기종으로 발매되었다. 요즘 게임들과 달리, 그때는 포팅할 때마다 조금씩 게임성이 달라지곤 했다. 동급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추가 요소를 세일즈에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그러나 보이스 추가와 엔딩이 달라진 게 전부, 리마스터도 리메이크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었다. 2007년, DMM판 출시를 끝으로 동급생은 오랜 침묵을 지켰다. 30년 전 게임의 리메이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동급생>을 플레이했다. 보통 출시된 지 30여년이나 지나면 시간에 매몰되기 일수. <동급생>은 2021년에도 여전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 동급생의 주인공 타쿠로는 혼자 살고 있으며, 센부학원 3학년 코스를 밟고 있는 18세 학생이다.
ⓑ 타쿠로는 주위로부터 여자밝힘증, 색한이 옷을 입었다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 타쿠로는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알바를 열심히 뛰었다.
ⓓ 여자들과 새콤달콤한 추억을 쌓는 것이 목표.
ⓔ 친구 카즈야에겐 쿠루미란 여자친구가 있다.
ⓕ 여자친구의 옷을 고르기 위해 카즈야와 역 앞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함.
기존의 연애 게임들이 '명령 선택식 텍스트 어드벤처' 였다면, 이 게임은 말 그대로 '어드벤처'에 초점을 두었다. 맵 곳곳을 누비며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한 편.
마우스 커서를 사물에 갖다대면 오브젝트를 사용하거나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컴퓨터를 클릭하면 지금껏 만난 여자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고, 침대를 누르면 저장이 되면서 8시간이 흘러간다.
창문을 클릭하여 바깥을 내다볼 수도 있다.
<역전재판, 2001>의 탐정 파트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사다리를 클릭하여 사다리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는 Open을 누르고 문을 클릭하여 문을 여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퍼즐 파트를 구현하기 위해 투 클릭 체재를 선택했겠지만, <동급생>은 연애 어드벤처 장르의 특성에 맞게 시스템을 간소화했다. 당대 어드벤처 게임의 시선으로 봐도 획기적이다.
아코의 머리카락을 클릭해보자.
머리카락에 대한 회화가 나온다.
보브컷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인공.
이 방식은 2021년 기준으로 봐도 매우 직관적이다. 당시 어드벤처 게임들 중 부분적으로 포인트 앤 클릭을 구현한 게임도 있었지만, <인디아나 존스> <킹스 퀘스트6> 같은 유명 타이틀조차 <동급생> 만큼 직관적인 조작 방식을 갖추진 못했다. 어드벤처에서 이런 방식이 유행하게 된 건 <미스트, 1993> 이후의 일이다.
<동급생>이 채택한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은 결코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다. 다른 어드벤처 게임이 퍼즐을 위해 포인트 앤 클릭을 활용했다면, <동급생>의 포인트 앤 클릭은 인물, 사물, 장소를 클릭하면서 정보를 탐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방식은 연애 어드벤처 장르와 연결되어 엄청난 시너지를 발산했다. 연애게임을 하면서 이성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자연스럽게 클릭에 손길이 간다.
* 이 리뷰에는 <동급생>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지만, 핵심적인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일체의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동급생>은 비선형적인 게임이다. 카즈야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다른 일정을 소화해도 된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은 마치 '중국어 하나도 못하는데 쓰촨성 한 복판에 떨궈놓은 것 같은 막막함'이 있어, 과도한 자유도가 오히려 진입 장벽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동급생>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카즈야와의 약속이란 길잡이를 마련해 놓았다. 길잡이를 따르지 않아도 다양한 이벤트를 볼 수 있어 다회차 플레이가 즐겁다.
카즈야의 상태가 이상하다.
부띠끄에 와보니 생머리 미인이 있었다.
카즈야의 흑심 덕분에 나츠코와 알게 되었다.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헌팅할 사람을 찾아보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주인공을 불러세운다.
연습하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대화 도중 신발, 손, 머리카락 등을 클릭해 다양한 코멘트를 읽을 수 있다. 수위를 가볍게 넘나드는 주인공. 요즘 시대였다면 훨씬 순화된 표현이 쓰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다.
히로인과 만날 때마다 각 히로인의 테마가 나오는 게 인상적이다.
분위기 잡을 때 음악 만한 장치는 없지.
아코의 묘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주인공조차 마이를 신성시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이는 연애게임에서 흔한 클리셰인 '벼랑 위의 꽃' 컨셉의 캐릭터. 이 컨셉을 이어받은 후지사키 시오리는 <도키메키 메모리얼, 1994>의 인기를 견인했지만, 마이는 시오리 만큼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진 못했다.
2021.08.30 - [게임리뷰] - 도키메키 메모리얼 (1994)
예전에는 마이 공략이 까다롭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해보니 충분히 할만한 것 같기도 하다. 난이도가 높은 메인 히로인 기믹은 <도키메키 메모리얼> <동급생 2>에 적극 반영되었는데, 시오리, 유이의 난이도는 마이보다 훨씬 높아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2021.11.03 - [게임리뷰] - 동급생 2 (1995)
<동급생>은 연애게임이지만, 더 정확히는 헌팅(난파)게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난파란 '남자가 여자에게 작업을 걸어 꼬시는 행위'를 뜻한다. 맵을 탐험하여 등장인물과 접촉하고, 잘 모르는 여성에게 다짜고짜 들이댄다. 요즘 연애게임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식이다. <동급생>의 난파 컨셉은 마을 곳곳을 탐험하는 게임의 스타일과 어우러져 멋진 시너지를 선보인다.
연애 게임의 불문율조차 <동급생>에선 무의미하다. 타쿠로는 상대가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다. 카즈야는 쿠루미와의 연애가 잘 되지 않자 나츠코에게 눈을 돌린다. 히로미는 이별을 망설인다. 이때 타쿠로가 쿠루미, 히로미에게 작업을 건다. 멀쩡히 잘 사귀는 여자친구를 빼앗는 건 아니지만, "와 이 녀석 굉장하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뭐 게임은 게임일 뿐이니까.
요즘은 연애게임을 만들더라도 NTR 요소가 있으면 미리 밝히는 게 불문율이 됐다.
<동급생> 시절엔 지금보다 소비자 층이 더 넓었고 성인게임이라는 취지를 살린 게임들이 많았다. 2000년대 이후 엘프는 NTR 문제로 홍역을 겪었다. 엘프는 초지일관 이런 게임을 만들어 왔다. 트렌드가 청춘 드라마 스타일로 바뀌면서 소비자도 바뀌었다. <투하트, 1997> <에어, 2000>를 즐긴 사람들에게 엘프 게임이라니, 당연히 해프닝이 생길 수밖에 없지.
2021.11.09 - [게임리뷰] - 하급생 2 (2004)
엘프는 <동급생>에 온갖 캐릭터를 다 집어넣었고, 그 중에는 타나카 미사처럼 시대를 앞서 간 캐릭들도 있었다. 심지어 히로인 중에 열 남자 마다하지 않는 풍속업 종사자도 있다. 엘프의 특이한 취향은 <하급생, 1996>에서도 이어졌다. 소비자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대충 집어넣은 것 같은데, 실은 더 간단한 대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작자의 취향이 반영된 게 아닐까.
2021.11.05 - [게임리뷰] - 하급생 (1996)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면 마당을 쓸고 있던 이웃과 눈이 마주친다.
오며 가며 인사하는 사이가 된 주인공. 역에서 짐 나르는 걸 도와주는데...
남편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고, 둘 사이에 자식도 없다. 레이코는 타지에서 외로움에 떤다. 레이코 공략은 말 그대로 불륜이다. 당사자들도 불륜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밀회를 거듭하는 남녀.
<동급생>은 학창시절을 베이스로 한 작품이다. 순수함, 풋풋함 같은 감정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급생>은 풍속업 종사자, 옆집 아줌마(심지어 불륜 관계)를 히로인으로 내세웠다. 요즘 이랬다간 제작사 창문으로 돌이 날아들지도 모르겠다.
카즈야는 쿠루미와 쭉 사귀어 왔지만, 카즈야는 진도를 빼고 싶어하고 쿠루미는 키스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점차 카즈야는 자신이 애인이 아닌 오빠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연애전선이 잘 안 풀리면서 감정이 흔들리는 카즈야, 결국 쿠루미는 제쳐두고 부띠끄샵의 나츠코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한다.
쿠루미를 만나자 입 발린 소리를 하는 타쿠로.
"역시 그렇지? 카즈야 군이 이상한 거야" 라고 말하는 쿠루미.
이해는 하지만, 쿠루미 앞에서 그런 말 못 하지.
쿠루미와 헤어지지 않은 상태로 나츠코와 놀러 다니는 카즈야. 쿠루미를 보험 삼아 나츠코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쿠루미는 상황을 모르니 안절부절, 카즈야는 갈팡질팡. 참 난감한 상황이다.
<동급생>은 두 명 이상의 히로인과 동시에 사귈 수 있는 게임이다. 그런데 마코 루트를 진행하면 아코 루트를 진행할 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서로 친한 사이이니만큼 귀에 들어가기 쉽다는 설정인 것 같다. 당시로선 대단히 신선했던 시스템.
당시의 성인게임들은 연애의 과정을 경시했다. 당시 많은 게임들이 난파 노선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컁컁 바니 프리미에르>는 얄팍한 스토리를 보강한 게임이었고, 난파 노선을 탈출한 <졸업, 1992> 같은 게임도 등장했다. <동급생>은 난파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탐험과 수색을 중시한 어드벤처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또한 누구와 맺어진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짧은 기간 동안 어떤 추억을 만드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동급생>이 높은 자유도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다양한 장소를 탐색할 수 있어서? 그것도 맞는 이야기지만 '시간'을 간과할 수 없다. <동급생>은 시간을 관리하는 게임이다. 타쿠로는 방학 동안 여자들과 좋은 추억을 쌓는 것이 목표, 하루하루 효율적으로 보내야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다.
<동급생>은 문어발 연애 게임이다. 즉, 동시공략을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페르소나>를 할 때 플로우 차트를 짜서 플레이하는 사람들 있지 않나.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10시 / 약국 / 아코와 대화 |
10시 15분 / 회사 / 히로미와 대화 |
10시 30분 / 카페 / 사토미와 대화 |
12시 / 역 / 전차 타고 이동 |
1시 / 영화관 / 미호와 만나 영화보기 |
3시 15분 / 공원 / 쿠루미와 보트 타기 |
* 표는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입니다. 공략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동급생>은 플로우 차트를 봐야될 정도로 스케쥴이 빡빡한 게임일까? 그렇지 않다. 이 게임에 21일 10시부터 11시까지 볼 수 있는 이벤트가 있었다면 모를까, 25일에 볼 수 있는 이벤트를 27일에도 볼 수 있는 등 발생 조건이 널널하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옛 얘기를 하나 해보고자 한다.
공원을 지나가는데 아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어떨까? 예상치 못했기에 놀랍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친구와 마주쳐 수다를 떨 때의 즐거움이란...
<동급생>은 거창한 이벤트가 별로 없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 그땐 몰랐지만,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단순히 오래된 게임이라서가 아니라, <동급생>에 향수가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 생각없이 돌아다니다가 의외의 이벤트를 볼 때도 있다.
헌팅게임이라는 컨셉에 가장 잘 어울리는 히로인.
화려한 말솜씨로 카페에 꾀어내는데 성공했다.
게임 이름은 <동급생>인데 정작 동급생 히로인이 별로 없다. 동급생은 마이, 미사, 미호, 사토미, 쿠루미... 14명 중 5명 뿐이다. 이런 기조는 <하급생 2, 2004>까지도 유지되어, 게임 제목은 하급생인데 메인 히로인은 동급생인 이상한 게임이 출시되었다.
맨날 티격태격 싸우는 타쿠로와 미사.
묵직한 훅을 날리는 타쿠로.
미사도 지지않고 맞선다.
앙칼진 게 매력.
미사와 미호는 절친이기 때문에 동시 공략이 불가능.
미호에게 집적거리자 바로 따지러 온 미사.
이 지경이 되도 자기 캐릭터를 지키는 주인공.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투덜거리면서도 미사를 업어주는 타쿠로.
<동급생>에서 딱 한 장면만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앞서 <동급생>의 칭찬을 길게 늘어놓았다. <동급생>은 눈에 띄는 단점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디스크 교체 문제이다. 학원에 들어가면 디스크 D를 넣어달라고 하고, 벗어나면 디스크 C를 넣어달라고 한다. 디스크 교체하는 게임이 별로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디스크를 9장씩이나 쓰는 게임은 하는 입장에서 골이 다 아프다.
평가 점수 ★★★★★
<동급생>이 시도한 시스템들은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것들이 아니다. 스페인의 예술가 피카소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는 피카소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 <동급생>은 다른 게임의 시스템을 따와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누군가가 말한 훔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엘프는 모방을 넘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동급생>의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 스토리의 뼈대만 간신히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이벤트 수는 적지만, 풍부한 일상 대화의 숫자로 단점을 메웠다.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다음 번에는 어떻게 플레이할까"를 고민하며 리플레이하는 재미가 있다. 옛날 옛적에 혁신적이었던 게임들은 많지만, 지금 해도 재밌는 게임들은 굉장히 드물다.
<동급생>을 대체할 만한 게임은 없다. 출시된지 30여년이 흐른 고전 게임. 제 아무리 혁신적인 게임일지라도 수십 년이 지나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동급생>은 다르다. 세월에 풍화된 흔적이 남아있을지언정, 자신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어쩌면 연애 게임이 큰 발전없이 정체, 퇴보를 거듭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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