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f는 이제 없다. 슬슬 주름을 걱정하는 아저씨나 기억하고 있을 추억의 회사이지만, 성인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만년 음지의 문화였던 성인게임이, 이제는 스팀에 버젓이 들어와 메인 무대로의 진입을 꿈꾼다.
성인게임은 본디 컨텐츠가 없는 장르였다. 엘프는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급생>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포인트 앤 클릭으로 유도했고, <이사쿠>는 호러와 방 탈출을 접목한 퍼즐 어드벤처, <YU-NO>는 병렬 세계라는 복잡한 설정을 세이브 시스템에 녹여내 찬사를 받았다. 엘프는 "성인게임도 결국은 게임"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한 사례다.

언젠가부터 이런 게임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전한 게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귀여운 캐릭터, 이야기 중심, 상시 세이브, 게임적 요소는 없는 비주얼 노벨의 시작이었다.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 따스하고 감성적인 스토리는 당시 소비자 니즈에 딱 맞는 상품이었고, 제작 난이도가 낮은 점 역시 매력적이었다. 이윽고 시장은 비주얼 노벨 중심으로 재편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이제 아무도 성인게임에서 '게임성'을 원치 않는 시대가 왔다. 성인게임이기에 가능한 시도들, 문제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언제부터 연애 게임에서 불편한 감정을 제거해버렸는가?
<동급생>의 성공은 성인용 연애 게임 = 동급생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히로인과 만나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만남을 반복해 관계를 쌓는다. 성인 게임의 표준을 넘어 독창성으로 똘똘 뭉친 타이틀이었다. <동급생 2, 1995>은 연애 어드벤처의 정점을 찍은 타이틀이다.
그 무렵 또 다른 연애 게임이 시장을 강타한다. 고교 3년간, 자신을 갈고 닦아 시간을 관리하는 연애 시뮬레이션, <두근두근 메모리얼, 1994>(이하 도키메모)가 첫 발을 내딛은 순간이다. <도키메모>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 장소를 선택해 데이트를 즐긴다. 이 순간 데이트는 우연한 만남의 부산물에서, 플레이어 주도로 잡는 약속으로 거듭나게 된다.
2021.08.30 - [게임 리뷰] - 두근두근 메모리얼 (1994)
두근두근 메모리얼 (1994)
게임산업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90년대, 철저한 내수용 게임이 3년 만에 110만장을 팔았다. 또한 관련 매출이 5년 만에 100억엔을 돌파하기도 했다. 연애 게임의 전설, 바로 도키메키 메모리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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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시리즈는 1개월 이내의 짧은 기간을 다룬다. 대신 10~15분 단위로 플레이하기 때문에 하루의 밀도가 굉장하다. 한편으로 <동급생>은 데이트를 이벤트로 처리했는데, 이 작품에서 데이트란 시나리오의 부산물이다.
탐색은 <동급생>의 심장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히로인을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다. 이따금 이벤트가 일어나기도 한다. 특별한 이벤트보다 만남 자체에 가치를 두는 시대의 게임이다.
<하급생>은 <동급생>의 이념을 대부분 계승했다. 흥미로운 점은 포인트 앤 클릭을 버렸다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머리, 입술, 옷 등을 눌러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이 방식은 흥미롭지만, <하급생>은 1년 짜리 게임이다. 이런 게임에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했다간 수지타산이 안 맞았을 것이다.
2021.10.18 - [게임 리뷰] - 동급생 (1992)
동급생 (1992)
2021년 2월 26일, 동급생 리메이크가 출시되었다.그동안 동급생은 다양한 기종으로 발매되었다. 요즘 게임들과 달리, 그때는 포팅할 때마다 조금씩 게임성이 달라지곤 했다. 동급생도 예외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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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3 - [게임 리뷰] - 동급생 2 (1995)
동급생 2 (1995)
동급생의 주인공 타쿠로는 방학 동안 여자들과 새콤달콤한 추억을 쌓고자 한다. 청춘이란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술도 마시고 운전도 하고... 어른이 되면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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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은 시간과 탐색을 중시한 게임이다. 따라서 스케쥴 중심의 플레이 루프가 성립한다. 그러나 <동급생>의 데이트란 '시나리오의 부산물'에 가깝다.
<하급생>은 철저히 스케쥴 중심으로 흘러간다. 동시 공략도 편해졌다. 데이트는 주도적이고, 주어진 시간은 1년이다. 이건 영락없는 <도키메모> 스타일이다. <하급생>은 <동급생>의 뼈대 위에 <도키메모>를 얹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평일에는 학원에 다니고, 주말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남는 시간에 돈을 벌 것인가, 마을에서 탐색할 것인가, 데이트를 할 것인가는 플레이어의 몫이다. 노력하지 않는 이에게, 여자친구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단 말인가.
* 주의!!! 스포일러가 대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예처럼 일하는 주인공.

방학기간 동안 카페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한다.
여가 시간은 토요일 밤~일요일 뿐.

그것도 모자라 자퇴를 종용하는 숙부.
방학기간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날로 먹을 생각이다.

웃는 표정으로 무서운 얘기를 한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수십 번도 넘게 듣게 된다.

| 1996년 한국 물가 최저시급 1,275원 / 짜장면 2,662원 / 담배(디스) 1,000원 / 쌀 20kg 14,837원 |
시간당 400엔이면 큰 돈 같은데 <하급생> 세계관에선 푼 돈에 불과하다. 시급 1,000엔 버는 건 일도 아니다. 그만큼 <하급생> 세계엔 고효율 알바가 많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노예 계약을 한 건지.

숙부가 맘대로 때려치지도 못하게 한다.

월~토는 20시, 일요일은 23시까지 기숙사에 들어와야 한다.
점호시간 이후에는 못 나가지만 통화는 가능하다.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

숙부에게 시달린 탓일까,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켄타로. 주인공의 성향은 <동급생 2>의 류노스케보다 <동급생>의 타쿠로에 가깝다. 선을 넘나드는 무지막지한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줌.

<도키메모>는 히로인 엔딩 외에도 장래를 보여주는 엔딩이 따로 있다. 따라서 같은 히로인을 만나더라도 엔딩이 미세하게 바뀐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결혼, 직업 엔딩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급생>은 어떤 히로인과 잘 되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미래가 정해진다. 엔딩의 수는 히로인 수만큼 존재하므로, <프린세스 메이커>는 커녕 <도키메모>보다도 엔딩의 수가 적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하급생>은 히로인 동시공략의 끝판왕, 비록 엔딩은 적은 편일지라도 플레이 가짓수는 무궁무진하다.
https://youtu.be/lmRkTjSCKiI?si=j1QZqDMESbAovYRM

미즈호는 학교의 아이돌이자 테니스부 부장이다. 다정다감한 성격과 순수함을 겸비한 히로인. 그러나 '전형적인 메인 히로인'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준다. 그녀는 사랑을 '감정'으로 측정하지 않는다. 미코 이벤트의 '깨워준다' 선택이, 미즈호의 호감도로 치환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미즈호는 연애 상대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인성을 평가하는 사람이다.

<동급생 2>이 프롤로그를 설명회로 활용한 것과 달리, <하급생>은 다짜고짜 본편이다. 이 캐릭터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관계로 얽혀있는지는 실제로 해봐야 안다. 이는 미코만이 아닌, 모든 히로인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료코는 매번 이상한 질문을 하는데,
꾸준히 마주치면 료코가 어떤 제안을 하게 된다.

마유미는 섹스란 스포츠처럼 가볍게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유미의 이런 생각에 동조한다면 몸은 얻을 수 있어도 마음은 얻지 못한다. 마유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을 탐색은 전형적인 <동급생> 스타일이다. 이런 방식은 낡고 불편한 것처럼 보일 지 모르겠으나, 마을의 구조를 파악하는데는 효과적이다. 꽃집 옆에는 생선가게가 있으며, 이 두 곳 모두에 히로인이 있다. 목격되기 쉬운 탓일까, 마호코와 마키는 동시 공략이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마호코, 마키 외에 지형, 건물 배치를 이용한 요소가 없다는 게 아쉽다.

9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연락 수단은 유선 전화와 삐삐였다. 연락 수단을 가진 사람은 대개 어른들, 아이들은 별다른 연락 수단 없이 집 전화를 이용해야 했다. 이마저도 부재 중일 때가 많았다. 마을을 쏘다니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친구와 만난다. 문방구 앞, 놀이터, 오락실,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각별하다. 성인이 되면 뿔뿔이 흩어져 느끼기 힘든 향수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든다. <하급생>이 90년대에 태어나지 못했다면, 설령 엘프가 살아있어도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집에 가보니 부재 중이고, 길이 엇갈리고, 우연히 만나는 감정'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 거주민들은 누리기 힘든 경험이다. 별 것 아닌 만남이 이벤트가 되는, 이른바 '스침의 기억'은 이 시대에 태어난 작품이기에 가능했다.
연락할 방도가 없는 막막함은 역설적으로 '같은 공간에 머무름'의 가치를 극대화했고, 그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은 관계의 뼈대를 이루는 침전물이 됐다. <하급생>에서 연애란 시간의 누적물이다.
*매일 반복되는 이동. *만나도 아무 일 없는 대화. *아무 일도 없는 날의 반복.
만나봤자 짧게 잡담을 나누는 게 전부. 만남의 내용보다는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다. 연애는 사건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밀도'로 기억된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예쁜 여성을 본 주인공은 화려한 화술로 첫 만남에 번호를 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놀랍게도 많은 연애 게임들은 첫 만남을 이런 식으로 세팅하지 않는다.
| <투하트, 1997>의 플롯 등교 도중 어떤 여학생과 부딪힌 주인공, 그녀가 떨어뜨린 오컬트 책을 줍는다. 그녀는 유명한 대기업의 영애. 주인공은 수소문 끝에 오컬트 부에 들러 책을 건네준다. 그녀는 오컬트 부를 견학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데...... |
이런 만남은 서브컬쳐 물에서 흔히 볼 수 클리셰지만, 개연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2004>처럼 철저하게 구매층의 로망을 자극한 것이다.
<하급생>은 카페 알바를 보고 작업을 걸고,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용기내 데이트를 신청한다. <하급생>이 현실적인 게임이라곤 볼 수 없지만, 다른 연애게임과 비교하면 충분히 현실적이다. 이런 설정은 플레이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어, 몰입감을 높여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마호코는 언제나 같은 시간, 고정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꽃다발을 사면 호감도가 오른다. 매일매일 구매와 대화를 반복하면 대화 양도 많아지고, 데이트에 초대할 수도 있다. <동급생>의 미사, 미호처럼 <하급생>의 마호코도 대칭되는 히로인이 있다.


<동급생>이 그랬듯, 이 게임에도 동시 공략이 어려운 캐릭터들이 있다. 마호코와 마키는 별도의 접점은 없으나, 이웃의 특수성이 공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마호코-마키의 대화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존재한다. 실은 이웃=동시공략 불가는 표면적인 이유에 가깝고, 두 사람의 행동 원리가 굉장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마호코는 꽃다발을, 마키는 생선을 판다. 똑같이 호감도도 오른다. 두 사람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마호코는 '꽃을 사는 핑계'로 말을 걸 수 있고, 꽃은 기능보다 의미가 중요한 물건이 된다. 마키는 생선을 팔아도 "고맙습니다" 외의 반응이 없다. 생선은 현실이다. 돈이나 노동 같은 것들 말이다.
두 사람의 시각은 데이트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이 폭력을 사용하는 장면에서 마호코는 안전한 선택을, 마키는 화끈한 선택을 선호한다. (굽신굽신, 돈으로 해결 따위의 선택지는 호감도 박살이다.) 두 사람의 다른 사고방식은 동시공략이 불가능한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레이코는 우츠키 마을 대지주의 딸로 대부분의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다. 연애 경험이 없고 자존심이 강해 사실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 주인공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중증 츤데레 증상을 보인다. 처음에는 사이가 나빠 독설 세례를 받아내야 하지만, <하급생> 시스템이 그렇듯 계속 마주치면 마음이 열리게 된다.

미노루는 미나츠에게 한 눈에 반해 대시했다가 쫓겨나는 존재다. 미나츠가 켄타로에게 호감이 생기면 미노루가 포기하지만, 호감도가 낮으면 미노루와 미나츠가 사귀게 된다. <동급생>의 카즈야 같은 포지션, 카즈야의 밉상 짓에 비하면 미노루는 양반이다. 살짝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미노루는 친구 포지션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동급생 2>의 아키라는 주인공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어설프지만 연애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면모를 보인다. 아키라가 도와주고 싶은 캐릭터인데 반해, 미노루는 내가 도와줄 수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독립된 캐릭터다.

하루히코는 전형적인 엘프식 빌런이다. 하루히코네 집에 전화를 걸면 가정부가 전화를 받는데, 이름을 듣고 잠시 찾아보더니 D급 친구라면서 막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하루히코는 다양한 히로인을 찔러보는데 유독 미코 시나리오에서 자주 출몰한다. <동급생 2>의 사이온지가 딱 이런 포지션인데, 주인공과 주고 받는 대화는 사이온지 쪽이 좋다. (타격감이 좋기 때문) 극딜도 안 통하고, 잘난 맛에 살고, 여자한테 집적거리고... 아유 재수없어.




이상한 꿈을 꾸는 주인공.
매번 등장인물은 같은데 내용이 바뀐다.

썩지 않는 생선, 시들지 않는 꽃다발에 이어 떠있는 사람까지.
<동급생 2>의 세계관도 괴짜였지만 이건 더 하다.


옆자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직접 와서 앉은 티나.

행동거지, 옷차림, 말 모두 세상과는 담을 쌓은 모습.

티나의 동생 팀, 켄타로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팀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고, 말을 섞어도 결코 웃지 않는다. 이 동네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시즈카 선생은 티나가 먼 나라의 공주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얼떨결에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켄타로.

<하급생>은 데이트를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잡을 수 있다. 일정이 정해졌던 <동급생>과 달리, <하급생>은 일정을 자기 마음대로 짤 수 있어 동시공략에 용이하다. 예를 들어 미즈호, 마호코, 레이코, 마유미를 동시 공략한다면 "어떻게 일정을 짜야 안 겹치고 모든 이벤트를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히로인이 데이트를 승낙하면 장소를 고른다. 우츠키 아동공원에서는 데이트 비용이 무료, 해피 스트라이크에서는 볼링 비용을 내야한다. 데이트 장소에 따라 호감도의 상승폭도 달라진다. <동급생> 시리즈는 돈을 써서 데이트하는 기분만 낼 뿐, 소지금 관리는 뒷전이었다. <하급생>은 데이트 시뮬레이션에 충실해, 돈이 없으면 데이트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게임이다. 돈벌이는 주요 콘텐츠가 되어 플레이어의 지갑을 압박한다.
대부분의 연애 게임은 호감도를 쌓으면 관계가 자동으로 굴러가는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하급생>은 다르다. 이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면,
` 만남엔 이동 시간이 든다.
` 데이트엔 돈이 든다.
` 돈을 벌려면 시간이 든다.
` 시간이 없으면 약속을 못 잡는다.
` 약속을 못 잡으면 관계가 식는다.
즉, 관계는 획득이 아닌 유지로 굴러간다. <하급생>은 "사랑을 하면 보상이 온다"를 보여주기 전에, "사랑을 하면 자원이 줄어든다"를 먼저 보여준다. <하급생>에서 느껴지는 묘한 '생활감'의 본체는 여기서 기인한다. 그래서 '데이트'는 이벤트가 아니라 투자다. 연애 = 리소스 관리가 되어버리니, 연애의 감정은 갑자기 '현실감'을 띈다.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 오늘 오후 3시간을 누구에게 쓰는가
` 이번 주말을 누구랑 보낼 것인가
` 그 시간의 선택이 다른 관계에 어떤 손실을 주는가
<하급생>에서 시간이란 배경이 아니다. 시간은 '교환 가능한 화폐'다. 그래서 이 게임은 평범한 연애게임의 논리를 거부하고, 끊임없는 계산을 요구한다.

데이트 도중, 다른 히로인과 마주칠 때가 있다.
아, 이렇게 타이밍이 나쁘다니.

<하급생>에서 비용은 스토리 연출이 아니다. 데이트를 잡는 순간부터 이미 돈/시간이 들어간다. 데이트 현장이 목격되어 소문이 꼬리를 문다. 목격은 다음 만남의 분위기를 바꿔, 플레이어의 심리를 압박한다. <하급생>에서 스침은 '관계의 지형'을 바꾼다. 그래서 <하급생>의 동네는 단순한 '배경'에서 벗어나, 플레이어의 행동을 평가하는 '물리 엔진'으로 남는다.


조건을 맞추면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한, 이벤트 패턴은 다소 부족한 편. 게임 기간이 무려 1년임을 감안하면 금방 질리기 쉬운 구조다. <하급생>은 후반부의 아쉬움을 물량으로 커버한다.
<동급생>은 연애 게임에서 보기 드문 문어발 연애를 채택했다. <하급생>은 동시 공략의 비중이 더더욱 높아져, 티나를 제외한 모든 히로인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첫 데이트를 하면 이렇게 소문이 돈다. 분수를 알라며 면박을 주는 하루히코. 이외에도 미노루, 마유미, 레이코 등등 와서 한마디씩 한다. 남의 연애 사업 하는데 보태준 거 있수? 왜 자꾸 와서 시비람.
*-료코 루트-
캔버스에 묻어나는 서정의 향기

만날 때마다 뚱딴지 같은 질문을 던지던 료코. 주인공이 맘에 들었는지 모델이 되어달라고 한다. 응하지 않으면 료코 공략은 물 건너간다.




남성의 성기에 위화감을 느끼고 남성 누드를 포기하기로 한 료코.
켄타로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료코는 그림 외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안함을 느끼면서 주인공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모처럼 데이트를 나갔더니 그림만 그린다.
여심을 얻는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그림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의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표정부터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호감도가 높은 상태에서 '단둘이 있는다' 대신 '집에 바래다준다' 를 선택.
이상하게 생각한 료코가 물어보는데...







성인게임 답게 수위가 높지만, 진한 서정성이 묻어나는 장면.
*-마호코 루트-
평범한 히로인의 초상

마호코는 알바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트러블에 휘말린다. 마호코는 초기 호감도가 높고 호감도를 올리기 쉬워, 최초로 깊은 관계가 되는 캐릭터일 가능성이 높다.


유원지 데이트를 만끽하는 남녀.



마호코는 옆 마을 하츠키 학원에 다니고 있다. 하츠키 마을은 유원지, 수족관, 야구장 등의 문화시설이 즐비해 데이트 코스로 애용되는 장소다. (작은 마을에서 시내로 놀러가는 기분이 든다.) 하츠키 마을로 데이트 약속을 잡으면 전철을 타게 되며, 왕복 시간이 길어져 데이트 시간이 추가로 소요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방문했다는 그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도게자 카페에 갔더니 마호코가 다른 남자와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주인공은 크게 상심하나, 같이 있었던 남성은 마호코의 동생이었다.


집에 귀가한 줄 알았던 마호코가 잠시 얘기하자고 한다. 일단 우츠키 아동공원으로 안내하는 주인공.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마호코가 "켄타로를 믿어도 괜찮을까요?" 라는 말을 꺼내자, 주인공은 당황하면서도 믿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하급생>에서 레이코는 부잣집 오만한 츤데레의 전형으로 그려졌다. 속성이 명확한 캐릭터는 행동 예측이 용이하다. 예측 가능한 캐릭터는 이벤트가 아닌, 루틴의 누적으로 열리기 쉬운 구조를 뜻한다.
마호코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요즘 기준에서 마호코는 특징없는 히로인(요즘은 이마저도 특징으로 만드는 시대이지만), 평범하고 표준적인 캐릭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타쿠 문화와 모에 코드의 확산은 '마호코' 같은 히로인에게 불리하게 작동했다. 만화 <I's, 1997>는 히로인을 속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관계의 흐름으로 제시한다. 반대로 <투 러브 트러블, 2006> <니세코이, 2011>는 속성 소비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하렘 구조의 만화다. 이 구조는 캐릭터를 빠르고 익숙하게 소비하는 대신, 현실성과 개연성을 대가로 내놓았다.
눈 앞의 도파민에 집중하느냐, 서서히 젖는 가랑비 같은 매력에 투신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정답은 없다, 각자 취향이 있는 거니까. <하급생>은 오타쿠 문화의 과도기에 위치한 게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레이코, 마호코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키워드 분석
*신도 레이코(속성형 캐릭터)
선명함, 도파민, 정복감, 호기심, 아이콘
* 모치다 마호코(특징없는 히로인)
현실감, 생활감, 동질감, 편안함, 추억
* -미유키 루트-
<하급생>의 비극은 결단 부족이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욕망에서 시작된다.

절친 아이가 한창 빠져있는 선배는 '소문남' 켄타로.
미유키는 경계를 유지한 채 켄타로를 주시하는데...


미유키를 만난 직후부터 하교할 때마다 어떤 시선을 느낀다.

세 번째 마주치면 주인공이 말을 걸고, 이에 놀란 여학생이 넘어지게 됨.

켄타로가 다가가자 얼굴이 새빨개진다.


말을 더듬다가 후다닥 도망가버린다.
주인공이 얼마나 잘 생겼으면. 딱 한 번만이라도 이런 기분 느껴보고 싶다.

우츠키 아동 공원에서 아이 일행과 만난 주인공.
아이가 넘어진 것을 걱정하는데...






도게자 카페 앞에서 미유키가 트러블에 휘말린다.
때마침 지나가는 켄타로에게 도움을 청하는 미유키.


타쿠로를 빌어 헌팅남을 쳐냈다.


이 일로 미유키가 커피를 얻어먹게 되고, 마스터, 미유키, 아이와의 이야기가 진전되는데...


마스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씀씀이.
알고보니 마스터~미유키, 켄타로~아이의 더블 데이트를 진행했던 것.
응하지 않으면 가을에 한 번 더 제안이 온다.


더블 데이트 후 돌아오는 길.


만약 여름 데이트를 거부하고 가을 데이트를 받아들이면 내용이 달라진다.


다가가는 아이, 경계하는 미유키.


아이의 닭살 행동에 미유키가 깜짝 놀란다.






더블 데이트 이후로, 두 사람의 대화 패턴엔 꼭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너는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지?"
"너는 미유키를 어떻게 생각하지?"

단독 데이트 제안을 하는 켄타로.
처음엔 아이를 생각해 거절하지만,

켄타로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



어차피 미뤄봤자 시간 문제다. 단숨에 들이대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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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를 거듭하는 두 남녀.
미유키는 아이를 떠올리고, 켄타로는 멈추지 않고, 플레이어는 책임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레이코랑 료코랑 미유키랑 마호코랑 약속을 했었지.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들.


다른 히로인과 늦게까지 데이트하고 귀가하면 이벤트가 발생한다.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미유키. 아이와의 관계를 의심하는데...


켄타로와의 관계를 포기할 순 없지만, 아이가 상처받는 것은 싫다.
미유키는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데...

아이가 눈치챈 게 아닌가 의심하는 미유키.

켄타로는 우연히 대화를 엿듣게 되는데...








귀갓길, 뻘쭘한 나머지 선배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다.
되돌아가기엔 불가능한 상황까지 온 걸까.






아이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태도가 나날이 서먹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 게임에서 가장 아픈 대사는 상대를 배려하는 말이다.


여기서 멈추는 게 무리라는 걸 주인공도 잘 알고 있다.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보인다. 잘 됐으면 좋으련만.


교정을 나오다가 하루히코가 작업거는 장면을 목격한다.

켄타로를 험담하는 하루히코.





연애 사건은 둘 사이의 감정으로 끝날 수 있지만, 사회적 선언은 되돌릴 수 없는 기록이 된다.
이 순간부터 미유키는 감정이 아니라 '선언'으로 살게 된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예를 들면 아이라던가.




갈등도 긴장도 없는 평온함, 그래서 더 위험하다.

드디어 러브호텔에 온 두 사람.


헤어진 직후,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는 미유키.
미유키는 무너지고, 켄타로는 당황한다.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흔한 연애물이라면 이건 "남자가 잘못했으니 책임져"처럼 들린다. 여기서는 다르다. 미유키는 이 말을 '공격'으로 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문장은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전핀이다.

이 장면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하는 장면이 아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 파괴되서 힘들다는 선언에 가깝다. 미유키의 말은 마치 비명처럼 들린다.

미유키는 나쁜 짓을 해서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좋은 짓(관계 회복)을 하려 할수록 자기 자신이 더 싫어진다. 왜냐하면 이 행동 자체가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아이를 '우리가 사귀는지 모르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가 되어버린다. 즉, 미유키에게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우정이 아니라 증거인멸이다. 이 한 줄이 미유키를 '죄책감 캐릭터'에서 자기 윤리로 자기 자신을 처벌하는 캐릭터로 끌어올린다.

그러면 결국 남는 건 "나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판결문이다. 그래서 이 대사는 "구해줘"가 아니라 "나 대신 결론을 내려줘"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 본다. 사람은 자기가 만든 지옥에서 혼자 판결을 못 내릴 때가 있고, 그때 타인의 말 한 마디가 '법'처럼 느껴진다.

켄타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를 2개의 칼날로 바꿔 보여준다. 내가 참고 살든지, 아이가 상처받든지. 이 말은 대단히 잔인하다. 미유키를 다독이지 않고, "너는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를 확정해버리기에.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미유키가 '무사히 해결되는 루트'를 꿈꾸지 못하게, 거짓 희망을 잘라내는 말이기도 하니까.
<하급생>의 무서움은, 동시공략을 오래 끌어도 시스템이 겉으론 멀쩡하게 굴러가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딱 이 순간만, 시스템이 침묵으로 숨겨온 진실을 캐릭터의 입으로 폭로한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는 이미 둘 다 가지려는 선택을 '일상 운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미유키의 죄책감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좋은 마음이 남아 있어서' 생긴다. 인간이 무너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라리 악인이면 편하다. "그래, 난 나쁜 사람이야" 하고 끝낼 수 있으니까. 미유키는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진짜였기 때문에 거짓말이 더 잔혹해진다. 이 씬의 감정은 단순한 불륜이나 삼각 관계가 아니라 '연민이 책임으로 변하는 순간' '선의가 족쇄가 되는 순간'이 돼버린다.

"응...... 아마, 친구로도 있을 수 없겠죠." 이 말은 "헤어지자."가 아니다. 더 무섭게 말하면, 아이-미유키 관계 자체가 복구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체념의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는 것. 즉, 파국은 '결정'이 아니라 '진행'의 누적이 만든 도착점이다. 그래서 이 장면의 무너짐은 단순한 연애 드라마를 넘어,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장면"이 된다. 미유키가 잃는 건 사람 한 명이 아니다. 미유키라는 인간을 유지하던 구조의 상실. 즉,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정신없이 우는 미유키' 이벤트에서 미유키는 자기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구조를 말로 정확히 설명한다. 죄책감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 윤리로 자기를 심판한다.
대부분의 연애게임에서 호텔은 '관계의 보상'이다. 좋아했고, 노력했고, 루트를 탄 결과로 주어지는 트로피 같은 것. 그런데 하급생은 반대다. 여기서 호텔은 보상이 아닌 계산서다. '원해서' 갔다기보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이 사라진 장면이다. 그래서 호텔 직후 미유키의 무너짐은 '갑자기 멘탈 나감'이 아니고, 시스템적으로는 '정산 타이밍'이 온 것에 가깝다.
<하급생>의 잔인함은 플레이어를 직접 심판하지 않는 점에 있다. 대신,
` 오래 미룰 수 있게 해주고
`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 오래 속일 수 있게 해주다가
마지막에 미유키의 입으로 말하게 만든다. "이제 더는 안 돼."
그래서 이 씬은 처벌이 아니라 현실성이 강제되는 순간이다.




<하급생>은 가끔 진실을 숨긴다.
'지금 필요한 말'이 관계를 유지시킨다는 걸 알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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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히코네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티나와 팀이 보이지 않는다?





https://youtu.be/lmRkTjSCKiI?si=mydvA5X--Z4y8vVC

몰라보게 성숙해진 아이.



미유키의 근황을 아이가 아니라 미노루에게 들은 주인공.
전에는 미유키 얘기를 잘만 했는데,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켄타로네 집에 와서 청소해주는 미유키.
투덜거리면서도 다 해준다.


https://youtu.be/JfdEeMCiQRA?si=loJDquQ6qTiX8P7d
이 음악은 기쁨을 연주하지 않는다. 감정이 흘러넘치지 않게 막고있을 뿐이다.

켄타로와 딱 붙어 애정어린 말을 속삭인다.











먼저 주인공을 짝사랑한 건 아이였다. 아이는 '연애의 진입장벽' 대신 '연애의 시작점'에 위치한다. 아이는 순진하고, 먼저 다가오고, 따뜻함을 겸비했다. 하지만 그 순진함이 취약점이다. 더블 데이트 이후 주인공은 두 사람과의 만남을 이어나간다. 플레이어가 아이만을 선택했다면 '스쳐지나감' 이벤트는 증발한다. 동시 공략에 길들여진 플레이어는 양쪽 모두를 선택한다.
아이 루트의 핵심 정서는 '기쁨과 불안'이다.
` 선배랑 가까워져서 좋아요.
` 근데 미유키가 이상해요.
` 이게 맞나요?
비극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우유부단의 누적에서 발생한다. 별 생각없이 행동한 결과가 두 사람의 파국을 초래한다. 플레이어는 아이-미유키 루트를 번갈아 갈아타면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동시공략은 쾌락이면서 동시에 자기혐오를 생산한다. 게임은 플레이어를 꾸짖지 않지만, 내 마음 속 한 켠에는 죄책감이 남았다.
많은 연애게임은 이런 소재를 사용하지 않는다. 연애는 엄연한 상품이다. 현실의 어두운 감정은 철저히 배척하고, 성적 판타지를 추구한다. 이 루트는 판타지가 없다. 도덕도 없다. 플레이어는 감정의 마찰을 끝까지 따라간다. 미유키 엔딩이 평온해 보이는 이유는,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유키 엔딩도 봤고, 더 얘기할 건 없을까?
<하급생>은 또 하나의 장치를 숨겨두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켄타로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펜던트가 있다. 왜 갖고 있는지는 불분명한데...
나도 모르는 펜던트를 티나가 왜 캐묻고 다니는 것일까.

티나와의 데이트는 매번 이런 식이다. 내가 주도적으로 약속을 잡을 수 없고, 티나가 나를 공략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3시에 다른 히로인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되나... 난감하다.



티나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켄타로.
명색이 보호자 취급이니 어쩔 수 없지.


???


치료제를 가져가면 병이 낫고, 이상한 해프닝이 벌어지는데...




하루히코에게 티나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사실을 지적하는 켄타로.


짧은 키스를 남기고 떠나간다.

주인공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티나가 자책하거나, 주인공을 책망하는 듯한 이야기를 한다.

평범하게 플레이하면 볼 일 없는 문구.
끝까지 정조를 지키면 메시지가 변한다. 세계제일공원으로 오라고?

우주선에 탑승하는 티나와 팀.

티나에게 고백하러 온 주인공에게, 티나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켄타로가 꾸던 꿈이 바로 이것이었다.
시련을 받아 기억을 봉인당한 상태에서 살아왔던 것.



꿈에 나온 사람이 티나임은 명백하다. 티나는 주인공에게 당일 데이트를 제안하지만, 플레이어는 약속이 있어 티나를 거절해야 될 때가 많다. 또한 점집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도 어디에서 티나가 나오는지 힌트조차 알지 못한다.

미하루는 연애를 실패해야 공략할 수 있는 히로인이다. 미하루는 티나와 달리 작중 최고 수준의 인기를 누렸다. 대체 왜일까?
공략에 실패했다면 남은 것은 배드엔딩 뿐이다. 플레이어가 좌절의 늪에 빠진 그 때, 전설의 나무 밑에 누군가가 있었다. 미하루는 플레이어에게 구제 장치와도 같았다. 의도적으로 미하루를 공략하려고 들면, 의외로 고백받기가 어렵다는 점 또한 존재감을 뿜어내기에 충분했다.
미하루는 다른 히로인과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다. 데이트에 껴들어도 잠시 눈도장만 찍고 도망친다. 티나는 다르다.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귀가하면 쪼르르 달려와 행동을 캐묻는다. 티나는 정상 플레이를 처벌하는 존재다. 그녀는 다른 히로인처럼 호감도를 올려 연애를 완성할 생각이 없다. 티나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내가 약속을 잡는 게 아니라 티나가 들어온다.
` 플레이어의 일정을 무시하고 침투한다.
` 플레이어의 공략을 처벌한다.
엘프가 굳이 티나를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티나가 '죄책감을 생산하기 위한 심판'이라면? 충분히 있을법한 얘기다. '사람을 동시에 다루는 죄'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죄책감의 논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하급생>이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이다. <하급생>은 플레이어를 탓하지 않는다. 아이와 미유키의 관계가 흔들려도, 플레이어는 아무런 패널티 없이 사건을 목격한다. 시스템은 벌하지 않는데 죄책감은 남는다. 이런 게임을 만들어놓고 티나가 플레이어를 직접 처벌한다면, 처벌이 엘프의 의도였다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가능성은 있지만, 설득력은 부족해 보인다.
두 번째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다. <하급생>은 동시공략을 허용해도, 반드시 동시공략을 하라고 권유하지는 않는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보이로 살 수도 있고, 끝까지 순애보를 지킬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티나는 기숙사에 나타나 핀잔을 주고, 실망감을 표출한다.
티나는 마치 플레이어를 꾸짖는 것처럼 행동한다. 티나는 일종의 메타 장치와 같다. 문제는 티나가 메타 장치로 느껴지기보다는, "또 튀어나와서 흐름 끊어먹네"를 먼저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티나는 플레이어의 통제권을 강제로 빼앗는다. 약속을 망치고, 루트를 흔들고, 플레이어가 선택하지 않은 감정을 억지로 요구한다. 티나의 '침투'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플레이어가 티나에게 정서적 빚을 진 상태여야 한다. <하급생>의 패착은 티나를 좋아하게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티나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 티나는 주인공의 존재 의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즐겼던 학창 시절이 사실은 거대한 실험실의 통제된 환경이었다면? 주인공이 여성을 주체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감시와 시험의 대상이었다면? 언뜻 납득이 가는 이유다. <하급생>은 복합적인 감정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 게임이었으니까. 이 역시 모든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진 않는다. 어쩌면 당대 연애 게임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추론은 추론일 뿐, 결국은 디테일의 문제다. 의도가 어찌됐든 티나의 묘사가 부족한 건 사실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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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다. <하급생>을 단순히 <동급생+도키메모> 같은 형태로 번역하기에는 이 게임의 정서를 제대로 남아내기 어렵다. 글이 길어진 것도 이런 연유다. 시스템, 캐릭터, 사회적 맥락을 모두 검토해야 비로소 "이 게임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급생>은 플레이어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스템의 침묵 자체가 질문이 된다. 시스템은 동시에 여러 여성과 만나도 비난하지 않는다. 동시에 플레이어를 보호하지 않는다.
<하급생>의 히로인들은 캐릭터성을 과시하지 않는다. 인상은 약한데,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항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항상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종종 어긋나기까지 한다.
앞서 이런 말을 했었다. 만나봤자 짧게 잡담을 나누는 게 전부다. 만남의 내용보다는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다. 이 문장은 현대 연애게임의 사어(死語)와도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 게임은 이렇게 묻기 때문이다.
*이 만남으로 무엇을 얻는가. *이 이벤트는 다음 루트로 이어지는가. *플레이어는 만족했는가.
<하급생>은 묻지 않는다. 딱 한 마디를 제외하면.
"오늘 하루, 너는 누구를 떠올렸는가?"
평가 점수 ★★★★★
<동급생>의 후광에서 벗어나 새로운 브랜드를 개척한 작품. <하급생>은 연애를 이벤트가 아닌 시간의 누적으로 설계했다. 플레이어는 무엇을 '선택했는지'보다 '얼마나 스쳐 지나갔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하급생>은 특이하게도
`동시공략을 "가능하게" 만들어놓고 (문어발 연애)
`동시공략을 "재미있게" 만들어놓고 (일정, 동선, 리스크를 관리하는 전략적 행위)
`동시공략의 "기분 나쁨"을 제거하지 않았다. (동시공략에서 드러난 플레이어의 윤리)
*자유 이동 *시간 기반 만남 *동시공략 허용 *관계의 결과로서의 이벤트
이 구조는 효율적인 공략을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효율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 망설임, 죄책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감각은 elf의 의도였을까. 나는 어느정도 의도한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의도였든 아니든, 결과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의 연애게임은 소비자가 상처받지 않도록 설계됐다. 선택은 의미있고, 보상은 즉각적이며, 실패는 항상 되돌릴 수 있다. 감정은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 이 상품은 소비자 윤리에 충실하다.
<하급생>은 그 이전 시대의 게임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보호하지 않고, 그 결과로 생기는 감정 또한 책임지지 않는다. 조금 정정할 필요가 있겠다. <하급생>이 예전 게임이어서 그랬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돌연변이'에 가깝다. 지금은 엘프가 없고, 연락 수단이 과도할 정도이며, <하급생> 같은 게임은 과거에도 없었다.
<하급생>이 독특한 이유는 '미유키 루트'로 대표되는 강력한 한 방 때문이 아니라, 히로인을 여러 타입으로 깔아두고, 모든 히로인을 '시간 기반 시스템'에 꽂아 서로 다른 감정을 생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한 게임'이 나오지 않았던 거고, 지금 해도 이상한 감정이 남는 이유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게임을 조명하고 싶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연애게임이 더 이상 감당하지 않는 감정을 가장 솔직한 형태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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