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도트 그래픽으로 만든 호러 게임에서 제대로 된 공포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페이스는 그런 내 선입견을 탈피한 호러게임이었다. 코모도어 64를 연상케 하는 비루한 그래픽으로도 이렇게 멋진 호러게임을 만들 수 있다니.
여피 사이코 또한 도트 그래픽으로 만든 호러게임이다.
"페이스처럼 의외로 괜찮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여피 사이코를 13시간 정도 플레이했다. 나사를 조였다 푸는 것 같은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게임이었다. 이 시점에서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2020년 10월 업데이트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할 필요성을 느꼈다. DLC 쪼개 팔기가 흔한 요즘 세상에 무료 확장팩을 배포할 줄은.

확장팩에서 단점을 극복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달리, 9시간을 더 플레이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피 사이코>는 단점을 극복하기보다 장점을 갈고닦는 전략을 택했다. 우선 게임 초반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 이 리뷰는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면접을 보러 간 주인공.




CCTV에 물어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안내에 따라 사장실로 가는 브라이언.




지나칠 정도로 많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킬 더 위치는 또 뭐야?



ID 카드를 받아야 하는데 낌새가 안 좋다.

뭔가 이상한 사무실 안.
희미한 빛을 더듬어 곳곳을 살펴보는데...

누군가가 묶여있다?




카드 하나 찾으려다 죽을 뻔했다.


카드를 넣었더니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브라이언. 보상은 컸고, 포기하기엔 이르다. 몰래 마녀를 찾아내서 제거하는 막중한 임무. '마녀'란 무엇인가? 누가 대체 '마녀'인가? 신트라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인쇄기에 잉크 카트리지를 넣으면,

자원을 제한하여 심리적 압박감을 준다.
호러 게임에서 종종 사용하는 문법.

녹색 불에 다가가면 빨간 불이 들어오고, 좀 더 접근하면 데미지를 입는다. 빨간 불 상태에서 연필을 사용하면 제거할 수 있는데, 무작정 제거하기에는 연필 수급이 어렵다. 마녀의 종이와 같은 맥락.

7층의 미스터리 클럽에서는 VHS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다. 회사 곳곳에 VHS 테이프가 숨겨져 있어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각 비디오는 단순한 도전과제 같은 게 아니라 말로 필설하기 힘든 기괴한 것이 녹화되어 있다. Marta Sosa라는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게임에 집어넣은 모양.

Marta Sosa의 유튜브 채널 :
https://www.youtube.com/channel/UCoPWosoKtOXEFCP9Qmu31dA/videos

여타 호러게임들이 그렇듯이 손전등을 켜도 시야가 상당히 좁다.
대신 서브 퀘스트를 깨면 손전등이 밝아지고 시야가 넓어진다.

<포켓몬스터 금·은, 1999>에서 물가에 말을 걸면 "파도타기를 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뜬다. 그러나 한참 후대에 나온 <여피사이코>는 인쇄기에 말을 걸어도 "잉크 카트리지를 넣으시겠습니까?" 같은 문구가 뜨지 않는다. 즉, 퍼즐을 풀려면 인벤을 열어 아이템을 하나씩 검증해야 한다. '아이템 대입식'이 강요되면 공포는 몰입에서 'UI를 조작하는 노동'으로 바뀌어 버린다.

<바이오 하자드4, 2005>의 퍼즐 파트를 살펴보자.
'6명의 산 제물'이란 힌트를 줬기 때문에 맞추기 쉬울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다. 레버를 움직일 때마다 그림이 두 개씩 바뀌기 때문에, 정답을 알고 있어도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직접 생각해서 풀 수도 있고, 마구잡이로 하다가 풀릴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풀리는 퍼즐이다.
<여피 사이코>의 퍼즐은 다르다. 게임 초반, 마녀의 입술 파트의 퍼즐이 대표적이다. 힌트를 아예 안 준 건 아니지만, 이 게임의 힌트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옅게 표현됐다. <여피 사이코>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대부분의 퍼즐은 상황이 여유로울 때 나오지, 일분일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피 사이코>는 예외가 없다. 위기 상황에서 퍼즐을 풀게 만드는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좀 더 알아차리기 쉬운 퍼즐을 배치해야 했다. 긴박한 상황은 플레이어가 단서를 읽어낼 기회를 차단하고, 무엇이 틀렸는지 판단할 여지를 좁혀버린다.
이런저런 요소들이 겹쳐, 퍼즐이 많은 게임인데도 퍼즐게임으로서의 완성도가 아쉽게 느껴졌다. 단서가 별로 없고, 도망치면서도 빠른 시간 안에 퍼즐을 풀어야 한다. 앞서 신트라넷에서 해야할 일들을 알려준다고 했지만 그건 게임 초반의 이야기. 중반부터 정보를 어디서 얻어야 할 지, 힌트가 뭘 의미하는 건지 플레이어 스스로 생각해봐야 한다. 덕분에 주인공의 막막하고 다급한 심정 만큼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피 사이코>의 장점은 뭘까?
바로 뒷 내용이 궁금해지는 몰입감 있는 세계관과 분위기다. <여피 사이코> 특유의 분위기는 환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지만, 게임이 끝난 뒤 생각할 만한 '당연한 의문들'을 알려주지 않는다.
<리틀 나이트메어, 2017>는 있어 보이는 떡밥들을 투척했지만, 상상력만 자극했을 뿐 사실 관계를 파악할 만큼의 단서를 주지 않았다. <여피 사이코>는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보여줬으나 몇몇 핵심적인 설명이 누락되었다. Executive Edition 버전이 나온 지금도 중요 떡밥들이 해소되지 않았다.

<여피 사이코>는 NEW GAME+를 지원하지 않는다. 읽었던 대사를 스킵할 수도 없다. 분기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모든 엔딩을 회수하려면 엔딩 조건을 찾아보거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데, 공략을 보자니 스포일러에 노출될까봐 두렵다. 멀티엔딩과 호러, 스토리 기반의 게임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평가 점수 ★★★
<여피 사이코>의 퍼즐은 '주제'를 체험시키는 데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불친절이 '학습 가능한 규칙'으로 구조화되지 않아, 의도된 감정 설계인지 단순 미완성인지는 판별이 어렵다. 힌트는 옅고, 상황은 긴박하다.(이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이템 대입을 강요하는 구조는 공포를 짜증으로 변환하는 일등 공신이다. <여피 사이코>의 최대 장점은 '호러 파트'에 기반하는데, 퍼즐이 때때로 '호러'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현상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피 사이코>는 '호러'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VHS는 '게임 바깥의 현실'이 섞이는 순간을 상징한다. 플레이어는 무의식적으로 "이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갖는다. 신트라코프는 기업이다. 회사가 호러의 장소로 변질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항상 감시받는 듯한 느낌'이다. VHS는 CCTV의 한 장면이 되어, 플레이어 뇌리를 강하게 스친다. 공포는 막연한 상상을 넘어 기록이 된다.
마녀의 종이, 잉크 카트리지도 비슷한 맥락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자원 제한은 호러 게임의 전형적인 문법이다. 그러나 <여피 사이코>에선 호러로 느껴지지 않는데, 자원 압박이 '생존의 위기'로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존보다는 짜증이 먼저 밀려오고, 짜증이 반복되면 순응(체념)이 된다. 체념은 회사 생활과 거리가 가까운 감정이다. 브라이언이 그랬듯, 플레이어는 회사에 길들여지는 느낌을 받는다.
호러에서 필요한 건 '순간의 감정'이지 '잘 짜여진 설정'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야말로 호러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골 레퍼토리다. 인간의 이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 모호한 실루엣이야말로 공포가 싹트기 쉬운 토양과 같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막연한 공포가 피어올라,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여피 사이코>는 상상의 존재인 마녀를 진실로 두렵게 만든 게임이다. 두려움, 혼돈, 패닉... 회사라는 무대가 주는 실존감까지. 호러의 팬이라면 할 가치가 차고 넘친다. 팬이 아니라면? 으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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