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보블은 오늘도 오락실 한 켠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의 버블보블 사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락실 유행이 불과 몇 년만에 바뀌는 시대에, 버블보블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90년대 말, 00년대 초반, 말... 심지어 지금도 살아있는 화석이다. 고정형 화면의 플랫포머에, 적을 가둬 무기로 사용하는 방식은 후대의 게임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노우 브라더스> <텀블 팝>이 그 주인공이다.
<팬시 월드, 1996>는 버블보블 클론이다. 앞서 선배들이 그랬듯이, 단순히 <버블보블>을 베껴서는 안 된다. <스노우 브라더스, 1990>는 눈덩이를 굴려 차별화에 성공했고, <텀블 팝, 1991>은 고스트 버스터즈를 연상시키는 청소기 흡입에, 레버를 좌우로 흔드는 테크닉으로 신선함을 주었다. <버블보블>이란 고전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결과다. 그렇다면 <팬시 월드>는 어떤 해석을 내놓았을까.
<팬시 월드>는 <스노우 브라더스>의 눈뭉치와 달리,
적을 가두는 일 없이 적에게 공을 직접 맞춰 쓰러뜨린다.
<버블보블>은 거품으로 적을 가두고, <스노우 브라더스>는 눈을 던져 눈덩이를 만들며, <텀블 팝>은 적을 빨아들인다. 팬시 월드는 공을 직접 던져 대미지를 준다. 적을 모아 일거에 소탕하는 시스템도 없다. 이럴 거면 뭐하러 고정 화면으로 만들었는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악마성> <스트라이커 히류> 등 베낄 게임이 지천에 널렸는데 말이다.
세계를 누비는 컨셉은 마치 <팡> <텀블 팝>을 떠올리게 만든다. <팡>이 나왔던 1989년엔 이렇게 월드 맵을 퉁치고 넘어가도 충분했지만, <팬시 월드>는 무려 1996년작이다. 그 시절의 국산게임에게 <툼 레이더> <슈퍼 마리오 64> <퀘이크>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래도 8년 전 <버블보블>, 5년 전 <텀블 팝>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지 않았나. 벌써부터 실망감이 크다.
애들용 게임인 줄 알았는데 좀 놀랍다.
녹색 병을 먹으면 혼란 상태가 된다. 혼란은 좌우 조작이 바뀌는 상태다. 시간이 지나면 풀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스테이지를 깰 때까지 혼란은 풀리지 않았다. 다른 게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상식 밖의 개념은 반발을 불러오기 쉽다. 결국 중요 포인트는 신 요소가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에 달렸다. 혼란은 패널티로 보기에는 너무 세고, 재미 요소로 보자니 헷갈려서 짜증을 참기 어려웠다. 대체 혼란에 어떤 감동이 있는가.
처음에는 구체가 <스노우 브라더스>의 눈덩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구체는 시간이 지나면 폭발한다. 폭발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구체가 날아오는 궤적 및 구체가 놓여있는 곳'은 출입 금지 지역이다. 그러니 화면이 넓어도 막상 안전한 곳이 별로 없다. 여기서 졸병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스노우 브라더스>는 눈덩이를 굴려 한 번에 치워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을 취했다. <팬시 월드>는 그런 것 없이, 패널티로 꽉 찬 세계에서 적을 일일히 패죽이는 도전에 직면한다. 뭐 이리 애로사항이 많담.
<팬시 월드>는 대량 소탕이 불가능하다. 무적기나 필살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적이 떼거지로 달려들면 피할 길이 없다. <스노우 브라더스> <텀블 팝>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팬시 월드>의 시스템은 <팬시 월드>의 레벨 디자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대체 뭘 보고 베낀 건지.
이번엔 클리어 특전을 볼 차례다.
사실 이게 <팬시 월드>의 유일한 메리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일러스트를 보여줄 거면 제대로 보여주지, 꼭 메롱하는 사진을 붙여야만 했나. 참 이해 안가는 심보다. 여기까진 그렇다 치는데 이미지가 너무 낯익다. 두 번째 사진(파란 머리)을 봤을 때까진 확신이 들지 않았는데, 세 번째 사진을 보고 무릎을 딱 쳤다.
이목구비가 매우 유사하나 표절이라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구도까지 베끼면 빼도박도 못한다.
약간 바꾸면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점점 역겨워지기 시작한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이 시절의 국산게임들은 저작권 개념이 희미했다. 90년대 한국은 표절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늦은 출발을 감안하면 아예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지만...
2021.07.21 - [게임 리뷰] - 퀴즈 6000 아카데미 (1994)
개성없는 시스템, 장르 해석 실패, 표절. <팬시 월드>의 부정적 키워드는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도 <팬시 월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레벨 디자인이다. 무슨 놈의 레인지 유닛이 이렇게 많은지...
<스노우 브라더스> <텀블 팝>은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았다. 화면 끝에서 끝까지 공격이 닿는 적들은 극히 드물고, 원거리 유닛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팬시 월드>는 원거리 유닛이 사방에 널렸다. 한 방에 죽는 게임에서 전방향 원거리 공격에 대응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팬시 월드>는 <스노우 브라더스>처럼 무적판정으로 피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즉, 임기응변이 불가능하다. <팬시 월드>는 암기가 필수적인 게임이며, 성취감(적절한 보상)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작하자마자 점프 안 뛰면 죽는 스테이라니, 글을 쓰면서도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녹색 토끼는 창을 던지고, 멜빵 강아지는 엉덩이에서 뼈다귀를 발사한다.
<텀블 팝>의 소스를 그대로 쓴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평가점수 ★
유니코는 장르에 대한 이해도 없이, 겉보기에만 신경 쓴 게임을 만드는데 급급했던 것 같다. 이렇게 실속없는 게임은 오랜만에 보았다. 전투는 제대로 된 보상 없이 암기를 강요하고, 아무 생각없이 배치된 원거리 유닛은 플레이어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든다. 이런 건 게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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