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전자는 80년대 후반부터 게임을 만든 관록있는 회사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게임물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선아전자공업(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선아전자라는 이름은 생소해도, 하드 헤드(짱구박사)를 해본 사람은 제법 많을 것이다.
고우영의 만화 <짱구 박사>가 연상되는 작품.
80년대 말, 퀴즈 프로 붐을 타고 아케이드 퀴즈 게임이 범람한다. 그중엔 코나미, 캡콤 등 이름난 게임회사들도 보인다. 퀴즈는 제작이 쉽다.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확장성이 극도로 낮은 장르이기도 하다. 80년대 일본의 유행어를 한국인이 무슨 수로 맞추겠는가.
그 시절 오락실은 한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산 게임은 커녕 한글화조차 보기 힘든 시대다. 사람들은 글을 몰라도 상관없는 액션 게임에 열광했고, 수입업자들도 굳이 한글화에 목맬 필요가 없이 재미있는 액션 게임을 가져왔다. 몇몇 게임이 번역되긴 했으나, 퀴즈 게임의 번역은 특히 어렵다. 대사량도 많고, 현지화에 손이 많이 간다. 따라서 국내에 소개된 퀴즈 게임도 매우 적은 편이다. 이런 상황이니 선아전자가 도전할만 하지.
첫 화면부터 떡하니 등장하는 손오방. 이쯤되면 그냥 패러디로 봐야될 것 같다. 사실 80-90년대는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었다. 게임산업의 선두주자였던 일본조차 표절에서 자유롭지 않다. 예를 들면,
<아웃 런, 1987> - 페라리 엠블렘을 그대로 씀
<메탈 기어, 1987> - 표지 디자인 표절(영화 터미네이터), 메인 테마곡 표절 논란 (1974, 게오르기 스비리도프의 클래식 음악)
<은하임협전, 1987> - 메종일각, 건담, 내일의 죠, 람보, 고질라, 우주전함 야마토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단도용이 존재
<골든 액스, 1989> - 영화 런던의 늑대인간에서 나온 늑대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씀
<시노비, 1989> - 마블, DC의 캐릭터가 적 유닛으로 등장
<남1975, 1990> - 영화 풀 메탈 자켓의 씬을 트레이싱 하듯 따서 사용함
<월드 히어로즈, 1992> - 스파2의 여러 컨셉을 차용했으며 패러디 요소가 너무 많다
<호혈사일족, 1993> - 스파2의 뉴트럴 포즈, 기본기 스프라이트를 가져옴
가장 잘 나가던 일본 게임조차도 이랬었는데 94년 한국은 어땠겠는가. 개개인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려면 그만큼 사회가 발달해야 하는데, 급속도로 커진 경제 규모에 비해 사회적 의식이 받쳐주지 못한 시절이었다.
손오방이 나오는 장면, 이 구도를 기억해두자.
아카데미에서 퀴즈 훈련을 받아 졸업한다는 컨셉.
문제는 최대 4지선다이며, 정답을 맞추면 빨간펜으로 채점을 해준다.
각 라운드가 끝나면 '매우 잘함, 잘하는 편임' 같은 평가를 받는다.
이 정도면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라 패러디로 보이지만...
다음은 KONAMI에서 제작한 <퀴즈 학문의 권유, 1993>라는 게임이다.
교사로 보이는 건물 앞에 내가 고른 캐릭터가 서있다.
교사가 문제를 내고 4지선다로 진행되며, 정답을 맞추면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된다.
각 라운드를 마칠 때마다 채점을 해준다.
짧막한 멘트와 함께 '열심히 해요' 평가를 받았다.
<퀴즈 6000 아카데미>는 <퀴즈 학문의 권유>의 구도와 게임 스타일을 완벽하게 카피한 게임이다. 다른 장르였다면 사람들이 눈치챌 수도 있었겠지만, <퀴즈 학문의 권유>는 언어 문제로 국내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말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퀴즈 6000 아카데미>는 주사위를 굴려 1~3칸을 이동하는 방식이다. 그나마 표절이 아닌 포인트...
표절 얘기는 미뤄놓고 게임 내용을 살펴보자.
아는 게 많아서 대머리가 된다니 거 말씀이 심하시네.
<퍼플 레인, 1983>은 마돈나가 아닌 프린스의 곡. <퀴즈 6000 아카데미>가 94년작 작품이니, 거의 10년 전 얘기를 퀴즈에 집어넣은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가. 그땐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유행이 번지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 외국 여행은 부자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규제로 인해 수출입도 제한적이었다.
80년대 대중문화를 선도한 아이콘이자, 대중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 대한민국, 1983>은 가장 유명한 건전가요다. 군사정권의 비호 아래 생겨난 건전가요는, 창작자의 자유를 억누르면서 정권을 찬양하는 정치적 성격이 뚜렷한 곡이다. 따라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게 일반적이나, <아!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인기를 끌어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즘은 태극기 집회에 쓰인다고 한다...)
전국민이 다 아는 유명 건전가요.
시대상과 가사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가수 본인도 와닿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
정수라의 동명의 곡을 패러디한 <아, 대한민국...>은 음악사전심의제도를 거스른 최초의 앨범이다. 이 앨범은 헌법재판소에서 전원 위헌 판결을 끌어내는 시발점이 된다. 예전에는 음악을 검열하여 가사를 수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태지의 시대유감도 마찬가지였다. 가사가 불온하다며 권고 판정을 받자, 서태지는 가사를 전부 제거하고 발매하는 대 사건을 일으킨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음악사전심의가 없어지고, 사전심의제도가 개정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질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 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 거리는 매춘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질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질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질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쫒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질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질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질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질 않나 우린 너무 평화롭게 살고 있질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
당시 어린이들은 다 맞추는 문제.
나머지 셋은 진짜 안경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영혼>은 90년대 초반을 휩쓴 로맨스 영화.
도자기 씬이 가장 유명하다.
졸지에 아동만화가 된 <시티 헌터>,
제작자가 아동만화로 된 판본을 본 모양이다.
<닌자 거북이>는 80년대 미국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
<닌자 거북이>의 첫 번째 TV 애니메이션이 바로 <거북이 특공대>였다.
황영조의 막판 스퍼트는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널 사랑해>는 신효범의 곡.
변진섭은 80년대 후반에 발표한 2장의 앨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가수다.
김동화가 순정만화 작가라는 걸 이 게임을 통해 배웠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을 일반 상식 문제.
휘트니 휴스턴은 영화 <보디가드>에 출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OST 앨범을 남겼다.
앨범상, 팝 가창상을 제외하니 정답은 뻔한 것.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영화 <보디가드>의 마지막 씬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공항에서 달려갈 때의 설레임이란.
시대를 타지 않는 문제.
금메달을 따고 도핑이 적발되어 더 유명해진 남자.
니들은 머리 안 빠질 줄 알아?
항공 붐을 일으켰던 영화 <탑건>.
이 영화의 성공으로 톰 크루즈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한국도 항공 붐에 편승했는지 <파일럿>이라는 드라마로 화답했고,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유명한 코에이도 항공사 경영 게임 <에어 매니지먼트, 1992>를 만드는 등 여러모로 엄청난 파급력을 행사한다.
헨리 토마스 :
: <E.T.>의 주연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아역 배우였다.
맥컬리 컬킨
: <나 홀로 집에> 주연을 맡아 엄청난 히트 상품이 되었다.
당시 3M(마이클 조던, 마이클 잭슨, 맥컬리 컬킨)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
주디 갈란드
: <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한 배우. 영화, 뮤지컬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낸 배우 겸 가수.
<오즈의 마법사, 1939>는 반 세기를 훌쩍 넘긴 고전 영화. 고전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오랜 기간 사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나도 90년대에 TV에서 본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은 어찌나 감탄이 나오던지.
새삼 1994년이 얼마나 오래 전 일인가 실감하게 됨.
일본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계은숙.
<퀴즈 6000 아카데미>의 백미는 성경 문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에덴의 뜻은 무엇인가? 하와의 뜻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직업은 무엇인가? 요한의 직업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죽인 로마 왕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죽은 언덕은 어디인가? 랍비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
등 일일히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 관련 문제가 대체 몇 갠가. 게임 내에서 본 성경 문제만 10개가 넘는다. 아무리 유명하다지만 성경 문제를 지나치게 남발한다. 모세, 베드로처럼 대중적인 인물이면 모를까, 골고다 언덕, 사울 왕, 가인(카인) 같이 기독교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문제를 남발한다. 이럴 거면 성경 퀴즈라고 아예 못박지 그랬어.
바캉스 화면에서는 나름대로 섹시한 장면을 넣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걸 원하면 오락실에서 <포켓 걸, 1987>이나 <갈스패닉> 시리즈를 했겠지.
드디어 엔딩!
평가점수 ★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외적 요인이다. <퀴즈 6000 아카데미>는 <퀴즈 학문의 권유>를 구도부터 게임 스타일까지 두루 카피했기 때문에, '포스터를 도용했다', '음악을 무단으로 갖다 썼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첫 화면에서 등장하는, 이 게임에 저작권을 주장하며 무단 복제하지 말라는 글귀가 새삼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내적 요인이다. <퀴즈 6000 아카데미>는 시종일관 같은 구성을 반복한다. 주사위를 굴리고, 퀴즈를 풀고, 과목을 고른다. 게임에 새로움을 가져다 줄 어떤 변화도 없다. 이걸 한 시간 넘게 한다. 미치겠다. 퀴즈의 질은 말해 뭣하겠는가. <데이트 퀴즈 GO! GO!>보다는 나아도, 유독 성경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성경은 넌센스, 정치, 연예 같은 카테고리로 보기 어렵다. 지금이 중세 시대는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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