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은 지금 같은 PC게임의 위상이 없었던 때였다. 많은 개발사들은 콘솔 게임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아케이드 게임의 그래픽 표현력은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PC 게임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준 게임들도 있었지만, PC 진영의 라인업은 상당히 빈약해 보였다.
이 시기의 국내 게이밍 환경은 영 좋지가 않았다. 80~90년대 게임시장은 일본이 꽉 쥐고 있었지만, 당시 한국은 일본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다른 나라가 패미컴, 슈퍼패미컴, 플레이스테이션을 보며 환호할 때, 한국은 2002년 이후에나 제대로 된 게이밍 환경이 갖춰졌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콘솔 보급률이 낮았다. 정발은 출시된 지 몇 년 뒤에 나왔고, 그마저도 비한글화 타이틀이 대다수였다. 월급으로 40만 원 정도(1992년 기준)를 받았으니 보따리장수가 파는 게임들이 얼마나 비싸게 느껴졌겠는가.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요즘 AAA급 게임 가격(7~8만원)은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다.

90년대만 해도 일본어는 커녕 영어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최신 게임을 하려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다. 게다가 최신게임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출시 몇 년 뒤에 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 1990년대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장르의 확립, 장르의 분화,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진 격동의 시대. 그런데 명작들이 쏟아지면 뭐 하나. 한국에선 그런 게임들을 즐기기가 무척 어려웠다.
오늘 소개하는 <범피의 아케이드 판타지>(이하 범피) 또한 출시 몇 년 뒤에 늦깎이로 즐기던 게임이었다. 90년대 중반, 삼촌이 쓰던 486을 물려받으면서 나의 PC게임 역사가 시작되었다. <범피>는 물려받은 컴퓨터에 기본으로 탑재된 게임들 중에 하나였다. 삼촌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불법 복제 게임이었으리라. 어쨌든 용돈이 적은 나로서는 그런 공짜게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범피, 1992>는 <범피, 1989>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전작에 비해 뚝뚝 끊기는 구간들이 없어져 게임 속도가 빨라졌다. 쾌적함이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1992년작을 추천함.

범피는 정해진 순서로 진행할 필요가 없다.
가장 어려운 스테이지부터 도전해도 무방하다.

모든 음식들을 다 먹고 골인지점에 도달하면 클리어!
설명만 보면 쉬울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녹색 막대기를 밟으면 막대기의 크기가 줄어든다.
여기까지는 튜토리얼이나 마찬가지.


직관적인 퍼즐이라 이해하기 쉽다.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고작 챕터2일 뿐인데 벌써 어렵다.

내가 아는 선에서, 당대 아케이드, 가정용 게임을 포함해서 <범피> 같은 게임은 없었다. 독특한 게임 플레이와 재미있는 퍼즐, 은근히 중요한 컨트롤, 거기에 묘한 효과음까지. 100개가 넘는 스테이지는 게임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챕터의 마지막 스테이지로 갈수록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챕터 2~3 정도만 돼도 풀리지 않는 퍼즐들이 속출한다. 챕터 9까지 가려면 갈 길이 먼데 왜 벌써부터 막히는 것일까, 난이도를 단계적으로 높였으면 좋았을 것을. <범피>의 퍼즐은 못 풀 수준이 아니며, 도중에 죽어도 패스워드를 통해 초반 스테이지를 건너뛸 수 있다.
평가 점수 ★★★★
아케이드, 콘솔 진영에 밀리던 PC 진영에서 모처럼 나온 잘 만든 게임. 엔딩과 레벨디자인에 대해서는 미묘한 시각을 감추기 어려우나, 원작의 독특한 게임플레이를 계승하면서 실속있는 분량을 채워넣었다. 다소 밋밋한 느낌의 전작을 훨씬 세련된 형태로 다듬고, 당대 주류 게임들과 비교해도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 양질의 게임에 목마른 PC 게이머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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