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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천수의 사쿠나히메 (2020)

by 눈다랑어 2021. 7. 16.

현실 농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게임 속 농사는 한 번쯤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 맘에 파밍 시뮬레이터, 스타듀밸리 같은 게임들을 플레이해왔지만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동안의 농사 게임들은 대량 생산에 집중하거나 농사를 자원을 얻는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 오롯이 농사에만 집중한 게임은 찾기 힘들었다.

 

때마침 들려온 농사짓는 RPG의 출시 소식, 제작은 *동인게임 서클 에델바이스가 맡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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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게임은 코믹마켓에서 출품되며, (여기 나오는 물건들이 으레 그렇듯)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2차 창작물이 많다. 동인게임은 인디게임의 한 갈래이나, 인디게임은 동인게임과 달리 저작권에 민감한 편이다. 물론 에델바이스 게임은 인디게임 범주에 속하긴 하지만.

 

처음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에테르 베이퍼, 2007>를 플레이했을 때였다. 슈팅 가뭄 시기에 등장한 슈팅게임. 동인게임의 퀄리티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지만 오랫동안 에델바이스란 이름을 잊고 지냈다. 그랬던 팀이 이제 54,800원 짜리 볼륨 큰 게임을 만든단다. 감회가 새로웠다.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농사 시뮬레이션, AA급 게임으로서 기대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제 에델바이스는 동인 서클이란 꼬리표를 떼고, 전세계에 이름을 알린 당당한 게임 팀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 https://automaton-media.com/articles/newsjp/20201229-147844/

* 이 리뷰는 PS4판으로 진행했으며,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초반부 스토리

인간계와 신계를 잇는 다리를 인간들이 지친 기색으로 걷고 있다.

그 앞에 이시마루라는 자가 나타나 칼을 뽑아드는데,

 

얼떨결에 인간들을 구한 풍양신 사쿠나

건방진 이시마루를 날려버린 사쿠나.

이 앞은 신의 영역이라며 돌아가라 말한다.

물론 인간들은 곧이곧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꿈, 돈 많은 백수

유산 덕분에 한량 라이프를 만끽하는 사쿠나.

버릇없고 게으른 성격이다.

 

잔치 도중 인간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말았다.

신계에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왜 들어온 거야?

 

말로 좋게좋게 넘어갔더니 쌩까고 들어온 인간들.

문책이라도 당하면 한량의 삶이 박살난다. 어떻게든 해야...

 

정신없이 쌀을 주워먹는 인간들.

사쿠나히메의 발소리를 듣고 급히 도망가게 된다.

 

급하게 도망가다가 등잔을 엎어버린 인간들.

주신에게 바칠 공물들이 싹 다 불타버렸다.

 

사쿠나가 관리를 소홀하게 하긴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애당초 이 지경이 된 건 선을 넘은 인간들 때문 아닐까?

 

잘못한 줄도 모르고 예의범절을 쌈싸먹은 인간.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뭐 이런 놈들이 있나.

 

주신 카무히츠키는 사쿠나와 인간들에게 오니섬을 조사하라고 명한다.

이 정도 처벌이면 관대하지.

 

떼를 써 보지만 소용이 없다.

 

오니섬으로 가는 길.

 

투정부리는 사쿠나히메

킨타 말도 맞는 말이지만 왜 이리 사쿠나에게 감정이입이 되던지. 에도 시대의 백성들은 높은 세율을 못 이겨 어미가 산아를 목 졸라 죽이는 일들이 성행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면 인간들의 행동도 이해가 간다. 어차피 인간계로 돌아가봤자 죽을 게 뻔한 삶. 신계를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이런 배경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

 

인간들로는 오니를 상대할 수 없다.

먹을 게 없어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

인간들을 채집 보내자니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풍양신이 나서야 할 때.

 

명색이 풍양신이지만 쌀농사 초보다. 일을 해봤어야 알지...

사쿠나는 전쟁신과 풍양신의 자식으로, 농사를 지어 힘을 기를 수 있다.

"쌀, 만든다. 사쿠나, 강하게 된다. 입니까?" 미르테의 말은 게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볍씨를 날려먹은 타우에몬, 내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벼 농사에 관한 지식 빼고는 실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캐릭터.

킨타(꼬맹이)는 행동거지는 별로여도 일은 열심히 한다. 그에 비하면 이놈의 자슥은...

 

탄 덩어리를 먹는 열악한 오니섬 생활.

어서 먹을 걸 구해와야 할텐데.

 

사쿠나의 말은 타당하지만 명색이 풍양신인데 농사지식이 없으면 쓰나.

 

벼 농사는 복잡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기비
논갈기
볍씨 선별
육모
모내기
묘대기
1~3차 분얼기
출수기
등숙기
수확
볏단 걸기
탈곡
도정 

전문용어들이 쏟아지는데 뭐가 뭔지 알 턱이 있나.

혼란스럽지만 용어를 잘 몰라도 엔딩까지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게임에서 즐기는 농사 활동

모를 손수 심어야 하고 추수도 일일히 해야하며 도정도 정성 들여 빻아야 한다. 농사는 복잡하지만 과정은 간소화됐다. 이 게임에서 하루는 1개월, 즉 6일만 플레이해도 6개월치 플레이가 끝난다. 현실처럼 물길을 따로 파지 않아도 되고 잡초를 걷어낸답시고 왠종일 붙어있지 않아도 된다. 실제 농사 마냥 허리도 안 아프고.

 

이것저것 시험하면서 나만의 답안지를 작성하자.

"내 벼가 잘 성장하고 있나" 확인해볼 수도 있다. 벼는 향, 양, 맛, 경도, 찰기, 윤기의 여섯 가지 능력치가 있으며, 어떤 능력치를 추구하냐에 따라 농사 방향성이 바뀐다. "올해는 이렇게 해보자." "작년엔 XX가 창궐했으니 저렇게 해보자." 이런 식으로...

 

바깥에서 얻은 재료를 비료로 활용할 수 있다.

농사 파트와 액션 파트의 적절한 분배가 중요.

 

탈곡 과정, 벼에서 손수 이삭을 벗겨낸다.

 

단순 작업을 커맨드 입력과 다양한 시점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했다.

 

도정까지 마무리해야 한 해 농사가 끝난다.

벼농사 성과에 따라 사쿠나가 영구적으로 강해진다. 열심히 키운 만큼 액션 파트가 쉬워지므로 동기부여가 잘 되는 편. 그렇다면 해충 피해 등으로 벼농사를 망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오르면 올랐지, 농사를 망쳤다고 해서 스펙이 떨어지진 않는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농사 파트는 복잡한 농사 지식 없어도 성장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농사를 잘 짓고 싶다면 피드백을 왕성하게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게 좋다. 정 안 되면 공략 사이트를 보는 방법도 있다. (실제 벼농사 지식을 배워서 게임에 써먹을 수도 있다.)

 

이 게임의 농사에서 실패라는 개념은 없다.

상세 탭에서 어떤 점이 미흡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신경쓸 것도 많고 용어도 복잡하긴 한데, 잘 몰라도 성장할 수 있다.

농사를 망쳐도 반드시 사쿠나가 성장하도록 만든 게 참 좋았다.

 

농사는 매 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현실의 단조로움을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사쿠나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지만 농사 지식은 젬병이다. 플레이어는 사쿠나처럼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 지식을 쌓아가야 한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만큼 매 해 농사가 새롭게 느껴진다. 좀 알 것 같다가도 새로운 과제가 나타난다. 농사 재밌긴 한데 참 어렵네~~

 

새롭게 추가되는 시스템들

농사 X년차가 되어 볍씨 선별 컨텐츠가 해금됐다.

어떻게 선별하느냐에 따라 품질이나 수확량이 크게 달라짐.

 

밥만 축내지만 귀여운 걸 어떡하나

카이마루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밖에서 동물을 데려올 때도 있는데 하나같이 쏠쏠한 도움이 되는 편. 다만 고양이는 전혀 쓸모가 없다. 쥐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역시 하드웨어는 참 귀여운데 소프트웨어가 별로인 동물 답다. (야옹이 혐오 아님)

 

오리를 데려오면 농사가 한결 수월해진다.

 

잡초를 막아주고 있는 오리들

이런 것들이 얽혀, 매번 똑같아 보이는 농사가 매 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끔 디자인됐다. 익숙해질만 하면 새로운 게 또 나온다. 큰 변화는 아니어도 소소하게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액션 파트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간단한 조작으로 시원시원한 액션이 가능하며, 패링이나 에어콤보 등 격투게임에서 따온 것 같은 개념들이 많다.

 

블로킹 시스템 (스트리트 파이터 3 서드 스트라이크, 1999)

공격이 발생했을 때 방향을 앞이나 아래로 밀면 공격을 쳐내는 것을 블로킹이라 한다. 다만 블로킹이 만능은 아닌데, 지속시간이 짧아(1/12초) 가드가 무방비로 열리기 쉽다. <천수의 사쿠나히메> 역시 블로킹 같은 시스템이 있는데, 제작자 트위터에 가보니 <길티기어 Xrd, 2014>를 즐기는 걸로 보아 아마 격투게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 아닌가 추측된다.

 

상대를 날려 충돌 데미지를 주거나,

연속기를 시전하는 것이 액션 파트의 즐거움이다.

 

전투에 이로운 소모성 아이템이 없다.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RPG에 흔히 보이는 포션 하나 없는 게임이다. 그럼 어떻게 체력을 회복해야 할까? 자연회복 옵션이 붙은 식단을 짜면 된다. 식사를 하게 되면 만복도가 쌓이며, 만복도가 유지되는 한 체력재생 효과를 얻는다. 그 외에도 식사를 하면 능력치나 내성에 보정이 붙는 등 여러 효과가 있다. 

 

그냥 밥 먹는 장면만 딸랑 나오면 식사 장면이 밋밋했겠지만, 식사 도중에 배경 설정을 설명해줄 때도 있다. 대화를 보고 싶어 빠르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대화 패턴이 많았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간단한 필살기 커맨드

자신만의 콤보 루트, 전투 패턴을 만드는 재미가 있다. 이 게임을 처음 접할 때만 해도 전투 파트가 실망스러웠는데, 하면 할수록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개옷을 이용해 높은 지대를 올라갈 수 있다.

 

맵 곳곳에 아이템이 숨겨져 있고 자잘한 목표가 많다.

탐험도를 높이려면 서브 미션을 깨야 하는데, 맵 곳곳에 숨겨진 아이템들을 찾아야 달성되는 미션이 많다. 하지만 몇몇 맵은 구조가 복잡해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물론 여우가면을 쓰면 위치를 얼추 알 수 있지만, 탐색이 끝난 곳 한정으로 미니맵을 표시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우측 상단에 미니맵이 보인다 (슈퍼 메트로이드, 1994)

아직 못 가본 곳이나 숨겨진 곳은 탐색하기 전까지 미니맵에 표시되지 않는다.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서브 목표들을 많이 깨야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 기능이 정말 그리웠다. 특히 트로피 딸 때.

 

싱글 게임은 공략을 참고하지 않아도 클리어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천수의 사쿠나히메>의 레벨디자인은 썩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벼 농사라는 소재가 지역사회에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게임도 즐기고 지역사회에 공헌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수의 사쿠나히메 x 학생 벼농사 프로젝트 2021년 5월 시작.

쌀 산지로 유명한 니가타 학생들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확한 쌀을 사쿠나히메에게 봉납!

(출처 : https://abio.jp/blog/9284/)

 

 

 

 

평가 점수 ★★★★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멋진 게임이지만 완벽하진 않다. 인간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오니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줬으면 했다. 스토리의 몇몇 액션 연출은 우스울 정도로 허접하게 표현되었다. 이 게임을 거의 5년여에 걸쳐 만들었을 정도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 게임만큼 벼 농사를 제대로 구현한 게임은 없다. 또한 농사 파트와 전투라는 환장의 밸런스를 이만큼 멋지게 배합한 게임도 없다. 압도적인 재미는 없지만, 쌀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배어나오듯 은은한 매력이 있다.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해준 게임이다.

애지중지 키워낸 벼, 그 벼를 키워낸 땅,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동료들. 힘든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게임이 얼마나 있을까. 대체 뭘 해야할지 몰라 진행이 몇 번씩 막히기도 하고, 꽃피는 사쿠나히메처럼 분량만 길게 늘어놓은 파트도 있었다. 그래도 꾹 참고 끝까지 도전했던 것은 사쿠나히메가 독특하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서구권 유저들에게는 다소 어필하기 힘든 게임이지만, 동아시아인으로서, 오랫동안 농경 사회를 유지해온 한국인으로서 애착이 많이 가는 타이틀이다.

 

플래티넘 따고 농사 짓고 싶어서 2년 더 달렸다.

클리어 후 즐길 거리가 별로 없는 것이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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