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처음 접한 사교육은 피아노, 태권도 학원이었다. 요즘 태권도 학원은 아이들을 타깃으로 제 2의 어린이집 같은 노선을 밟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변화 덕분인지, 길가에 흐르는 피아노 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태권도 학원 승합차는 곧잘 보게 되는 것 같다. 각종 무술 시범에서 태권도는 빠지지 않으며, 복무 기간 중 단증 따고 전역한 군인들도 여럿 된다.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선정된 지 어연 30여 년, 태권도는 한국인의 생활에 녹아든 운동이지만 정작 태권도를 컨텐츠로서 활용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
영화나 만화 같은 영역은 좀 낫지만, 태권도를 비중있게 다룬 컨텐츠가 별로 없다. 게임은 더욱 심하다. 태권도를 사용하는 캐릭터는 여럿 있었지만 태권도 자체를 심도 있게 다룬 게임은 내가 아는 한 없다.
옛날 옛적에 <왕중왕, 1994>이라는 국산게임이 있었다. 모든 캐릭터가 태권도를 구사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태권도를 쓰는 캐릭터는 소수뿐. 대부분 태권도와 상관없는 공격을 구사한다.
꼭 비디오게임에서 겨루기를 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태권도 소재 게임을 만들지 않더라도 태권도를 게임 속에서 더 제대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인 캐릭터를 넣고 싶을 때 태권도를 찾을 뿐 태권도 자체에 주목하진 않는다. 한국은 PC방 문화가 뿌리내릴 정도로 게임이 일상화된 나라지만, 정작 태권도를 게임에 이식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출시된 태권도 게임조차 다른 나라에서 만든 게임들이다.
태권도 게임의 뿌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때는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권>의 백두산, <아랑전설>의 김갑환처럼 "수많은 캐릭터 중 하나가 태권도를 쓴다더라"가 아니라, 아예 태권도를 중점적으로 다룬 게임이다. 대체 어떤 게임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제작은 <클락 타워>와 <파이어 프로레슬링>을 만든 휴먼이 맡았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떠났지만, 마니아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임을 만들어낸 추억의 회사다.
인게임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다. 태권도 소재인데 일본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점이 신기하다. 또한 인트로에서 태권도의 배경을 알려주는데...
혹시나 해서 한국어와 일본어판을 비교해서 확인해봤으나 동일한 내용이다.
태권로 치고받는 게임을 만들어도 됐을텐데 상세한 배경까지 설명해줄 줄은.
설명을 보면 마치 국내에서 만든 게임 같다.
선수를 골라 평범하게 토너먼트를 즐길 수도 있고,
가상 선수를 만들어 플레이할 수도 있다.
토너먼트를 시작하면 바로 룰을 설명해준다.
ⓐ상대를 넉아웃 시키거나 5번 다운시킬 것
ⓑ제한시간 내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포인트로 승패를 가림
ⓒ적중된 부분에 따라 포인트가 다르다
<태권도>에 왜 허리이하 공격이 없는지, 붙잡거나 던지는 공격이 없는지 설명하는 심판.
만든이가 태권도라는 스포츠를 어지간히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 디테일이 깨알같다.
이 시절에는 튜토리얼조차 없는 게임이 부지기수였다.
게임에 동봉된 매뉴얼이 아니라 게임 내에서 설명해준다는 게 신선했다.
이 게임은 y축으로 이동할 수 있고 y축에 있는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도 있다. (대신 발 방향을 정확히 맞춰야 함) 아랑전설 시리즈에 있었던 라인 이동이 떠오른다.
왼쪽 캐릭터는 등을 졌고, 오른쪽 캐릭터는 몸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이 때 오른발로 공격하면 y축을 견제할 수 있다. 양발을 자유롭게 쓰는 태권도의 성질을 잘 파악한 시스템이다.
<태권도>는 하반신 공격이 없고, 머리 부위와 상반신 공격 두 가지만 존재한다. 따라서 격투게임의 가드 개념과는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격투게임은 ←가 중단(overhead) 방어, ↙가 하단 방어이지만, 태권도에서는 ←가 머리 방어, ↓ 방향을 입력하면 상반신 방어이다. |
방어에 성공하자마자 상대방향 + X or A 키를 누르면 곧바로 반격하는데, 이 게임은 다른 2D 격투게임처럼 *히트스탑이 없기 때문에 반격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반격에 성공한다면 그만큼 리턴도 크기 때문에, 방어를 하면서도 종종 앞 방향을 누르면서 반격 기회를 엿보게 된다.
(*히트스탑 : 공격을 맞추거나 가드시킬 때 경직 프레임이 발생한다. 경직 프레임이 발생하면 보고 반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를 이용한 테크닉이 히트확인이다.)
머리 부분을 많이 맞으면 몸이 휘청거리고, 상반신을 많이 맞으면 체력회복이 멈춘다.
한국어로 하면 한국 캐릭터로, 일본어로 하면 일본 캐릭터로 변경된다. 시합 시작 전에 심판이 경례를 시키는데, 일본어판으로 해도 경례 & 준비를 한국어로 발음한다.
X : 머리 공격
A : 상반신 공격
Y : 연속기
B : 큰 기술
R : 몸의 방향을 바꾸거나 라인 이동을 할 때 씀
L : 페인트 동작
자잘하게 단타로 싸우는 게임이다보니 공방을 주고 받는 심리전이 매우 빠르다.
다른 격투게임 같으면 콤보를 맞는 도중 "기상할 때 뭘 내밀어야겠다" 생각할 시간이라도 있지, 이 게임은 도중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 상대가 노리는 행동을 빠르게 포착해서 거세게 몰아쳐야 한다.
대전격투게임처럼 점프공격도 존재하지만, 근접공방이 매우 빠르게 돌아가는 게임이기 때문에 쓸 기회가 적은 편이다. 점프공격 시동으로 콤보 한 사발 먹이는 게임도 아니고.
체력 상황은 HP 같은 게 없고, 포즈나 걸음걸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스샷처럼 허리를 굽힌 상황이라면 빈사 위기.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캐릭터 이름(TH. KIM) 위에 빨간 불이 들어와있는데, 불이 4개 들어왔으면 4번 다운됐다는 뜻이다. 물론 5번 다운시키지 않아도 K.O. 승을 따낼 수도 있고, 제한시간을 버텨 판정승을 따낼 수도 있다.
국내 대회를 우승하면 세계선수권이 기다리고 있다.
세계선수권의 난적은 일본의 가토 3형제, 굉장히 강하다.
발의 중심이동을 보면 "얘들이 제대로 태권도를 공부했구나" 라는 느낌을 준다.
한국판에서는 한일전이 펼쳐지지만, 일본판에서는 일본 VS 북한이 맞붙는다.
위험했지만 최대한 버티면서 판정승을 따냄.
상대방 스탯이 장난 아니다.
대망의 결승전, 가또 타로 선수와의 대결
타로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등장해서 심판을 날려버리는 타로.
이 인간은 뭐야?
다짜고짜 플레이어를 패기 시작한다. 체력이 깎여 구석에 몰린 채로 시작하는 불리함. 지금까지 감각에 의존해 이겨왔다면 가또 타로를 이기기 힘들다. 기본스탯이 월등하고 반격의 틈이 매우 적다.
계속 깨지다가 엉겹결에 이겼다
스토리에 대한 설명이 없어 가또 타로가 왜 심판을 날려버리고 싸운 건지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충격적인 장면을 넣고 싶어서 그런 걸까?
단체전 모드는 3:3으로 진행된다.
한 판 자체가 상당히 긴데 그걸 3:3으로 진행한다? 글쎄...
하우젠은 냉장고 광고가 생각나 뽑았는데, 써보니 좀 별로였다.
호오크를 뽑을 걸 그랬다. 이름부터 옛 외래어 냄새가 물씬 나는 게 정감이 간다.
야가미, 이용구의 대활약으로 꾸역꾸역 올라갔다.
결승까지 가면 북한의 사씨 형제들과 싸우게 된다.
가또 형제 마냥 스펙이 굉장함.
야가미가 사열을 이겨도 체력회복 없이 싸워야 해서 스트레이트가 어렵다.
결국 하우젠의 삽질 끝에 패배. 몇 번 도전한 끝에 간신히 승리했다.
가상 모드에서는 생성 선수를 육성할 수 있다.
이름, 능력치, 사용하고 싶은 기술을 선택할 수 있음.
도장에서 원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기술 설명을 한 눈에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기술을 다 배우면 사범과 겨루게 된다. 이후 사범을 뛰어넘은 제자가 세계로 뛰어나간다는 내용.
스토리가 없다시피 했던 다른 모드들과 다르다.
<태권도>는 슈퍼패미컴으로 발매되었지만 아케이드로는 출시되지 않았다. 네트워크 대전을 지원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이 게임의 묘미는 대전인데, 정작 대전을 하려면 친구를 집에 초대해야 하는 불편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격투게임 중에서는 아랑전설 시리즈와 약간 유사하지만, 태권도는 강제캔슬, 강제연결 콤보를 요구하는 격투게임이 아니다. 심지어 격투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동권↓↘→ 승룡권 →↓↘ 커맨드조차 보기 힘들다. 기본 공격, 반격, 라인 이동 등을 사용하긴 하지만, 다른 격투게임처럼 필살기를 난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철저하게 기본기로 승부하는 게임인 것이다.
상반신 공격(A버튼)은 ↓로 막는다.
머리 공격(X버튼)은 ←로 막는다.
* 대전 양상
X버튼은 빠른 공격이기 때문에 견제기로도 좋고, 상대 공격 연계에 끼어들기 좋다.
A버튼은 가드를 부수기 좋다. (서서 막을 수 없기 때문)
근접공방이 순식간에 일어나므로 빠른 발동 프레임을 가진 기본기가 중요하다.
중거리에선 백대시로 상반신, 머리 이지선다를 무시할 수 있지만, 연속기(Y버튼)나 강공격(B버튼)를 맞고 다운을 빼앗길 수 있으니 주의.
이 게임은 움직이기만 해도 체력이 조금씩 소모되며, 백대시를 했는데 균형 수치가 낮으면 비틀거릴 수도 있다. 비틀거릴 때 맞으면 곧바로 다운된다. 격투게임에는 스태미너 개념이 없기 때문에, 비록 격투게임 같은 심리전이 있긴 하지만 대전 액션이나 스포츠 게임으로 분류하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2D 격투게임은 상대가 가드를 굳히면 잡기를 섞어 가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 게임은 가까이에서 → + B로 상대를 발로 톡 건드리는 자세를 취한다. 가드불능인 대신 발동이 느린 기술이다. 그렇다면 발동이 빠른 X로 파훼하면 될 것 같지만, 마냥 X를 연타한다면 반격에 당할 수도 있다.
태권도는 가드 즉시 (→ + X) 또는 (→ + A)를 누르면 곧장 반격하는데, 반격을 입력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 보고 반응하기 어렵다. 격투게임의 가드캔슬과 비슷한 개념.
평가 점수 ★★★★
<태권도>는 격투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채로운 필살기, 캔슬, 강제연결 같은 개념이 없다. 가드방식, 퍼니시, 윕퍼니시 같은 개념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돌고 도는 심리전, 가드캔슬 같은 개념은 격투게임과 비슷하다. 스포츠에 격투게임 같은 요소를 대입한 게임이다.
겉보기에는 투박하고 촌스럽게 보이는 게임이지만, 이 정도로 빠른 공방 전환은 뱀파이어 시리즈를 할 때도 경험하지 못했다. 단순한 기술로 초고속 심리전을 펼치는 게임. 상대가 어떤 공격 패턴을 사용하는지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휴먼은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태권도를 잘 녹여낼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포츠 게임이 흥하려면 스포츠 자체가 광범위한 인기를 끌어야 한다. 태권도는 축구, 농구, 레이싱 같은 인기 종목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룰을 일일히 설명해야 한다. 스포츠 게임으로서의 접근성도 부족하다.
대전 게임으로서 흥하려면 아케이드로 발매되어야 했다. 매번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었던 오락실과 집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플레이하는 가정용 게임. 대전을 생각했다면 아케이드 출시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우리는 태권도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태권도를 제대로 다룬 게임은 수십년째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나라가 태권도를 더 인정해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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