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3는 시리즈를 아우르는 멋진 마무리였다.
프랜차이즈의 연이은 성공, 더 이상의 무언가는 없을 듯한 이야기. 역전재판의 플랫폼이기도 했던 GBA는 역할을 마치고 DS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역전재판은 DS판에도 이식되어, 외전 에피소드(소생하는 역전)를 추가함으로써 큰 호평을 이끌어냈다. 역재 123의 설정을 따라가면서도, 나루호도를 보고 싶었던 팬들의 희망을 잘 충족시킨 것이다.
실패를 모르던 역전재판 시리즈의 신작, <역전재판 4>의 발매 소식이 드디어 들려왔다. 팬으로서 나루호도, 마요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러나 <역전재판>의 캐릭터는 <역전재판 3, 2004>에서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정도로 장대한 피날레를 선보였다. 이런 마당에 과연 재출연을 요구하는 게 좋은 일일까?
<역전재판 4>의 설정이 공개되면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트레이드마크를 감추고 애 딸린 아저씨가 된 나루호도. 새로운 주인공 오도로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린 <역전재판 4>, 초동 물량이 역대급으로 팔려나갔음에도 <역전재판 4>에 대한 평가는 차갑다. 시스템 설명은 훗날 <역전재판> 시리즈를 다룰 때로 미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역전재판 4>의 문제점을 나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할까 한다.
* <역전재판 3>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역전재판 4>의 결말에 대한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나루호도 연대기는 끝났다. 시리즈를 이어가려면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했다. 여기까진 동의하는데, <역전재판 4>의 오도로키는 주인공에 걸맞은 푸시를 받지 못했다.
관객들의 시선은 나루호도에게 쏠렸다. 명예로운 승리를 쟁취한 변호사 나루호도는 없다. 뭔 사고를 쳤는지 변호사 자격은 박탈당했고, 살인사건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이미지, 성격, 말투까지 전작의 나루호도와는 딴판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나루호도는 첫 재판에서 위조된 증거를 오도로키에게 넘겨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역전재판 3>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가짜 증거는 범인의 자백을 유도하는 용도로 제시했고, 범인이 미끼를 덥석 물자 이것이 가짜 증거임을 밝힌다. 그래서인지 <역전재판 3>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평가가 썩 좋지 않은 편이다.
<역전재판 4>의 나루호도는 한 술 더 뜬다. 나루호도가 준비한 증거는 조작된 증거였고, 그걸 조작한 것도 나루호도였다. 나루호도는 신참 변호사 오도로키에게 가짜 증거를 쥐어준다. 오도로키는 가짜 증거임을 모른 채 나루호도의 계획대로 재판을 따낸다. 만약 가짜 증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오도로키는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을 터다. <역전재판 3>의 가짜 증거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전설의 변호사 나루호도의 불명예스러운 은퇴. 자신의 변호사에게 가짜 증거를 주고, 그걸 진짜 증거로 믿게 만들어 범인을 잡아넣는다. 이게 정말 나루호도인가? 주인공 오도로키는 주변 인물들에 휘말려 아무런 존재감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루호도가 <역전재판 4>의 진 주인공일까?
나루호도는 에피소드 2, 3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나루호도는 에피소드 1, 4, 5에서 활약하는데, 이 에피소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핵심 중의 핵심 이야기로 꼽힌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은 클라리스 스털링, 90년대 할리우드의 여신이었던 조디 포스터의 배역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한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한니발 렉터'였다.
<양들의 침묵>은 <역전재판 4>과 다르다. 2시간짜리 영화에 고작 16분 나온 한니발이 주인공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물론 앱소니 홉킨스의 연기가 탁월했다는 걸 잊어선 곤란하지만) 호러, 서스펜스 장르의 특징과 딱 맞는 배역인 점도 컸다. 호러는 마음 속에 자리한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장르이며, 법정, 만담, 캐릭터를 내세운 역전재판 시리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역전재판 4>에서 오도로키의 존재감은 병풍 수준이었다. 사건 해결은 가류 검사, 핵심 이야기는 나루호도가 끌어간다는 인상이 강했고, 초짜 변호사 오도로키는 베테랑들에게 매몰되어 잊혀졌다. 그나마 오도로키가 존재감을 뽐낸 건 '꿰뚫어보기'를 배운 후의 일이다.
<역전재판 2>는 사이코 록을 추가하여 탐정 파트를 발전시켰다. 사이코 록은 마음 속 비밀을 찾아내 해제하는 능력. <역전재판 4>는 사이코 록 대신 비슷한 개념인 꿰뚫어보기를 내세웠다.
<역전재판> 시리즈는 탐정과 법정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사이코 록은 탐정 파트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마음속 비밀을 밝혀내려면 증거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꿰뚫어보기는 법정 파트에서 사용할 수 있고, 증거를 제시할 필요 없이 상대방의 버릇을 지적하면 그만이다.
꿰뚫어보기의 적용 사례는 대충 이런 식이다. 증인을 추궁할 때 꿰뚫어보기를 쓰면, 특정 증언을 할 때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때 오도로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한 탓에 긴장을 해서 땀이 많이 분비된 겁니다"
땀이 나는 건 생리현상인데 그걸 증거로 내놓으면 어쩌자는 건가? 설령 거짓말을 해서 땀이 났다고 치자. 증인이 발뺌하면 그만인 이야기다. 그러나 <역전재판 4>의 증인들은 변호사의 억지 주장을 순순히 인정한다. 변호인의 억지 주장에 검사, 재판장이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 점도 이상하다.
대대로 역재 시리즈는 근거 없는 추궁을 하면 "쓸데없는 추궁은 금지, 허튼소리 하지 말고 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역전재판. 2001>의 카루마 검사가 그랬다.
반면 <역전재판 4>의 가류 검사는 달랐다. 겨드랑이에 땀 찼다는 이유로 증인을 거짓말쟁이가 된다. 가류는 증인이 핍박당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관전한다. 매번 이런 식이니 법정 파트의 치밀함이 떨어지고, 검사의 자질마저 의심하게 된다. 작중에서 가류 검사는 재수없는 능력자로 등장하나, 이래서는 밥맛에 능력도 없는 자뻑맨일 뿐이다. 탐정 파트에 국한된 사이코 록과 달리, 꿰뚫어보기는 법정에서 증인의 거짓을 간파하는데 쓰인다. 법정 파트는 논리의 대결인데, 이 법정에는 우스꽝스러운 트집으로 가득하다.
<역전재판 3>의 고도 검사처럼 변호사를 돕는 검사. 재판 게임의 특성 상 검사는 라이벌로 그려지는데, <역전재판 4>는 라이벌과 대립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검사가 열폭하거나 망가지는 일도 없다. 가류는 고도처럼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도 아니다. 법정 안에선 라이벌리가 없고, 법정 밖에서도 완벽 초인. 가류 변호사와 형제 관계라는 설정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법정 파트는 <역전재판> 시리즈의 핵심이며, 법정 파트의 재미는 대개 검사의 독특한 개성에서 비롯되었다. 가류는 많은 분량을 받았음에도, 서사, 캐릭터 양쪽 모두 실패해 별다른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 차라리 탐정 파트에서 아카네와 투닥거리는 장면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다음으로 나루호도를 이야기해보자.
구작에서 보여줬던 나루호도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을 나루호도 류이치라고 주장하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전작과는 달리 나루호도는 판결을 위해서라면 조작된 증거를 기꺼이 쓸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성격이 저렇게 변할 정도면 큰 사건이 있었겠지"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나루호도의 마지막 재판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전설의 변호사의 마지막 재판이 이렇게 허접하다니. 이 사건에서 나루호도는 조작된 증거를 제시해서 모든 걸 망치는데,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세 가지 있다.
1) 가류 검사는 텐사이의 일기장을 근거로 유죄를 주장하는데,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가 찢겨있어 증거로서의 힘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루호도는 이 점을 어필하기만 해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루호도는 이 상황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받아들인다. 벼랑 끝에 몰린 나루호도는 출처가 불분명한 증거를 내보이게 되고, 그것이 위조된 증거임을 가류 검사가 폭로하면서 나루호도는 변호사 자격을 잃어버린다.
2) 애초에 조작된 증거를 문제 없겠거니 내민 것이 문제다. 나루호도는 이것이 조작된 증거인지는 몰랐으나 출처가 불분명했고, 재판 직전에 누군가가 어린아이에게 갖다 준 것을 증거로 활용했다. 나루호도는 위조된 증거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오는지 줄곧 지켜본 인물이다.
3) 답정너식 전개
마지막 순간까지도 충분히 논의할만한 증거들이 있었다. 가류 검사의 빈약한 논리를 트집 잡아 추가 조사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가류는 이런 말을 한다.
가류)
참고로, 이 "수기" 자체 뭐 이런 건 하지 말아줘. 여기까지 왔으니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결정적인 걸 부탁해. 피고인이 수기의 다음을 썼다...... 그걸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
낼 수 있는 증거는 하나 뿐. 증거를 제출하면 나루호도는 모든 신용을 잃고 몰락하게 된다. 본인 또한 증거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 허나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전작 주인공 나루호도를 몰락시키는 버튼을 플레이어에게 떠넘긴 것이다.
가류 변호사는 오도로키의 스승이자 가류 검사의 친형이다.
잭은 가류 변호사에게 텐사이 사건을 맡긴다. 재판 이틀 전에 가류와 포커를 치게 된 잭, 급작스레 변호사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가류는 거금을 들여 위조 증거까지 마련했건만, 잭의 변덕으로 사건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이다. 새로이 선임된 나루호도 변호사. 그는 자신이 나루호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앙심을 품고 복수를 결심한다. 나루호도는 가류가 준 위조 증거를 사용했다가 실각하게 되고, 잭은 살해되며, 위조 증거를 만든 에세 마코토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가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점철된 캐릭터이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지만 쓸데없이 주접을 떨다가 제 무덤을 판다. 막판 자폭 쇼를 보고 있노라면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한 인물의 말로치고는 납득하기 어렵다. 분량이 너무 적어 빌런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점도 아쉽다.
앞서 살펴본 인물들도 심각하지만 아루마자키 잭은 한 술 더 뜬다.
* 그의 어메이징한 행적 ⓐ 가류 변호사에게 의뢰한 후 가류와 포커를 친다. 그 후 나루호도와 포커를 친 뒤 변호사를 교체. (이 일로 가류가 앙심을 품게 됨) ⓑ 중요한 증거를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다. 유우미 사건이 밝혀질까봐 제출을 꺼린 것이지만, 결국 자신을 변호한 나루호도가 실각하게 되는 계기가 됨. ⓒ 판결이 나기 전에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딸을 방치함. 나루호도는 이 아이를 거두어 수양딸로 키운다. ⓓ 7년 뒤 서류 상의 죽음을 앞두고 나루호도 앞에 나타남. 자신의 마술상속권을 딸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나루호도에게 전한다. ⓔ 나루호도가 7년 동안 포커로 진 적 없다는 사실을 듣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조작이나 하는 괘씸한 놈"이라고 일갈하면서 포커로 도전, 나루호도에게 조작 혐의를 씌워 그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퇴출시키려 함. ⓕ 나루호도가 포커 도중 속임수를 눈치채자, 잭은 공범에게 그것도 제대로 못 하냐며 포도주 병으로 머리를 내려친다. |
오랜만에 만난 잭과 나루호도, 잭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딸에게 마술 상속권을 넘겨주려고 한다. 그런데 7년간 무패라는 점이 맘에 안 들었는지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무패 행진이 조작이라고 여긴 잭은 딜러와 짜고 나루호도에게 빅 엿을 먹이기로 결심한다. 방금 전까지 "조작" 운운했던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나루호도가 잘못되면 딸의 생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속임수가 잘 안 풀리자 급기야 공범의 머리를 포도주병으로 내리친다. 그저 나루호도를 속이지 못했다는 멍청한 이유로 말이다.
자신이 이득을 챙겼다면 그러려니 할텐데, 잭한테 떨어지는 콩고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나루호도의 행동이 맘에 안 들어서 깽판치는 것이다. <역전재판 4>는 잭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아루마지키 잭은 <역전재판 4>의 흑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캐릭터이며, 이 사람 하나 만으로도 <역전재판 4>는 영구 까임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전재판의 작가 '타쿠미 슈'는 극적인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희생하곤 했다. 이 방식은 나를 포함해 많은 팬들을 불러 모았지만, <역전재판 4>는 단점이 극대화되면서 장점이 퇴색되고 말았다. 각본이 망가진 건 작가의 책임이지만, 온전히 작가만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캡콤과 이나후네 케이지가 각본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내부 사정을 모르는 이상, 그들이 각본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개입이 있었다는 추정은 가능한데, 나루호도의 캐릭터가 전작과 딴판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초기 각본에선 나루호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상 참작이 가능하다고 해서 타쿠미 슈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메인 플롯과 상관없는 부분마저 시나리오의 허술함이 눈에 띄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조연을 폭넓게 살펴보았다. 나루호도, 오도로키, 가류 검사, 가류 변호사, 잭... 주조연이 이럴진대 어찌 좋은 작품이 나오겠는가? <역전재판 4>의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트릭 하나 망가뜨린 수준을 넘어 에피소드 전체를 조진 시나리오가 있었다. 바로 '역전의 세레나데'다.
라미로아가 마술 트릭을 사용해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장면.
라미로아는 20초 동안 환풍구를 통해 이동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 가류 검사는 연주의 작은 미스를 금세 알아차리는 완벽주의적 성향의 사람이다.
보컬이 환풍구에서, 그것도 빠르게 이동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음악 퀄리티가 좋을 리가 없다. 음악에 까다로운 가류가 음악 퀄리티를 낮출 수 있는 이런 마술에 동의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관객들 또한 이상함을 느낄 상황이었으나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환풍구에서 노래를 부르면 소리가 울리고, 움직임으로 인해 소리의 강약 조절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미로아는 문제없다고 이야기했으나,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 라미로아는 맹인이다. 20초 동안 보이지도 않는 환풍구를 노래하면서 탈출한다는 게 부자연스럽다.
ⓒ 환풍구는 먼지 투성이일 터, 라미로아는 환풍구를 통과했는데도 옷차림이 깔끔하다. 공연 전에 청소를 했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작품 내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 기타 크고 작은 문제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마키(라미로아의 전속 피아니스트)는 가류의 기타에 밀수품을 숨겼는데, 가류는 음색의 작은 변화도 눈치채는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다. 기타에 무언가 넣었다면 음색이 변했을 텐데 가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기타는 보르지니아국에서 가류가 직접 구한 것인데, 하필 그 안에 밀수품이 들어있었고 통관을 무사히 넘어왔다는 소리가 된다. 뭐 이딴 우연이.
레타스(라미로아의 매니저)의 목격 증언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레타스가 라미로아를 언급하는 부분 자체가 이상하다. 라미로아가 사건을 목격하긴 했지만 레타스가 이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라미로아가 환풍구로 이동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이 트릭은 작품 내에서 알고 있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감춰졌다. (심지어 스테이지에 같이 선 가류 검사도 몰랐다.) 범인의 신체적 특징이 뚜렷했기에 굳이 라미로아를 언급할 필요 없이 범인을 직접 지적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동안 역전재판 시리즈의 피고인은 플레이어가 돕고 싶은 인물로 그려졌다.
억울하게 혐의가 쏠린 사람, 죄를 지었지만 죽을 죄를 짓진 않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역전재판 4>를 하다 보면 "내가 왜 이 사람을 변호해야 되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피고인은 '에세 마코토' 뿐이다. 에피소드 2의 피고인은 시종일관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이며, 실제로 사람을 찌르려고 하는 등 플레이어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에피소드 3의 피고인은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을 연기했지만 실은 일본어에 능숙한 인물이었고, 사건의 실마리가 될 비밀을 은폐했으며, 반출 금지 물품을 빼돌린 밀수범이다.
전작에서도 설정 구멍은 차고 넘쳤다. 당장 생각나는 에피소드만 꼽아도 <역전, 그리고 안녕> <재회, 그리고 역전> <역전 서커스> <추억의 역전> <화려한 역전>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역전재판 4>는 급이 달랐다. 비중, 개연성, 존재감 없는 주조연들, 전작 캐릭터의 설정 붕괴, 알아차리기 쉬운 모순들, 망가진 스토리,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피고인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아 일일히 지적하는 내가 바보처럼 보일 정도다.
마지막으로 탐정 파트의 증거 제시를 살펴보자.
증거를 들이대면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건과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시스템이지만, <역전재판 4>의 제작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건과 관계없는 증거를 제출하면 일관된 반응으로 일관한다. 그들이 반응하는 것은 오직 핵심적인 증거 뿐이다. 누군가에겐 상관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명색이 캐릭터 게임 아닌가. 다양한 반응을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전작에 있었던 인물의 증거 제시가 없어진 점 또한 아쉽다. 형사가 검사(ex 이토노코에게 미츠루기 제시)를 어찌 생각하는지, 용의자를 어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기능이었건만. 탐정 파트의 심심한 반응, 증거 제시 제한, 사이코 록(마요이의 곡옥) 삭제 등이 겹쳐, 탐정 파트의 재미가 크게 줄어들었다.
과학 수사는 <역전재판>의 DS 이식작 <역전재판: 소생하는 역전, 2005>에서 처음 나온 시스템으로, 전작의 영매와 달리 현실적인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호평을 이끌어 냈다. <역전재판 4>는 과학수사 파트를 늘려 퍼즐 풀이에 신선함을 가미했고, 탐정 파트에서 사이코 록이 없어진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평가 점수 : ★★★
역전재판의 오랜 팬들에게 빅엿을 먹인 시리즈. 매출과 완성도는 별개라는 것을 증명한 게임이다. 스토리를 즐길 때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에겐 추천할 만한 게임이 못 된다. <역전재판 4>는 곱씹을수록 모순이 새롭게 탄생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전재판 시리즈는 개연성, 치밀함보다 법정 연출에 의존했지만, <역전재판 4>는 역전재판 시리즈의 장점을 줄이고 단점을 극대화한 게임이다. 허술한 이야기, 훼손된 설정, 어설픈 시스템, 추리 게임으로서의 완성도,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완성도. 모든 면에서 아쉽다. 전작의 사이코 록처럼 꿰뚫어보기를 탐정 파트에 넣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전재판 4>에서 비롯된 설정들은 후속작에서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어찌 됐든 정식 시리즈이자 공식 설정 아닌가.나에게 <역전재판 4>란 역전재판의 스핀오프 같은 것이다. 심지어 <역전재판 4>의 설정을 이어받은 정식 후속작조차 if 스토리처럼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2점을 줘도 이상하지 않지만, 가볍게 즐기기엔 썩 나쁘지 않은 게임이다. 법정에서의 긴장감, 주고 받는 공방의 재미는 여전히 탁월하기 떄문이다. 그런 점에서 <역전재판 4>는 역전재판 시리즈답다고 할 수 있으며, 시리즈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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