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스트리트 파이터 2(이하 스파 2)가 있었다. 대전 액션 게임의 왕이자, 업계 표준을 제시한 메가톤급 히트작. 예전에도 1:1 대결을 다룬 게임은 있었지만, 스파 2는 커맨드와 캔슬, 중하단, 윕퍼니시, 파동승룡 등의 개념을 덧붙여 격투게임의 틀을 새롭게 제시했다. 이때 만들어진 개념이 지금도 당연하게 쓰이는 걸 보면 캡콤의 선견지명에 새삼 놀라게 된다.
<스파 2>의 성공은 수많은 아류작을 낳았다. 비슷비슷한 기술 세팅에, 어디서 본 것 같은 캐릭터까지. 표절과 오마쥬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제작사들도 있기 마련,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회사가 있었다. 타이토도 그 중 하나였다.
타이토는 80년대 아케이드를 상징하는 개발사였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엘리베이터 액션> <버블보블> <기기괴계> <알카노이드> <뉴질랜드 스토리> 등등 일일히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작이 쏟아졌다. 찬란했던 80년대가 끝나자 타이토는 하향세로 접어들었고, 잘 만든 게임조차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개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토 출신 개발자의 회고록을 보면 어떻게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일을 했을까 안타까울 정도다. 열악한 상황에서 명작을 남긴 개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버블보블>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타이토 게임일 것이다.
지금도 번화가 오락실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작품.
병아리 같은 것이 총총 움직이는 게 귀엽다.
귀여운 캐릭터로 인기를 끈 기기괴계 시리즈.
21년 만에 신작이 나와 레트로 게이머들의 눈길을 끌었다.
타이토는 <버블보블> <뉴질랜드 스토리> <기기괴계> 같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았다. 칙칙하고 퀭한 배경에 괴악한 공룡의 울음소리, 익룡에게 납치되어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조련사들. 90년대 타이토는 어둡고 비틀린 세계를 창조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미지 출처 : https://twitter.com/arcade_lab/status/998006016791887872?lang=fi
<스파2>를 위시한 격투게임들은 파동 승룡과 잡기 위주로 심리를 굴린다. 그런데 <다이노 렉스>는 달랐다. 우선 가드부터 살펴보자. <스파 2>는 방향키를 캐릭터의 뒷 방향으로 입력하면 뒷걸음질치게 설정되어 있다. 이 때 상대가 공격을 하면 방어 자세를 취한다.
<다이노 렉스>는 방향키 (↓)로 가드를 한다. (↓)를 입력하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가드를 하면 움직임이 멈춰버리고 만다. 가드 대책도 특이하다. '스파식 격겜'은 잡기로 가드를 깨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게임은 (↓+A)로 잡기를 파훼한다. (↓+A)는 잡기와 달리 상대방을 다운시키지 않는다. 후(後) 상황의 이점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다.
'격투게임의 변천사'를 써야한다면 짧더라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게임이 <다이노 렉스>일 것이다.
<다이노 렉스>는 크게 세 가지 유산을 남겼다. 첫째, 실사풍 공룡 캐릭터를 도입했다. 이미 <모탈 컴뱃, 1992> 같은 실사풍 격투게임이 등장하긴 했지만, 실사 게임이 드물었던 데다 공룡 소재라는 점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실사풍의 공룡 디자인은 훗날 <프라이멀 레이지, 1994> <킬러 인스팅트, 1994>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 다운공격을 도입했다. 다운공격은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올라탈 때', '필살기를 맞추고 추가타를 입력할 때' 두 가지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타를 맞추려면 게이지를 소모해야 한다. 그동안 <WWF 슈퍼스타즈, 1989> 같은 대전 게임에서 다운공격을 집어넣긴 했지만, <스파 2> 이후의 격투게임은 기존 스포츠 노선의 대전 게임과는 결이 달랐다. <다이노 렉스>는 다운공격을 격투게임에 집어넣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변주를 줌으로써 연출적 쾌감을 극대화시켰다.
셋째, 아이템을 도입했다. 대전 중에 하늘에서 아이템이 떨어진다.
아이템 획득이 어려운 점을 감안할 때 아이템의 가치 책정이 다소 아쉽다.
<다이노 렉스>는 좋은 아이디어로 무장한 게임이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게임의 완성도를 보증하진 못한다. 우선 히트박스가 이상하다. 공룡이 엑스 자로 교차하고 있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자리가 바뀌면 중립 상태로 되돌아간 후 시합이 속행된다. 잘 싸우고 있는데 수시로 템포가 끊긴다.
<다이노 렉스>는 모션 애니메이션이 부족한 게임이다. 개발이 순탄치 않았는지 그 흔한 피격, 타격 모션도 부실하다. 이래서는 내가 때리고 있는 건지, 맞고 있는 건지 분간이 잘 안 된다.
대전 게임은 끊김없는 템포가 중요하다. 그러나 <다이노 렉스>는 승리화면조차 템포가 끊긴다. 전투에 승리하면 적에게 다가가야 하고(직접 조작해야 함), 공룡의 울음소리와 승리 포즈를 감상해야 하고, 라운드 시작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카메라 워킹을 선보이며, 입장 씬이 끝나면 공룡들이 파워를 모으고 전투에 돌입한다. 빨리 싸우고 싶은데 참 피곤하게 만들어놨다.
파워 키를 (↑)에 할당한 것도 이상하다. 어차피 A, B밖에 안 쓰는데 C를 할당하면 되는 일을, 굳이 (↑)에 할당하는 바람에 점프 입력이 붕 뜨게 됐다. 점프는 방향키 기준으로 (↓, ↑)을 입력해야 한다. (↓, ↑)는 격투게임에서 종종 쓰는(대점프) 커맨드지만, 일반 점프를 (↓, ↑)에 할당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조작감이 나쁜데 굳이 (↓, ↑)를 점프로 할당해야 했을까. 덕분에 점프 입력이 지지리 안 먹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심지어 커맨드도 해괴하다. 초필살기는 (A+B, 히트 후 A 연타)로 굉장히 쉬운 편이지만, 필살기 커맨드는 (8741236+A)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이 잘 나가지 않는다.
다이노 렉스는 타이토에서 한 명, 외주 회사의 프로그래머 세 명이서 만든 게임이라고 한다. (3개월 후 1명이 더 추가됨) 주어진 기한은 고작 3개월, 처음에는 북미 시장을 노리고 기획되었으나 내수용 게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공룡 슈팅 게임으로 변경하자는 아이디어는 묵살되었고, 반드시 액션 게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타이토는 자신들의 대표작 <다라이어스>조차 채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예산 지급에 난색을 표했던 것 같다. <다라이어스>가 그러할진대 <다이노 렉스>는 어떻겠는가. 교세라 자회사 시절의 타이토는 영락없는 블랙 기업이었다.
개발자의 증언 : https://web.archive.org/web/20071130021429/http://www6.ocn.ne.jp/~t-1008dx/drex.html
평가 점수 : ★★★
거리를 벌려 기를 모으고, 좌우로 쉼 없이 움직이며 거리 싸움을 하는 게임.
흥미로운 세계관과 실사풍의 디자인, 공룡이 넘어지면서 구조물이 박살나는 박력 넘치는 연출. 괴작 취급하기엔 참 아까운 게임이다. 그러나 대전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글쎄. 나쁜 조작감과 수시로 끊기는 템포, 근접 공방에서의 형편없는 직관성을 보고 있노라면 괴작 취급하는 게 이해가 간다.
<다이노 렉스>는 격투게임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의의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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