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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리뷰

Refind Self: 성격 진단 게임 (2023)

by 눈다랑어 2026. 7. 16.

게임은 나를 여행자라고 불렀다.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좋아하고, 익숙한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상황에 적응하는 사람. 광대와 연구가가 그 성격을 보충하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인 성향은 플래너라고 했다. 나와 가장 먼 성격은 평화주의자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찜해둔 신작이 나오면 남의 평가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해보는 편이다. 변화에 큰 거부감이 없고, 새로운 시스템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도 좋아한다. 누군가 논의를 이끌지 않으면 내가 먼저 나서는 때도 있다. 게임이 보여준 다섯 가지 이름 가운데 적어도 몇 개는 내가 알고 있던 나와 꽤 닮아 있었다.

 

日本語で読む方へ:
本稿では、『Refind Self』をプレイヤーの行動を性格へと翻訳するゲームとして考察します。その診断は科学的な真実でも、まったく根拠のないものでもありません。実際の選択を記録しながら、その意味づけには解釈の余地が残されており、その不完全さが自分自身を問い直し、語り直すきっかけになります。

For English readers:
This essay examines Refind Self as a game that translates a player’s actions into personality types. Its conclusions are neither scientifically definitive nor entirely arbitrary: the game records real choices, but the meaning assigned to them remains open to interpretation. That imperfection becomes its strength, encouraging players to question, explain, and rediscover themselves.

 

그러나 의문은 남았다. 이 게임은 어떻게 나를 알았을까. 내가 게임 속에서 보여준 것은 몇 시간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만지고, 사람과 대화하고, 몇 가지 선택을 내린 것이 전부다. 내가 현실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하며, 곤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알 리가 없다. 그럼에도 게임은 내가 여행자이고, 광대이며, 연구가라고 단정했다.

 

《Refind Self: 성격진단 게임》(이하 Refind Self)은 플레이어에게 질문지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작은 마을 하나를 내어주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나는 게임을 플레이했다고 생각했지만, 게임도 나를 읽고 있었다.

 

 

마음대로 행동해 주세요

《Refind Self》 는 시작하자마자 게임의 목적을 공개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한다. 1회차가 끝나면 세 가지 성격이 주어지고, 반복 플레이를 거치면 숨겨진 성격과 가장 먼 성격까지 드러난다. 성격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일은 없으며, 결말은 하나뿐이다. 게임 오버도 없다. 당신은 마음껏 행동해도 된다.

여행자, 성직자, 용사... 게임 속 직업으로 분류된 23가지 성격들

이 설명은 플레이어를 안심시킨다. 잘못된 답도 없고, 놓치면 실패하는 정답도 없다. 성격검사라면 평소의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게임도 특정한 행동을 강요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정말 자유로운 게임처럼 보인다. 묘비를 살펴보고, 길가의 꽃을 꺾고, 광산에서 고철을 캔다. 벤치에 오래 앉아 있거나, 자판기를 두들기고, 지나가는 사람과 대화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행동에는 즉각적인 성공과 실패가 없다. 보상을 주는 퀘스트도, 정해진 순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화면 좌상단의 하트는 내가 행동할 때마다 조금씩 차오른다.

하트가 100%에 도달하면 진단이 끝난다고 게임은 말했다.

초반에는 이 수치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을 건드리고, 궁금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60%쯤 차오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장소가 있는데, 지금 저 물건을 만지면 나중에 하트가 부족할지 모른다. 사소한 행동을 하다가 정말 중요한 장면을 놓치면 어떡하지. 아무 생각 없이 누르던 조사 버튼이 슬슬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그동안 하트가 진행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샐러리캡처럼 작동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므로 무엇을 할지가 중요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포기할지가 중요해진다. 게임은 그 제한 속에서 내가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성격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성격 진단과 게임 플레이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게임은 질문지에 "당신은 계획적입니까?"라고 묻지 않고, 게임은 하트가 거의 다 찬 상황에서 무엇을 포기하는지 본다. "호기심이 많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물건을 몇 번이나 조사하는지 기록한다.

 

그렇다면 게임이 읽어낸 것은 현실의 내 성격이었을까. 아니면 제한된 규칙에 적응하며 드러난 나의 플레이 습관이었을까. 1회차에는 아직 그 차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검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믿었다.

 

 

다시 시작했을 뿐인데

여기서 잠시 고백하자면, 나는 《Refind Self》가 출시됐을 때 3회차까지 플레이했다. 이 글을 쓰려고 약 30개월 만에 다시 붙잡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과거의 경험이 검사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어떤 행동이 기록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내 머리를 백지로 만들 수는 없었다. 흥미롭게도 첫 번째 결과는 전과 비슷하게 나왔다. 가장 상징적인 성격은 여행자였고, 보충 성격으로 연구가가 나왔다. 차이는 하나, 과거에는 사무라이였던 자리에 광대가 들어갔을 뿐이었다.

 

같은 사람이 같은 게임을 하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그 점에서는 MBTI 검사를 반복했을 때와 비슷했다. 문제는 2회차인데, 결과를 본 사람은 더 이상 처음처럼 행동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 더 부연 설명하자면, 2회차를 플레이해야 플레이어의 숨겨진 성격이 드러난다.

 

게임은 몇몇 행동 직후 리더, 장인, 여행자 같은 성격의 점수가 얼마나 올랐는지 보여준다. 나는 이제 모든 행동이 어떤 성격의 점수로 환산된다는 사실을 안다. 게임은 모든 판정 기준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플레이어는 어느 정도 규칙을 추측할 수 있다. 죽어라 광산을 팠더니 장인 점수가 올랐다면, 한 우물만 파는 태도가 장인으로 판정된 것일까. 오래 고민하면 철학자가 되고, 이윤을 따지면 상인이 되는 것일까.

이 게임은 나의 사소한 행동에 채점 기준을 들이댄다.

한번 이런 생각에 빠지면 머릿속에 두 개의 속삭임이 들린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행동과, 게임이 그 행동을 무엇으로 읽을지 의식한 행동. 물론 나는 2회차에서 1회차와 정반대의 인간을 연기하지 않았다. 묘비를 확인하고 고철을 캐는 등, 여전히 하고 싶은 행동은 반복했다. 다만 이미 본 선택을 과도하게 되풀이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변주를 주었다.

 

결과는 크게 달라졌다. 1회차의 여행자·광대·연구가가 2회차에는 플래너·무투가·수집가가 되었다. 나는 무투가가 낯설게 느껴졌다. 게임은 무투가를 "복잡한 기능보다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을 선호하며, 왕도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나는 복잡한 사고와 분석을 즐긴다. 그렇다면 무투가는 나와 거리가 먼 유형 아닌가.

무투가는 내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결과를 읽다 보니 반론만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카드게임에서 굳이 환경에 맞지 않는 티어 외 덱을 선호하지 않는다. 복잡한 덱을 좋아하지만, 어려움이 지나치면 기피하고, 때로는 단순한 덱이라도 덱 파워를 보고 타협하곤 했다. 1티어가 괜히 1티어가 아니다. 왕도에는 왕도의 맛이 있다. 어쩌면 이것도 나일 수 있다.

 

게임의 판정에 동의했기 때문에 나를 발견한 것인지, 낯선 판정에 내 성격을 갖다 끼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결과를 읽는 동안, 게임의 판정과 내 기억 사이에서 기나 긴 문답이 시작됐다.

 

"나는 정말 이런 사람이었나?"
"무투가와 내 성격의 어디가 비슷하고, 어디가 비슷하지 않은 걸까?"

 

 

규칙이 보이기 시작했다

2회차에서는 내가 판정을 의식했다. 3회차에서는 게임이 판정의 규칙 자체를 공개한다. 불과 몇십 분 전만 해도 게임은 내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3회차의 도입부에서 박사는 전혀 다른 부탁을 남긴다. 어떤 성격이어야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까. 사고 패턴을 바꾸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성격의 판정 규칙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두었으니, 그것을 사용해서라도 그 아이를 인간답게 만들어달라.

 

전에는 나를 진단하던 규칙이, 이제 이야기 속 로봇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도우미가 된다. 실제로 3회차에는 각 행동이 어떤 성격과 연결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표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판정표는 게임 화면 옆에 계속 나타나는 정보가 아니라 별도의 메뉴를 확인한 뒤 다시 플레이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성격의 엔딩이나 CG를 모으려는 사람에게는 유용하겠지만, 매번 판정표를 확인하며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부터 성격 진단은 자연스러운 행동의 관찰이라기보다 공략표가 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 채 행동할 때는 검사지만, 결과를 정해놓고 플레이하면 육성 게임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3회차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게임은 3회차를 권장한다. 3회차를 플레이하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성격을 판정해주겠다고 유혹한다. 세 번의 결과를 합친 종합 데이터는 한 번의 대표 유형보다 내 플레이의 반복적인 경향을 더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1회차에는 여행자, 2회차에는 플래너, 3회차에는 재차 플래너가 가장 중요한 성격으로 나왔다. 그러나 종합 데이터를 뜯어보니 여행자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그 뒤에 리더와 플래너, 도박사, 모험가 순으로 이어졌다.

한 눈에 보는 '나'

나를 대표하는 성격 다섯 가지가 선수의 오버롤이나 야구의 WAR처럼 전체적인 인상을 보여준다면, 종합 데이터는 그 밑에 숨은 세부 데이터를 펼쳐 보여준다. 나는 대표 성격에 리더가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30개월 전, 게임은 나의 숨겨진 성격으로 리더를 지목했다. 나는 스스로 지도자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논의를 이끌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리더는 종합 데이터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한 루프의 대표 유형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세 번의 플레이에서 꾸준히 쌓인 행동 속에는 남아 있었다. 반대로 2회차에서 눈에 띄었던 무투가는 종합 점수에서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그제야 이 게임이 나를 번역하는 방식을 조금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게임이 기록한 것은 내가 무엇을 조사하고, 무엇을 포기하며, 언제 결정을 내렸는가였다. 여행자와 플래너, 리더는 그 자체로 관찰된 사실이 아니라, 내 행동들을 묶어 게임이 내린 번역어였다. 대표 성격은 번역문의 소제목 같은 것이고, 종합 데이터는 그 아래 붙은 설명이다. 하지만 번역에는 언제나 손실이 생긴다.

 

게임은 내 행동을 기록할 수 있다. 내가 묘비를 조사했고, 이름을 바꾸지 않았으며, 자판기를 때렸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나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게임이 판정하기 어렵다. 묘비를 조사한 것은 연구심 때문이었을까. 스토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강박 때문이었을까. 하트를 아껴 행동한 것은 현실의 내가 계획적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제한된 자원을 관리하는 게임에 익숙한 플레이어였기 때문일까. 게임은 내 행동을 번역했다. 그런데 게임이 번역한 것은 현실의 나였을까, 게임을 하는 나였을까.

 

 

누가 누구를 보고 있었나

플레이어의 선택으로 성격이나 역할을 정하는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울티마 IV, 1985》는 시작부터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하고, 어떤 미덕을 우선하는지에 따라 직업을 정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판정이 시작의 문답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임은 이후의 플레이도 조용히 지켜본다.

 

다른 RPG에서 하듯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적을 학살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만 반복하면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없다. 이 게임의 궁극적 목표는 정신적 수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영웅 역할을 연기한다고 생각하지만, 게임은 실제 행동이 그 역할에 어울리는지 판정한다.

 

《사일런트 힐: Shattered Memories, 2009》는 플레이어의 시선과 상호작용을 관찰해 심리 프로필을 만들었다. 다만 그 결과를 이용하는 방향은 《Refind Self》와 다르다. 이 작품은 플레이어를 분석해 게임을 바꾼다. 인물의 모습과 연출, 공포의 형태가 플레이어에게 맞춰 변한다. 《Refind Self》는 플레이어를 분석해 플레이어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Shattered Memories》에서는 판정 결과가 다시 게임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므로 세계는 이렇게 응답한다"는 방식이다. 반면 《Refind Self》는 "당신은 이런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한 뒤 한발 물러난다. 그 판정에 동의할지는 당신의 몫이다.

 

 

게임 전체가 잉크 얼룩이라면

《Refind Self》의 작동 방식은 앞선 게임들보다 오히려 심리 실험이나 행위예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선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를 주목하고 싶다. 이 검사는 모호한 그림을 보여주고, 참가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는지를 통해 내면을 해석한다. 《Refind Self》는 잉크 얼룩 대신 작은 세계를 제시한다. 명확한 정답 없이 돌아다니게 한 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지나쳤는지 관찰한다. 게임 전체가 거대한 투사검사실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그러나 잉크 얼룩과 게임 세계는 같지 않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제작자가 미리 준비한 것들이다. 묘비를 조사하고, 벤치에 앉고, 자판기를 때리는 행동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의 목록과 판정 기준은 이미 게임 안에 존재한다. 게임은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말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지는 먼저 정해놓는다.

 

여기서 오노 요코의 행위예술 《Cut Piece》와도 차이가 생긴다. 《Cut Piece》에서는 관객이 무대에 올라 작가의 옷을 자른다. 관객의 행동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작품의 윤리적 상황을 직접 만든다. 작가가 통제권을 내려놓은 자리를 참여자의 행동이 채운다.

 

《Refind Self》에서도 플레이어의 행동이 각자의 경험을 만든다. 그러나 제작자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다. 게임은 침묵한 채 행동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그 의미를 판정하는 보이지 않는 평가자가 된다. 《Cut Piece》 가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Refind Self》는 그 뒤에 한 가지 질문을 더 붙인다.

 


그 행동을 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이 게임의 판정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여행자에 대한 게임의 상세 설명을 읽어봤다. 변화와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기존 방식만 고집하지 않으며,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대체로 나와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설명은 꽤 많은 사람에게도 맞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호하고 긍정적인 설명을 자신에게 들어맞는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포러 효과다. 사주풀이나 혈액형 성격론, 대중적인 심리검사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문장을 사용하고도 사람에게 강한 납득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다.

타로 카드와 MBTI, 나는 포러 효과라고 하면 이 둘을 떠올린다.

《Refind Self》도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운 유형명을 제공한다. 긍정적이고 이야기하기 좋은 특징을 제공하며, 플레이어가 맞는 부분을 중심으로 자기 경험을 재구성하게 한다. 그렇다고 이 게임을 사주풀이와 똑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Refind Self》에는 행동 기록이 남는다. 게임은 무작위로 여행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조사하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채점했다. 다만 행동 기록이 있다는 사실과, 그 행동의 의미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다르다. 이 게임의 판정은 완전한 허구도 아니고, 과학적인 진실도 아니다. 실제 행동과 제작자의 해석, 플레이어의 자기 기억이 겹쳐 만들어진 이야기다.


여행자가 맞다고 느끼면 나 자신이 여행자였던 기억을 떠올린다

무투가가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한테 혹시 그런 면이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리더가 숨어 있었다는 결과를 보고,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논의를 이끌었던 기억을 찾는다

 

포러 효과는 진단의 신뢰도를 낮추는 약점이지만, 동시에 이 결과가 자기서사의 촉매로 기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자나 플래너에 관한 설명은 넓고 긍정적이어서, 실제보다 나를 정확히 묘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게임은 내가 현실에서 언제 그런 사람이었는지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결과와 어울리는 기억을 꺼내 그 빈자리를 채운다. 판정이 정확해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판정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는 맞는 이유를 찾고, 틀린 부분에 반론하며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 이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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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만들어 주세요

3회차에 들어서면 성격 진단과 박사, 우츠와(로봇)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겹치기 시작한다. 박사는 우츠와가 100년 뒤에도 살아남았으면 했다. 자신이 100년 뒤에 다시 태어나 그녀와 재회한다는 계획이다. 우츠와는 그럴 생각이 없다. 박사의 복제에 필요한 양을 모두 파괴하고, 자신의 연료가 다 되면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박사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사고 패턴을 주어야 우츠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까. 어떤 성격이어야 계속 살고 싶을까. 그는 성격의 판정 규칙까지 공개하며 플레이어에게 읍소한다. 그 아이를 인간답게 만들어달라고.

 

처음에는 게임이 나에게 성격의 이름을 붙였다. 이제 박사는 우츠와에게 어떤 성격을 부여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표면적으로 박사는 우츠와를 생명으로, 친구로 대한다. 그녀가 단순한 기계라고 생각했다면 100년 뒤의 삶과 외로움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박사는 우츠와가 바라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의 기억을 삭제해서라도 박사의 의지를 따르도록 만들려 한다.

두 존재의 대립

우츠와는 반발한다. 자신을 한 사람의 존재로 보아달라고. 자신을 가장 인간답게 대하지 않는 사람은 박사라고. 이 말은 성격 진단 시스템에도 되돌아온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보고 여행자와 플래너, 리더라는 이름을 붙인다. 박사는 우츠와의 행동을 보고 그녀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판단한다.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성격검사 결과가 기억 삭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장면을 나란히 놓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관찰은 곧 이해가 될 수 있는가. 행동을 분류했다는 이유로 그 존재 전체를 정의해도 되는가.

 

우츠와가 박사의 복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00년 뒤에 같은 DNA로 태어난 존재는 자신이 알던 박사와 닮을 수 있다. 비슷한 성향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적어도 우츠와에게 그는 자신이 알던 박사가 아니라, 박사를 닮은 새로운 존재일 것이다.

 

박사 역시 낡은 몸에 남은 현재의 우츠와를 소중히 여겼다. 새로운 몸에 데이터를 옮긴 존재를 우츠와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츠와는 바로 그 박사에게서 정체성과 기억의 중요성을 배웠다. 박사가 가르친 인간다움을 따른 결과, 우츠와는 박사의 계획을 거부한다.

 


그녀는 박사를 통해 인간이 되었을까

그저 박사의 사고방식을 흉내내는 존재일까

기억이 삭제된 뒤에도 그녀는 우츠와인가

DNA로 되살아난 사람은 박사 본인이 맞는가

 

게임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에 우츠와의 기억을 지우는 결정을 내렸다. 그 선택이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우츠와가 박사의 흔적과 자신까지 모두 없애는 결말을 그대로 지켜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박사와 우츠와가 다시 한 화면에 잡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설령 그때의 박사가 과거의 박사와 다르고, 우츠와도 기억을 잃어 이전의 우츠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츠와의 선택 역시 박사와의 재회를 영원히 없애는 결정이었다. 둘 가운데 누구도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기억을 지우면 우츠와의 현재 의사를 거스르게 된다. 그대로 두면 박사가 바라던 재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두 선택은 윤리적으로 같은 무게가 아니지만, 어느 쪽에서도 모두의 바람을 지킬 수는 없었다.

 

《Refind Self》는 플레이어의 성격을 진단한다고 시작했지만, 끝에 가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방식이 달라진다. 결과 화면의 여행자나 플래너보다, 우츠와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 선택이 나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선택에 게임은 몇 점을 주었을까

그때 게임은 어떤 성격의 이름을 붙였을까

 

나는 그 판정을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설명할 수 있다.

 

 

너는 무슨 성격이 나왔어?

엔딩을 본 뒤에도 나는 게임을 바로 끄지 않았다. 성격 결과를 다시 열고, 종합 데이터를 살펴봤다. 대표 유형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리더를 발견하고, 플래너가 어느 회차에서 강하게 나타났는지 확인했다. 가장 먼 성격인 평화주의자의 설명도 읽었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결과를 열어봤다. 《Refind Self》는 랜덤한 플레이어와 행동을 비교할 수 있다. 대표 성격과 보충 성격, 숨은 성격, 가장 먼 성격뿐 아니라 행동 일치율과 세부 선택까지 보여준다.

 

누군가는 나와 19.78% 비슷했다. 그 사람은 성직자가 주 성격이었고, 도전자와 연구가가 뒤를 이었다. 또 다른 사람과의 일치율은 6.90%에 불과했다. 그 사람은 상징 성격과 숨겨진 성격이 모두 러너였다. 게임의 설명에 따르면 상징 성격과 숨겨진 성격이 같을 때, 그 성향은 정체성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결과를 보다 보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게 된다. 결정을 빨리 내리는 사람일까. 효율적인 루트를 선호할까. 이 사람은 왜 자동판매기를 때렸을까. 첫 검사만 하고 그만둔 사람은 게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첫 결과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걸까.

왜 우리는 다를까

이 게임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지 않는다. 몇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남긴 행동만 보여준다. 게임이 나를 읽은 방식과 똑같다. 나는 불완전한 데이터를 보고 타인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Refind Self》는 혼자 하는 성격검사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너 MBTI가 뭐야?"라고 묻듯 "너는 무슨 성격이 나왔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진지하게 철학과 정체성을 이야기해도 되고, 사주풀이나 혈액형 성격론처럼 가볍게 비교해도 된다. 결과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따지면 대화는 금방 끝난다. 그러나 왜 그렇게 나왔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게임은 플레이 시간 이상으로 오래 남는다.

 


나는 이 행동을 했다

너는 저 행동을 했다

나는 플래너가 나왔고, 너는 성직자가 나왔다

 

개발자의 전작 《7 Days to End with You》는 다른 사람과 해석을 나눌 때 커지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 대화는 게임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Refind Self》는 비교와 공유를 게임 속에 넣었다.


전작에서는 내가 게임의 말을 번역했다

이번에는 게임이 내 행동을 번역한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번역문까지 들려준다

 

 

결과 화면 밖의 고민들 

게임은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보여준 것은 몇 시간 동안 작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른 행동뿐이다. 현실의 나는 더 많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린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상대와 장소, 기분에 따라 결정은 달라진다.

 

플래너는 게임 속 자원을 관리한 나일 수 있다.

연구가는 이야기를 놓치기 싫었던 플레이어일 수 있다.

여행자는 현실의 나와 게임 속의 나를 모두 닮았을 수 있다.

 

게임은 그 작은 기록을 여행자와 플래너, 리더라는 말로 번역했다. 그 번역에는 맞는 부분도 있었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틀렸다고 느낀 순간조차 나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맞았다고 느낀 이름 앞에서는, 내가 언제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과거를 되짚었다.

 

《Refind Self》는 내 진짜 성격을 발견했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성격진단 게임을 표방한 이상, 그 한계는 분명 약점이다. 다만 이 작품의 가치는 진단의 정확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MBTI나 사주풀이처럼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 결과를 공유하며 웃고, 친구와 비교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유형을 골라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행동과 성격, 기억과 정체성, 타인을 정의할 권리에 관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입구는 가볍지만 안쪽은 제법 무겁다. 무엇보다 이 게임은 자신의 한계를 플레이 실패로 바꾸지 않는다. 진단이 틀렸다고 느껴도 작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왜 틀렸는지 설명하는 순간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임의 번역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답할 자리가 남는다.

 

《Refind Self》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게임이 나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번역에 동의하고, 반박하고, 문장을 고치며 나 자신을 다시 설명했다. 게임의 판정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판정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평가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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