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여자가 내는 소리는 언어처럼 들리지 않았다. 몇 음절의 낯선 말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분명 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외계 생명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몸이 불편한 나를 돌봐주고, 집 안을 함께 돌아다니며, 내가 사물을 가리킬 때마다 무언가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간호사인지, 가족인지, 연인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지, 그녀가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日本語で読む方へ :本稿では、『7 Days to End with You』を、言葉と誤解、そして解釈をめぐるゲームとして考察する。「機密」だと思っていた言葉が「人間」だと分かった瞬間、私の中で作られた諜報物語は崩れ去った。彼女の言葉を理解するほど、その人物はより人間的に見えた。しかし、理解することは許すことではない。本作の優れた発想を評価する一方、最も豊かな物語が正確な解読と単調な反復の先に閉ざされている点を批判する。 ※警告以降は物語とエンディングに関する重大なネタバレを含む。 |
For English Readers :This essay examines 7 Days to End with You as a game about language, mis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A word I understood as “secret” eventually turned out to mean “human,” collapsing the espionage story I had constructed in my mind.As I learned the woman’s language, she became more human—but not more forgivable. I admire the game’s central idea, yet criticize how its richest story is locked behind exact answers and repetitive late-game play. Major story and ending spoilers appear after the warning. |
주인공은 기억을 잃었다. 정확히는 기억뿐 아니라 언어도 잃었다. 눈앞의 사물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기억상실은 이야기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다. 대개 주인공이 과거를 잊었다는 설정으로 사용된다. 인물은 혼란스러워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외계어 보듯 대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우리는 연인이었다”고 설명하면 그 말이 사실인지 의심할 수는 있어도, 문장의 뜻까지 해독할 필요는 없다.
《7 Days to End with You》(이하 7 days)는 그 당연한 안전망을 걷어낸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혼란을 지켜보는 대신, 그와 똑같은 무지 속에 놓인다. 기억상실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을 붙이는 일
집 안의 사물을 건드리면 여자가 낯선 단어를 말한다. 플레이어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추측해 단어장에 직접 적어넣는다. 초반에는 비교적 알기 쉬운 것부터 시작한다. 같은 모양의 물건이 서로 다른 색깔과 개수로 놓여 있고, 비슷한 문장 안에서 몇몇 단어가 반복된다. 어느 말이 물건의 이름이고, 어느 말이 색깔이나 숫자인지 대조해볼 수 있다. 크기가 다른 붕대를 비교하면 작다와 크다 같은 말도 짐작할 수 있다.


요리는 조금 더 직접적인 검증 수단이다. 낯선 언어로 쓰인 조리법을 읽고 재료를 넣으면 성공과 실패가 표시된다. 그전까지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했던 단어가 결과를 통해 확인된다. 《오브라 딘 호의 귀환, 2018》에서 이름과 사인을 소거법으로 맞히듯, 이미 알아낸 숫자와 재료를 이용해 남은 단어를 좁혀갈 수도 있다.
내가 적은 뜻은 이후 같은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원래의 문자와 함께 표시된다. 아무 의미도 없던 소리 위에 잔, 2, 청색 같은 말이 하나씩 붙는다.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오면 전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그러나 사물의 이름을 알아냈다고 해서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 기억, 원하다, 사라지다 같은 말은 여자의 주석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장면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비교하고, 함께 놓인 단어와 여자의 몸짓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정확한 뜻을 확정하기 어렵다.
예컨대 '원하다'를 '욕심'이라고 적으면 평범한 바람에도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간다. '사라지다'를 '실망하다'로 이해하면 실종자를 찾는 이야기가 감정에 관한 이야기로 바뀐다. 명사는 얼추 맞더라도 동사의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하면 문장 전체의 방향이 뒤집힌다.

나는 확실하다고 생각한 단어는 그대로 적고, 자신 없는 말에는 별표를 붙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된 말은 같은 색으로 표시했다. 새로운 용례를 발견하면 이전 문장으로 돌아가 뜻을 고쳤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별표가 하나씩 사라지기도 했지만, 반대로 확신하던 말을 재검토하고 다시 의심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 단어장은 정답지가 아니라, 새 정보를 얻으면 수정되는 가설 모음집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어 하나를 바꾸면 그 말이 포함된 수많은 장면이 함께 달라졌다. 지식은 단순히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계를 무너뜨린 적도 있었다. 내가 쓰고 있던 것은 번역본이 아니라 7 Days의 세계관이었다.
처음 통했던 날
가끔 그녀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문장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모은 단어와 표정, 상황을 조합하면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단어장에 등록된 말 가운데 하나를 골라 답한다. 알맞은 말을 고르면 그녀는 잠시 놀라고, 기뻐한다.
그전까지 내가 한 해독은 전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잔'이라고 적은 단어가 정말 잔인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고른 말에 상대가 반응한다. 내 뜻이 실제로 전해진 것이다.
그 순간에는 퍼즐의 정답을 맞혔다는 쾌감보다, 서로 단절되어 있던 두 사람이 잠시 이어졌다는 느낌이 먼저 온다. 나는 이때 영화 《 미라클 워커, 1962》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헬렌 켈러가 설리번 선생이 손바닥에 반복해서 그렸던 신호를, 그저 놀이나 장난이 아니라 지금 손에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다. 아무 의미도 없던 신호가 갑자기 세계의 한 부분과 연결되고, 그 신호를 보내던 사람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함께 이해했다.

눈앞의 여자는 처음부터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내가 이제야 조금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뻤다. 언어를 배우는 일이 곧 그녀와 가까워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에게 조금씩 호의가 생겼다. 그녀는 몸이 약해진 나를 돌봐주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했으며, 내가 자기 말을 이해하면 진심으로 기뻐했다. 말이 통하면 오해가 풀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 관계도 깊어질 것 같았다.
7 Days는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이 통한다고 해서 언제나 가까워지는 것만은 아니다.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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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첩보물
나는 한 단어를 오랫동안 ‘기밀’이라고 적어두었다. 신문의 헤드라인과 전쟁에 관한 대화, 방문객의 말에서 반복되는 단어였다.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감추거나 빼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에서는 전쟁과 죄에 관한 단어도 나타났다. 그 몇 가지 단서를 연결하자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는 국가나 조직이 저지른 일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요한 기밀이나 설계도를 빼돌린 뒤 도망쳤다. 눈앞의 여자는 그런 그를 숨겨주고 있으며,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남자와 기밀을 되찾으려 한다.
신문의 흐릿한 픽셀 그림도 거대한 설계도를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실험실의 기묘한 기구들은 비밀 연구소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전쟁, 죄, 기밀, 실종이라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 제법 그럴듯한 첩보물이 완성됐다. 내가 《셜록 홈즈》에서나 읽었던 브루스-파팅턴 호 설계도가 여기 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틀렸다. 그때 내가 가진 정보로는 그렇게 읽을 만했다. 몇 개의 오역이 서로를 받쳐주며 하나의 인과를 만들었다. 잘못 알아들은 단어가 엉뚱한 문장을 만든 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다른 장르로 바꿔놓았다.
나는 여자를 식탁에 남겨두고 혼자 실험실로 향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제대로 조사하기 어려웠던 장소가 있었다. 나는 암호를 입력하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다섯 글자의 암호를 알아내자 숨겨진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버려진 옷가지와 커다란 칼, 구속구처럼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었고, 하수구에는 사람의 내장처럼 보이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 게임을 죽어가는 남자와 그를 돌보는 여자의 애틋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과거에 연인이었고, 남자는 기억을 잃었지만 여자는 작은 관계부터 다시 만들어가려 한다. 조금 쓸쓸하지만 따뜻한 순애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밀 문을 여는 순간 그 인상이 무너졌다. 실험실의 책과 도면도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의학 서적이라 생각했던 책은 죽음을 멈추는 방법에 관한 기록처럼 읽혔다. 조악한 픽셀 덩어리라고 넘겼던 바닥의 형태는 척추와 갈비뼈처럼 보였다. 그래픽이 정교했다면 오히려 더 일찍 진상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형태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눈앞의 증거를 보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내가 만든 이야기 안에서 순화할 수 있었다. 기억의 흐릿함을 표현하는 픽셀 그래픽이 사물의 정체까지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밀’이라고 적었던 말이 실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밀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방문객은 국가기밀을 되찾으러 온 추적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사라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집 안의 실험실과 숨겨진 방, 여자의 거짓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됐다. 단어 하나를 바꾸자 신문, 집, 여자, 방문객이 모두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7 Days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정답을 적어넣을 때보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찾아왔다. 잘못된 번역으로 세운 세계가 무너지고, 같은 장면들이 그 잔해 위에서 새롭게 배열됐다. 이 게임은 낯선 세계를 이해하는 체험이면서, 내가 얼마나 쉽게 세계를 오해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이기도 했다.
그녀가 가르쳐준 이름
진상을 거의 알아내자, 그녀의 이름이 시오(Theo)이고 주인공의 이름이 보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오는 죽은 연인 보일을 다시 만나기 위해 연금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낸 보일은 과거의 기억과 언어를 잃었고, 수명은 일주일 남짓이다. 그래서 시오는 보일이 죽을 때마다 다시 그를 만든다.
그 재료는 다른 인간의 피와 신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실종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숨겨진 방의 피와 옷가지, 구속구는 실험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시오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증거였던 것이다.
나는 한때 시오의 다정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이 약한 보일을 돌봐주고 말을 가르쳤다. 보일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도, 과거를 억지로 떠올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시오는 두 사람에게 추억이 있었고 서로 사랑했지만, 보일은 그것을 잊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작은 사랑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말은 참 다정하다. 그녀는 잃어버린 과거의 관계를 강요하는 대신, 현재의 두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기억상실을 다룬 이야기에서 보기 드물게 성숙한 태도다.
그러나 진상을 알고 나면 같은 말이 다르게 들린다. 보일은 언어와 기억이 없는 상태로 깨어났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세계를 이해하려면 대부분 시오의 말을 거쳐야 한다. 사물의 이름부터 자기 이름, 두 사람의 과거까지 모두 시오에게 배운다.
시오는 보일에게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세계에서 보일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존재에게 “너는 보일이고, 나와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보일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다. 집 밖의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신문은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방문객의 말도 해독하기 어렵다.
1회차에선 시오가 보일을 돌보는 모습만 보였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자 실은 돌봄 속에 보호와 통제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시오가 단순한 악인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난 뒤, 나는 그녀를 이전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시오는 보일을 잃은 상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보일이 일주일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복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 살인과 실패를 되풀이하는 편을 선택했다. 자신이 한 일을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보일이 자신의 죄를 이해하고, 자신을 심판해주기를 기다렸다. 반복을 끝내는 결말에서 시오는 보일의 손에 죽으면서 오래전부터 그 순간을 바랐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타인을 죽였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책임마저 되살린 보일에게 넘겼다. 이기적이고 비겁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이다.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좋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재회
621 엔딩(팬들이 붙인 임시 명칭이다.)에서 보일은 시오가 저지른 살인과 연금술, 일주일의 삶을 모두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계속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시오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희생해 보일을 만들고, 보일은 기억을 잃고 태어나 새롭게 배우고, 일주일이 지나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화면에 END가 나타난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보일이 다시 눈을 뜨자 시오가 인사한다.


그리고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된다. 겉으로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결말이다. 사랑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선택은 죽음과 부활을 반복 가능한 일상으로 바꿀 뿐이다. 그들에게 시선을 맞추면 행복한 결말처럼 볼 수도 있다. 보일은 시오의 죄를 받아들이고, 시오는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함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바깥에는 계속 희생될 사람들이 있다. 보일이 시오를 용서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시오가 자신의 처분을 보일에게 맡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을 해친 공적인 범죄가 두 연인 사이의 사적인 문제로 축소되는 것이다.
반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오를 사랑하는 선택인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살인을 승인하는 행동이다. 상대의 죄까지 받아들였을 때, 두 사람의 사랑은 완전한 감옥이 된다.
다른 엔딩에서 보일은 반복을 끝내기 위해 시오의 목을 조른다. 더 이상의 희생과 부활을 막는다는 점에서는 가장 직접적인 해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오는 저항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보일의 손에 죽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처벌인가. 아니면 시오가 원했던 죽음을 보일이 대신 실행해주는 일인가.

621 엔딩에서 사랑은 끝없는 부활과 살인을 정당화한다. 반대편 엔딩에서는 사랑이 두 사람의 정사(情死)를 정당화한다. 양쪽 다 흥미로운 엔딩이다. 그런데 어떤 엔딩을 봐도 시오는 자신의 죄를 사회와 희생자들 앞에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문제를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한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나서야 이런 판단이 가능해졌다. 말을 몰랐을 때 나는 시오의 행동에서 친절과 사랑을 먼저 확인했다. 말을 알아들은 뒤에는 그 사랑 안에 살인과 소유욕, 자기기만, 죄책감이 함께 있다는 사실까지 보게 됐다. 그녀의 다정함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오는 보일을 사랑한다. 문제는 그 사랑이 진실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는 시오를 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전보다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전처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7 Days는 언어를 배우면 상대와 가까워질 것처럼 시작한다. 실제로 말이 처음 통했을 때는 그랬다. 내게는 이것이 강력한 동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소통이 반드시 화해나 공감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상대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 사람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언어는 '시오와 나' 사이의 장벽을 없애지 않았다. 언어가 선명해질수록, 나와 그녀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의 윤곽도 또렷해졌다.
집이 대화를 멈췄을 때
시오를 이해한 뒤 시작되는 질문들이 이 작품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보일은 과거의 보일과 같은 사람인가. 기억도 육체도 달라졌다면 이름만으로 동일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시오가 가르쳐준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억을 되찾는 일인가, 새로운 정체성을 주입받는 일인가. 반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인가, 공범이 되는 일인가. 시오를 죽이는 것은 처벌인가, 자살 방조인가.
해독에는 정답이 있다. 그러나 그 정답을 알아낸 뒤 시오를 어떻게 바라볼지에는 정답이 없다. 게임은 가장 닫힌 언어 퍼즐 뒤에 가장 열린 이야기를 숨겨두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문제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첫 회차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다. 보일은 일주일이 지나면 죽고, 플레이어는 다시 첫 날로 돌아간다. 다만 이전 회차에 작성한 단어장은 그대로 남는다. 소음처럼 들렸던 대화가 조금씩 문장으로 변하고, 이미 본 장면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된다.
같은 장면도 다르게 보인다. 《메트로이드》의 백 트래킹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는 지식이 풍경을 바꾼다. 초반에는 집 전체가 하나의 교재처럼 작동한다. 물건을 건드리면 시오가 말을 하고, 요리는 가설을 검증하며, 밤의 꿈은 특정 단어의 정답과 오답을 판정한다. 어떤 날에는 방문객이 찾아오거나 평소와 다른 대화가 발생한다. 모르는 게 많아도 계속 관찰하면 다음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예전에는 있었다.
하지만 집 안의 물건을 대부분 조사하고 주요 사건을 본 뒤에는 새로운 자료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남은 것은 이미 확보한 문장들을 단어장에서 반복 회상하여 조합하는 일뿐이다. 내 생각이 부족한 건지, 중요한 예문을 놓친 것인지, 지금 가진 자료만으로는 풀 수 없는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같은 일주일을 다시 보내도 새로운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7 Days의 전반부가 관찰과 수집의 게임이었다면, 후반부는 이미 주어진 자료만으로 번역문을 완성해야 하는 시험으로 바뀐다. 핵심 단어 하나를 잘못 이해했을 때의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인간, 원하다, 사라지다, 생명, 기억 같은 말은 여러 문장에서 반복된다. 하나를 틀리면 그 문장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포함된 장면 전체가 함께 변형된다.
나는 이 작품이 어렵다고(영어 화자는 훨씬 나을 것이다.) 느꼈지만, 사실 어려운 퍼즐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아직 조사하지 않은 장소가 있거나, 다음 회차에 새로운 예문이 나오거나, 현재의 가설을 시험할 방법이 있다고 느끼면 계속 플레이할 수 있다. 7 Days의 후반부에서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앞으로도 문제를 풀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임이 더 이상 내게 줄 것은 없는데, 정답만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반복을 보조할 편의 기능도 부족하다. 이미 내용을 아는 꿈을 건너뛸 수 없고, 단어 회상 중 다른 잘못된 단어를 발견해도 수정할 수 없다. 단어장에는 검색 기능이 없으며, 여러 장면을 오가는 조작은 지독하리만치 불편하다. 시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흐르는지도 명확하지 않아, 새로운 사건을 보기 위해 하루를 보내려 해도 얼마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각각만 보면 사소한 불편일 수 있다. 그러나 반복을 핵심 구조로 삼은 게임에서 이 문제들은 서로 맞물려 피로를 키운다. 새로운 단서가 부족해진 상태에서 같은 장면을 다시 보고, 같은 방을 돌아다니고, 같은 꿈을 기다려야 한다. 플레이어는 아직 말을 배우고 있는데 게임은 수업이 끝났다고 판단한다. 초반에는 집 전체가 말을 걸어왔다. 정작 가장 어려운 단어가 풀리지 않자, 집은 침묵을 지킨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어디까지 내 것이었나
게임은 시작할 때 플레이어가 받아들인 이야기는 모두 올바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정말 그런 게임처럼 느껴진다. 어떤 말을 사랑이나 추억, 욕심으로 적느냐에 따라 시오의 말투와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다. ‘인간’을 ‘기밀’로 이해했던 나도 한동안 전혀 다른 이야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7일째가 되면 게임의 태도가 달라진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맞은 단어로 대답해야 한다. 이어지는 질문에서도 시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해했다’는 뜻의 말을 골라야 한다. 틀리면 보일은 그대로 눈을 감고, 짧은 문구와 함께 게임이 끝난다.
정확한 답을 고르면 그제야 긴 고백과 여러 선택지가 이어진다. 플레이어가 해석한 이야기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사건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결말을 선택할 수 있다.


단어장에는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같은 말을 욕심, 희망, 소원, 원하다 가운데 무엇으로 부를지는 플레이어의 자유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해진 뜻과 사건이 있다. 시오는 사람들을 죽였고, 보일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했으며, 실종 사건에는 명확한 진상이 있다.
세계는 플레이어의 이해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플레이어 머릿속에 있는 세계다. 내 오역으로 만들어진 첩보물은 플레이 과정에서는 흥미로웠지만, 그 이야기가 완성되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질문에 알맞은 말을 고르지 못하면 내가 만든 해석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아직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실패에 가까운 결말을 맞는다.
그러므로 이 게임의 자유는 해석이 아닌 오해에서 온다. 때로는 오해 자체가 훌륭한 경험을 만든다. 하지만 더 깊은 이야기에 들어가려면 결국 오해를 수정해야 한다. 이게 나쁜 구조라는 뜻은 아니다. 말의 의미를 추측하고,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다가,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지는 게임도 충분히 흥미롭다.
다만 그것은 "모든 이야기가 옳은 게임"과는 다르다. 정확한 해독 뒤에 비로소 가장 풍부한 질문이 시작되는 작품이라면, 더 많은 플레이어를 그 자리까지 데려갈 필요가 있었다. 시오의 고백 정도는 해독 수준과 상관없이 어느 정도 보여주고, 알아낸 단어의 수에 따라 대사의 선명도와 선택지의 폭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플레이어도 장면을 통해 사건의 윤곽을 볼 수 있고, 언어를 많이 해독한 사람은 더 구체적인 의미와 추가 선택지를 얻는 방식 말이다.
그렇게 했다면 플레이어 간의 차이는 완주 여부가 아니라 이해의 깊이가 되었을 것이다. 집 안의 신문도 좋은 기준점이 될 수 있었다. 기존 신문은 날짜와 헤드라인만 번역되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알아낸 단어를 중심으로 본문이 조금씩 읽히게 만드는 것이다.
| 전쟁이 끝났다. 보일이 사라졌다. 전쟁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 |
이 정도만 알 수 있어도 시오의 말과 집 밖의 정보를 비교할 수 있다. 잘못 이해한 단어를 수정할 기준이 생기고, 다음 회차에는 새로운 자료가 열린다는 기대도 생긴다. 현재의 반복은 어느 시점부터 같은 자료를 더 오래 고민하는 일이 된다. 새로운 예문과 정보가 조금씩 열렸다면 반복은 배우고 발견하는 과정으로 남았겠지만, 이 게임의 루프는 그렇지 못했다. 명색이 루프 게임인데 반복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동시에 작품의 한계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쉽다. 이 게임의 마찰이 플레이어의 이탈을 막지 못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7 Days는 플레이를 마친 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더 커지는 작품이다. 예를 들면,
| 나는 이 단어를 이렇게 이해했다. 나는 처음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숨겨진 방을 발견한 뒤에야 이 문장을 고쳤다. 나는 현재의 보일을 과거의 보일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오의 선택을 이해하지만 용서할 수 없다. |
이 작품의 곳곳에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씨앗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복잡한 번역 시험이 걸러낸다. 불완전한 소통과 기억, 비극적인 사랑과 윤리적 선택에 끌려 게임을 시작한 사람도 핵심 단어 몇 개가 막히면 작품의 가장 풍부한 부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게임은 비밀을 너무 오래 감춘 탓에, 그 비밀을 놓고 이야기할 사람의 수까지 줄이는 실책을 저질렀다.
모든 말을 알아듣고 나서
첫 만남에서 나는 시오의 행동을 선의로 읽었다.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안다. 그녀가 보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도, 그 사랑이 살인과 통제, 자기기만을 함께 품고 있었다는 것도.
진상을 알수록 시오는 납작한 악인이 아니라 한층 인간적인 인물이 됐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호의를 느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무엇을 원했고 왜 멈추지 못했는지 알게 된 뒤, 나는 예전처럼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잃은 플레이어가 잘못된 해석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다시 그 말을 고치면서 같은 장면을 새롭게 읽게 한 발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끝까지 따라간 뒤에는, 게임이 가장 풍부한 이야기에 도달하는 길을 지나치게 좁혀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7 Days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이해한다. 왜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지도 이해한다. 그래서 오히려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시오에게도, 이 게임에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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