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2022)
포켓몬은 매력적이다. 동물을 데포르메한 캐릭터, 온갖 취향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캐릭터, 귀여움과 멋짐이 공존하는 캐릭터. 어린 시절 동물과 공룡에 열광하던 내게, 포켓몬은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었다.
포켓몬스터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SBS의 애니메이션 왕국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삼립의 국진이빵이 큰 성공을 거두자 샤니는 포켓몬빵으로 맞불을 놨다. 포켓몬빵은 사회 문제로 대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스티커만 갖고 빵을 버렸다는 이유로) 플로피 디스크는 <포켓몬> 불법 복제의 산실이었으며,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스핀오프작마저 흥행몰이를 했다. 문방구엔 온갖 포켓몬스터 용품으로 가득 찼고, 극장판 <뮤츠의 역습>이 개봉되기도 했다. 정발판 <포켓몬스터 금·은>은 10만 장을 팔았다는 카더라가 돌았다. 콘솔의 불모지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기록한 것이다.
포켓몬 게임은 빠와 까가 극렬하게 나뉘는 걸로 유명하다. 칭찬일색인 초창기 포켓몬 게임과 달리, 최근의 포켓몬 게임은 불평불만이 속출하는 프랜차이즈로 전락했다. 돌이켜보면 <울트라 썬・문>이 시발점이었다. 위험 신호는 감지됐으나 이렇게 퇴보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런 비판은 대개 마니아에게서 나왔다. 절대 다수의 라이트 게이머에게 있어, <포켓몬스터>는 아쉽긴 해도 꽤 괜찮은 게임이었다. <포켓몬스터>는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니며, '게임'으로서의 평가는 이 프랜차이즈에 어울리지 않는다. '게임'이라는 카테고리에 포켓몬을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다.
캐릭터 게임에서 팬심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슈퍼로봇대전> 시리즈는 낡은 게임 디자인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겟타로보> <건담> <가오가이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시리즈는 여전히 생명줄을 부여잡았다. 캐릭터 게임을 '게임'의 엄격한 잣대로 봐야만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배틀 타워는 이제 없다. 콘테스트, 포켓우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브 컨텐츠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6세대(X・Y)부터 관측되었다. 8세대(소드・실드)에선 파고들기 요소가 더욱 줄어들어, 전국 도감 완성 외에는 이렇다 할 컨텐츠가 많지 않다. 마니아의 불만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다. 그래픽이 형편없다는 비판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상은 <포켓몬스터>가 혁신없이 퇴화하는 현상에 대한 불만이다.
기나긴 정체의 터널을 벗어나
긍정적인 변화가 포착된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Pokémon LEGENDS 아르세우스, 2022>(이하 아르세우스)는 그동안 포켓몬이 간직해온 전통적인 가치를 대거 갈아엎었다. 이를테면 길 찾기, 월드 맵, 인카운터, 통신교환, 액션 같은 것들 말이다.
오픈 월드와 포켓몬 월드의 조합.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거대한 세계를 자유롭게 텀함하고 포켓몬의 생태를 엿본다. 포켓몬의 습성을 파악해, 잘 유도해서 볼의 특성을 살려 포획에 도전한다. 오픈 월드는 드넓은 공간에 오브젝트를 어떻게 채워 넣느냐가 중요한데, 그 점에서 포켓몬만큼 유리한 타이틀은 좀처럼 없을 것 같다. 그저 포켓몬을 필드에 골고루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오픈 월드의 절반이 채워진다. 남은 건 포켓몬의 개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정도다. 동굴을 탐색하던 중, 삐삐가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본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름 | 도감 설명 |
삐삐 | 보름달 밤에 삐삐가 모여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진다고 전해진다. |
연꽃몬 | 물이 깨끗한 연못에 사는 포켓몬. 머리의 잎사귀에 탄 작은 포켓몬을 건너편까지 운반해줄 때도 있다. |
2022.03.02 - [게임 리뷰] - New 포켓몬 스냅 (2021)
New 포켓몬 스냅 (2021)
비록 마감이 엉성하긴 했지만, 포켓몬 스냅은 많은 이들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게임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포켓몬 게임이 출시되었으나 포켓몬 스냅의 속편은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필름, 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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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포켓몬 스냅>은 포켓몬의 생태를 가장 잘 보여준 타이틀이다. 그러나 레일 슈터로 보여주는 정해진 그림과, 직접 필드를 누비며 포켓몬의 생태를 관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안타깝게도 포켓몬 월드를 탐색하고 생태를 관찰하는 게임은 본가 시리즈는 커녕 외전작을 포함해도 극히 일부 뿐이다. (그나마 포켓몬 스냅 시리즈가 근처까지는 갔다.)
<아르세우스>는 포켓몬의 생태를 미약하게나마 구현했다. 이는 후속작이자 정규 타이틀이었던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또한 마찬가지다. 포켓몬스터를 오픈 월드로 만들 때 얻는 강점이 무엇일까. 바로 탐험이다. 방대한 포켓몬 세계로의 탐험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이제 와서 낡은 배틀 시스템을 고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탐험 및 포획 파트에서 액션을 구현하고, 세계 곳곳에 포켓몬을 적절히 배치하고, 포켓몬의 생태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르세우스>와 <스칼렛・바이올렛>의 사례로 보건대, 포켓몬과 오픈 월드의 조합은 치트키와 같다. 두 가지 요소를 조합해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포켓몬과 오픈 월드를 조합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오픈 월드로 포켓몬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했다.
게임 얘기에 앞서 서론이 길었다. 얼마 전 포켓몬 게임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드 버전이 갓겜이지, 골드 버전이 갓겜이지" 같은 소리는 골백번도 넘게 들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왜 훌륭한지 풀어 설명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게임'으로서의 포켓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최신작 <스칼렛・바이올렛>은 찬반이 극도로 갈리는 타이틀이다. 마감이 어설프다 못해, 정녕 거대 자본이 들어간 작품이 맞는지, 프로의 작품이 맞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 정도다. 반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평도 많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 이 리뷰는 바이올렛 버전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스칼렛・바이올렛>은 시리즈 최초로 캐릭터 생성 단계부터 커스터마이징을 지원한다. 다만 한국의 온라인 게임이나 <몬스터 헌터> 같은 다양성을 바란다면 실망할 것이다. 고작 몇 가지 프리셋을 지원하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반갑다...라는 마음도 잠시, 알고 보니 교복 외에는 입을 옷이 없다. 세상에, 교복이라도 잘 좀 만들던가 이게 뭐람.
매번 그랬듯이 집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모험. 집을 떠날 때의 애틋함 따위는 없다. 어린 아이가 집을 떠나는데 어머니가 걱정하는 내색도 없고, 주인공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근거림 뿐, 불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리즈 전통답게 아버지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새삼 <루비・사파이어>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실감이 난다.
<스칼렛・바이올렛>은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플레이어는 학생이 되어 커리큘럼을 듣고, 자율적인 목표를 수립하여 여행을 떠난다.
말이 자율 학습이지 큰 목표는 알아서 정해준다.
이 얘기는 잠시 미루도록 하자.
전설의 포켓몬은 포켓몬스터의 인기를 견인해온 일등 공신이었다. 게임프리크는 각 포켓몬의 출현 조건, 희귀도를 다르게 책정했고, 전설의 포켓몬은 특별한 던전을 만들어 감춰두었다. 친구와 교류하여 진화 조건을 알아내고, 희귀한 포켓몬을 찾아 필드를 누빈다. 사파리 존에서 미뇽을 처음 발견했을 때, 쌍둥이섬의 퍼즐을 풀어 프리저가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의 즐거움이란.
<루비・사파이어>는 전설의 포켓몬 그란돈, 가이오가의 대립을 메인 스토리로 풀어냈다. 숨겨진 요소, 덤 취급 받던 전설의 포켓몬이 스토리에 녹아들면서 <포켓몬스터>의 내러티브는 한 층 진화했다.
전설의 포켓몬은 후반부에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칼렛・바이올렛>은 이러한 구도를 탈피, 처음부터 전설의 포켓몬를 선물하는 초강수를 뒀다. <스칼렛>의 코라이돈, <바이올렛>의 미라이돈은 탈 것이 되어 충실한 발이 되어준다.
팔데아의 세계에는 수백 종류의 포켓몬이 필드에 널려있고, 플레이어는 전설의 포켓몬을 타고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기획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곳을 쏘다닐 순 없고, 라이딩 스킬을 활용해 장애물을 돌파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젤다의 전설> <메트로이드> 같은 설계를 연상케 한다.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너무 큰 자유를 준 댓가일까, 게임프리크의 오픈 월드는 불완전하다. 처음에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길잡이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 시티에 도착하면, 학교에서 게임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개발자의 의도대로 플레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플레이어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의외의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오픈 월드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예측했어야 했다.
나는 게임 초반, 게임의 목표와 관계없이 원하는 곳을 누볐다. 헤맨지 한 시간쯤 됐을까, 결국 백기를 들었다. 어린아이의 걸음걸이는 더디다. 팔데아 월드는 억지로 잡아 늘려, 탐험할 곳 하나 없는 지루한 장소가 쭉 이어진다. 적어도 탈 것(코라이돈, 미라이돈)을 얻기 전까지는 강제 진행이 필요해 보였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2017>(이하 야숨)은 필드 곳곳에 탑을 배치해 이정표로 삼았다. <스칼렛・바이올렛> 또한 <야숨>을 많이 참고했지만, 깊이는 털끝만큼도 배우지 못했다. <야숨>의 탑은 등반하면 지형 정보가 새롭게 갱신되고, 높은 시점에서 사방을 훤히 둘러볼 수 있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탑에 올라 결정하는 것이다.
<스칼렛・바이올렛>의 레이드 동굴은 <야숨>의 탑과 유사한 외형을 갖췄다. 포켓몬 게임에서 "희귀한 포켓몬을 잡을 기회"는 대단히 값진 보상이다. 그러나 게임 시스템을 관통하는, 레이드 동굴이 맵 디자인에서 갖는 이점은 어디에도 없다. <야숨>에서 탑을 발견하면 대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탑을 찾음으로써 탐험의 경험이 확장되는 것이다.
레이드 동굴은 세심히 배치되긴 커녕 무작위로 나열된 느낌을 받았다. 내용물도 아쉽다. 레이드는 약점을 찌르고 저항을 앞세우는 <포켓몬 GO> 방식의 배틀을 떠올리게 한다. 콘솔 게임의 주력 컨텐츠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레이드는 비슷한 패턴으로 점철되어, 플레이 타임을 늘리기 위한 컨텐츠로 전락했다. 발견이 새로운 경험으로 이어졌던 <야숨>의 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2021.08.08 - [게임 리뷰] - 포켓몬 GO (2016)
포켓몬 GO (2016)
2016년 포켓몬 GO는 전례 없는 대성공을 이뤘다. 포켓몬 GO는 직접 거리에 나가 포켓몬을 잡는 게임이다. 기존의 포켓몬스터 게임이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면 포켓몬 GO는 현실에 있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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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바이올렛>의 필드는 공허하다. 가끔 떨어진 아이템, 야생 포켓몬, 레이드 동굴, 트레이너, 어쩌다 마주치는 마을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저쪽엔 뭐가 있을까" 같은 두근거림이 전무하다. 팔데아 10경은 NPC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장소다. 실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을 뿐더러 찾아봤자 실망감만 커질 뿐이다. 특별한 장소마저 이 모양인데 일반 필드야 어떻겠는가. 인상이 흐릿하다 못해 기억에 남는 마을조차 없을 정도다. 마을은 죄다 공실인지, 출입 가능한 건물이 거의 없다.
마을 이야기를 해보자. 배에 몸을 싣고 도착한 곳은 어느 해변이었다. 해안가에서 팔자 좋게 늘어진 사람들. 뜨거운 태양 아래 기세 좋게 배틀을 걸어오는 사람들. 팡파레가 울리는 BGM은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팡파레는 이윽고 갈모매의 노랫소리로 변한다. 서쪽엔 시장의 북적거림이, 동쪽은 조선소와 과학박물관이 자리잡았다. 북쪽에는 콘테스트 회장이 있는데,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콘테스트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낯선 분위기임에도 편안한,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다.
2024.08.05 - [게임 리뷰] -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2)
포켓몬스터가 대성공을 거둔 1996년, 닌텐도는 가정용 콘솔 '닌텐도 64'를 발표한다. 90년대 중반까지 업계 톱이었던 닌텐도의 위상은, 스퀘어의 소니 이적을 기점으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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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항구마을이라도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マリナードタウン/チャンプルタウン・1時間耐久【ポケモンSV BGM】 - YouTube
경매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마을. 변두리에 컨테이너 시설물 같은 체육관이 전부다. 사람들은 활기차게 말을 걸어오지만, 그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잿빛도시에서 지구제구리와 환경 이야기를 하던 노인장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포켓몬이 가끔 쓰레기를 주워온다며, 인간들의 무분별한 투기가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걸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한다. 지구제구리의 특성을 활용해, 아무 것도 아닌 대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떠들썩한 경매장 분위기와 사운드트랙의 묘한 부조화. 영혼 없는 대사로 가득찬 사람들. 도시를 둘러봐도 볼거리가 단 하나도 안 보인다. 그나마 하나 있는 경매장은 20년 전 게임에도 없을, 무작정 입찰하는 게 전부인 허접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마을의 인상 따위 흐릿한 게 당연하다.
포획은 컨텐츠의 일부일 뿐이다. <포켓몬스터> 시리즈는 도감 수집과 스토리 모드 외에도 꾸준히 컨텐츠를 제공했다. <크리스탈 버전>의 배틀 타워, <루비・사파이어>의 콘테스트, <블랙 2・화이트2>의 포켓우드 같은 것들 말이다.
<스칼렛・바이올렛>는 오픈 월드를 채택했다. 장르에 어울리는 새로운 컨텐츠가 꼭 필요했다. 땅에 떨어진 아이템과 레이드 동굴을 마구잡이로 배치할 게 아니라, 사람과 포켓몬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포켓몬이 팔데아 지방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줬어야 했다. 혹은 <아르세우스>처럼 포획을 세분화하든지.
포켓몬 뒤에서 습격해, 체력을 빼놓고 몬스터볼을 던진다. (혹은 다짜고짜 퀵 볼부터 던진다.) 이 패턴을 매번 반복한 결과, 플레이어는 관성적으로 도감 수집에 열을 올린다. 문득 <아르세우스>의 포획 파트가 그리워진다. 이것도 잘 만들었냐고 하면 글쎄올시다 싶다만은.
<스칼렛・바이올렛>의 세계에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픈 월드는 정의가 모호한 장르다. 오픈 월드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은, 오픈 월드는 '열린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여는' 개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오픈 월드의 핵심은 탐험이다. 날씨 변화에 따라, 밤낮에 따라 등장하는 이벤트가 바뀌고, 무심코 길을 걷다가 작은 발견에 기뻐한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가상의 세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스칼렛・바이올렛>의 세계는 생동감이 없다. 날씨는 변하지 않고, 이벤트래봤자 신규 포켓몬이 등장하는 게 전부. 올라가보고 싶은 언덕, 구조물 따위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건 오픈 월드가 아니다.
9세대는 사진 촬영을 중요한 키워드로 내세웠다. 현실은 냉혹하다. 팔데아의 구조물들은 다들 밋밋하고, 필드에는 흥미로운 장소가 대단히 부족하다. 카메라를 다채롭게 활용하기도 어렵다. 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없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타인과 교류하라는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관광지에서 "사진 찍어달라" 부탁은 할 수 있지 않나. 들판에 행인 몇 명을 풀어놓든가, <마더 2>처럼 사진사를 파견하면 될 일이다. 그게 싫다면 다양한 뷰를 제공하든지.
꼭 이벤트를 넣지 않아도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스칼렛・바이올렛>에서 오픈 월드란 그저 마케팅적 수사일 뿐이다. 오픈 월드를 진정으로 탐구했다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진 않았겠지.
결국 남는 것은 메인 퀘스트와 단조로운 도감 수집뿐이다. <스칼렛・바이올렛>의 메인 퀘스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포켓몬 시리즈의 전통적인 퀘스트, "8개의 체육관을 제패해 사천왕을 타도하고 챔피언이 된다."는 챔피언 로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플레이어는 각 체육관을 자유롭게 찾아가 도전을 신청한다.
나는 배지를 네 개쯤 모은 뒤에야 베이크 체육관을 찾을 수 있었다. 초반 체육관이라는 점을 깨닫고 약한 포켓몬을 내보냈는데 레벨 차이가 띠동갑 수준이다. 다른 시리즈라면 모를까, 오픈 월드에서 레벨 스케일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꼭 이렇게 만들었어야만 했나.
스타더스트 스트리트는 팔데아 지방을 어지럽히는 스타단을 해산시키는 이야기를 그렸다. <스칼렛・바이올렛>은 루트와 관계없이 퀘스트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어, 챔피언 로드와 번갈아 플레이할 수 있다.
레전드 루트는 주인 포켓몬을 쓰러뜨리는 루트다. 결국 챔피언 로드, 스타더스트 스트리트, 레전드 루트 모두 누군가를 쓰러뜨린다는 점은 같다. 각 루트를 클리어하면 보상을 주는데, 그중에서도 레전드 루트의 보상이 유독 눈에 띈다. 라이딩 스킬이 없으면 탐험에 큰 지장이 생기기 때문.
순서상 7번째에 해당하는 베이크 체육관.
내게는 5번째로 방문한 체육관이 됐다.
캐릭터를 늘어놓는데 급급한 캐릭터 게임
캐릭터 게임은 돈이 열리는 나무와 같다. 작품의 팬층이 확고할수록,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점차 떨어지기 마련이다. <위닝 일레븐>(이하 위닝)과 <피파>가 처절하게 맞붙었을 때, <위닝>의 최전성기에도 <피파>의 판매량을 넘어서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로스터였다. 라이선스 경쟁에서 밀려 아스날은 아제감, 리버풀은 리갈즈로 개명되었고, 클로제는 크노다, 필립 람은 로메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이래서야 게임의 완성도는 둘째 문제다.
<스칼렛・바이올렛>의 완성도는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어떨까. 포켓몬 시리즈는 대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로스터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아픔을 겪었다. 유감스럽게도 <스칼렛・바이올렛> 역시 마찬가지다. 입국 불허된 포켓몬은 여전히 많고, 블루베리 아카데미(DLC 파트)의 테라리움 돔은 인공적인 느낌이 너무 강해, 포켓몬의 자연스러운 생태를 잘 구현하지 못했다.
<포켓몬> 게임의 핵심은 포켓몬이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나 매력적인 인간 캐릭터가 받쳐주지 못한다면, 포켓몬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포켓몬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 광활한 오픈 월드. 소재만큼은 일류다.
단, 조연 3인방은 달랐다. <스칼렛・바이올렛>은 라이벌을 훌륭한 조력자로 안착시켰다. 전작의 라이벌 호브, 마리, 비트의 역할이 제한적으로 그려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작 <썬・문>에 쏟아진 비판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잃어버린 이들이 아픔을 극복해 가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임팩트를 남겼다. 복수의 라이벌에게 이만큼 비중이 고루 배분된 작품은 여태껏 없었다. '더 홈웨이' 에피소드는 그동안 외면되었던 <포켓몬> 스토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스칼렛・바이올렛>의 수업은 꽤나 흥미롭게 표현되었다. 각 과목별로 전담 선생님이 배정되어 있고, 포켓몬 세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 수 있으며,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선생들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개별 스토리는 교사들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마치 영세 회사의 연애 게임에서나 볼법한 만듦새가 실망스럽지만, 컨텐츠 자체는 <페르소나> 시리즈의 커뮤니티 시스템을 연상케 한다.
2023.02.07 - [게임 리뷰] - 페르소나 3 FES (2007)
페르소나 3 FES (2007)
지난 15년간 JRPG의 트렌드를 이끈 프랜차이즈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페르소나다. 시작은 미미했다. 초기작 여신이문록 페르소나, 페르소나 2 죄・벌은 시장의 큰 반향을 끌어내지 못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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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퇴화되는 배틀 시스템
배틀 밸런스가 나빴던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나, 이번 작은 과해도 너무 과하다. 캐릭터성을 얻고 밸런스를 무너뜨린 메가진화, 다이제트의 정신 나간 성능으로 혹평을 받은 다이맥스보다 테라스탈이 갖는 구조적 결함이 훨씬 심각하다.
플레이어들은 타입을 예측할 수 없어 찍기 싸움을 강요받는다. 지금의 포켓몬 대전은 가볍게 즐기는 사람들이 할만한 컨텐츠가 아니다. 결국 코어 게이머만이 즐기는 컨텐츠인데, 실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운 게임을 혐오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무리 포켓몬이 운빨 게임이라지만, 명중률 80% 하이드로펌프가 빗나가는 것과 단순 찍기 싸움을 강요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소드・실드>의 배틀 시스템 '다이맥스'는 포켓몬 대전을 체급으로 찍어 누르는 양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테라스탈은 한 술 더 뜬다. 드래곤은 특정 상성에 매우 취약한 대신, 스탯이 괴랄하기로 악명 높은 속성이었다. 테라스탈은 드래곤의 체급은 살리되, 약점을 없애 전형적인 체급 망겜을 형성했다.
여기에 패러독스 포켓몬이 더해졌다. 메가진화와 달리 테라스탈은 모든 포켓몬이 가능하므로, 상대는 언제 테라스탈을 쓸지 모르는 불합리한 심리전을 강요받는다. 한 턴이 소중한 포켓몬 게임에서, 한 턴을 가볍게 날리는 시스템의 존재는 끊임없는 쉐도우 복싱과 같다. 마이너한 포켓몬은 더욱 보기 어려워졌고, 극소수의 선택받은 포켓몬들이 환경에 득세한다. 그 어느 때보다 체급으로 찍어 누르는 대전이 돼버린 것이다. <스칼렛・바이올렛>의 대전 양상은 역대 최악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팔데아 기행을 마치며
닌텐도 게임은 출시 초부터 높은 완성도를 보여왔다. 이 법칙이 게임프리크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게임 크러쉬 등의 치명적인 버그는 경험하지 못했으나, 자잘한 버그를 몇 번이나 경험했을 정도로 마감 상태가 형편없었다. 버그 외의 부자연스러운 깨짐 현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다. 안정된 프레임 방어는 사치다. 메모리 누수가 심한지, 쇼핑몰 리스트를 불러오는데 1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결국 기기를 리셋한 뒤에야 해결되었다...) 최적화 이슈는 배틀의 템포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러니 세간의 평가가 낮을 수밖에.
이제 지루한 야생 배틀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 필드에서 전투 화면으로 넘어가, 몇 번의 공방을 거치고 볼을 난사하는 것이 아니라, 필드에서 다이렉트로 몬스터를 잡는 방식이 오픈 월드에 적합한 방식이라 본다.
몇 차례나 지적을 받아온 템포는 <스칼렛・바이올렛>에서도 여전했다. 배틀 시스템은 시리즈의 전통이라 쳐도, 늘어지는 템포는 참기 어렵다. 느려터진 배틀 전환, 특성(쿼크차지, 틀깨기) 메시지, 배틀 애니메이션, 포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템포를 죽이고 졸음을 유발한다.
<포켓몬>은 유저 편의를 꾸준히 신경쓴 타이틀이다. 그럼에도 노력치는 끝내 개선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스탯을 직접 찍을 수 있게 만들고, 초기화 아이템을 넣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가. 기술 머신은 왜 소모품이 되었나. <아르세우스>에선 소리로 알 수 있었던 이로치 등장이, 이번 작품에선 눈 빠지게 맵을 쳐다보는 형태로 변화했다. 필드에서 카르본, 메테노 이로치를 어찌 구분한단 말인가.
전통이 발목을 잡는다면,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앞서 <레전즈 아르세우스>가 그러했듯이.
평가 점수 ★★
오픈 월드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완성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그래픽은 전작 <소드・실드>보다 현격히 퇴화했다.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던, 포켓몬으로 가득찬 세상이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 터다. 과거 그 많던 엔드 컨텐츠는 어디로 갔는가. 만듦새는 허접한데, 은근히 재미있어 착잡한 마음도 든다. 그만큼 기본 틀이 원체 탄탄하고, 오픈 월드와 <포켓몬>의 궁합이 환상적이란 소리다. 개발 기간이 충분했다면, 인력이 충분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뽑아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전 아르세우스>에서 이룩한 성과는 불과 9개월만에 자취를 감췄다. <스칼렛・바이올렛>만의 성과? 그런 게 딱히 있었나. 이래서야 후속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나만 더 덧붙이고 마무리하려 한다. 블루레크는 꼭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나. 샌드위치는 무슨 놈의 해괴한 컨텐츠인가. 전설 잡겠다고 서클미션 하다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테스트에 들일 돈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