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블레이드 크로스 (2015)
미라에 파견되다
《제노블레이드 크로스》와 두 개의 프런티어
- 이 게임을 플레이한 지도 꽤 오래됐다. 당시의 감각을 자세히 적어둔 기록은 없다. 대신 스크린샷이 수없이 남아 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세그먼트, 처음 만난 외계인, 관계가 갱신된 인연 맵, 어느 순간 도시에서 사라진 주민. 화면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내가 어디에 갔고, 누구에게 말을 걸었으며,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조금씩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이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도 플레이와 닮았다. 미라에서는 흩어진 정보와 흔적을 모아 행성을 조사했다. 지금은 스크린샷에 남은 대사와 장면을 모아 과거의 플레이를 다시 조사하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비와 엘마의 얼굴이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수면 캡슐에서 깨어났을 때, 미라는 어둡고 비가 내리는 땅이었다. 엘마를 따라 조금 걷자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비가 걷히고 녹색의 대지가 열린다. 저 멀리에는 뉴 로스앤젤레스가 보이고, 그 앞에서는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닮은 거대한 생물이 천천히 걸어다닌다.
For English Readers :Deployed to Mira: Xenoblade Chronicles X and Its Two FrontiersThis essay explores two frontiers in Xenoblade Chronicles X: the uncharted planet Mira and the evolving relationships of New Los Angeles. It focuses on exploration, the Wii U GamePad, Skells, alien immigration, and the side quests that examine labor, coexistence, memory, and identity. The discussion is primarily based on the original Wii U version, although some Definitive Edition images are used. Major side-quest and late-game spoilers are included. |
日本語の読者へ :ミラへ派遣される――『ゼノブレイドクロス』と二つのフロンティア本稿では、未知の惑星ミラと、NLAで変化していく人々の関係という二つのフロンティアを考察します。探索、Wii U GamePad、ドール、異星人の移住、そして労働・共生・記憶・アイデンティティを描くノーマルクエストが主なテーマです。 内容は主にWii U版を基準としていますが、一部にDefinitive Editionの画像を使用しています。サブクエストと終盤の重大なネタバレを含みます。 |


《쥬라기 공원》에서 처음 공룡을 목격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다만 여기서는 거대 생물 한 마리보다 그런 생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는 세계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컷신이 끝난 뒤에도 그 생물은 그 자리에 남는다. 초보자가 쓰러뜨릴 보스도 아니고, 이벤트를 장식한 뒤 사라지는 소품도 아니다. 당시의 나보다 몇십 레벨은 높았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았고, 강가에 머리를 숙여 물을 마셨다. 거대한 생물보다 먼저 기억에 남은 것은, 그런 생물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의 크기였다.
* 이 글은 《제노블레이드 크로스: 디피니티브 에디션》의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일반 퀘스트 및 게임 후반부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웅이기 전에 신입 대원
전작을 알고 있다면 캐릭터 작성 화면부터 노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정해진 주인공 슈르크 대신 직접 만든 아바타를 조작한다. 얼굴과 피부색, 눈동자와 머리 모양, 흉터와 화장, 성별과 목소리까지 고를 수 있다. 요즘은 싱글 플레이 RPG에서도 흔한 기능이지만, 처음에는 온라인 RPG를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감각은 오래가지 않아 강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었고, 나 역시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엘마에게 구조된 생존자는 NLA로 들어가 주민이 되고, BLADE에 가입해 연수를 받는다. 지정된 장소에 데이터 프로브를 설치하고, 유니온을 고르며, 공헌도를 쌓아 언젠가 돌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한다.
일반적인 JRPG라면 이쯤에서 특별한 힘이나 운명이 모습을 드러낼 법하다. 크로스는 조직에 가입하고 교육받으며 면허를 기다리는 과정을 먼저 보여준다.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되기 전에, 이민 사회의 구성원으로 등록하는 셈이다.
BLADE도 흔한 모험가 길드와는 성격이 다르다. 흰고래가 미라에 추락한 뒤 임시자치정부만으로는 물과 식량 확보, 치안, 생태 조사와 라이프 포인트 수색을 감당할 수 없었다. 군 출신 인원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의 업무를 나눠 맡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새로 들어온 아바타 역시 그중 한 자리를 맡는다.

소울 보이스에는 이런 집단적 감각이 전투 방식으로 들어가 있다. 혼자 조작하지만 전투 중 동료가 특정 행동을 요청한다. 엘마가 격투 아츠로 몰아붙이라고 외쳤을 때 그에 맞춰 움직이면 회복과 보너스가 생기고 인연도 깊어진다. 다른 사람과 실제로 협력하는 온라인 플레이는 아니지만, 파티원의 호출을 듣고 대응하는 호흡을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MMORPG를 닮았다고만 생각했다. 플레이할수록 다수의 구성원이 거대한 세계를 분담해 개척하는 감각을 싱글 플레이로 옮기려 했다는 인상이 강해졌다.
그런데 막 입사한 신입에게 주는 교육 자료가 지나치게 두껍다. 우선 고유 명사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흰고래와 라이프, BLADE와 유니온, 프런티어넷, 데이터 프로브, 세그먼트, FN 스폿, 오버드와 돌. 전투에서는 소울 보이스와 소울 챌린지, TP, 부위 파괴가 거의 같은 무게로 쏟아진다. 소울 보이스 설정 화면을 처음 열어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인 전투도 익숙하지 않은 시점에, 게임은 벌써 세밀한 반응 조건과 효과를 편집하라고 요구했다. 입사할 때도 이렇게 빠듯하진 않았는데.

유니온 선택도 비슷했다. 유니온 여덟 개를 오래 설명하길래 각자 별도의 활동과 공동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테니스를 칠까 사진을 찍을까, 어느 동아리에 들어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막상 들어가 보니 어느 유니온을 고르든 실제 업무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원래 하던 행동에 직함과 약간의 보너스가 붙는 정도였다. 긴 설명이 언제나 중요한 기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규칙은 별다른 경고 없이 숨어 있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은 나중에도 계속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도 초반에 들은 설정 대부분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엘마는 우주에는 우호적인 종족도 있고 그렇지 않은 생물도 있으며, 지나치게 호전적일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호적인 외계인은 실제로 NLA에 들어온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 생물이 있는가 하면, 시야나 기척으로 사람을 추적하는 생물도 있다. 초반 지역에는 지금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 돌아다닌다. NLA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말은 인연 맵과 수많은 퀘스트로 이어진다. 초반의 설명은 무겁다. 그래도 크로스는 자신이 말한 세계를 가능한 한 실제 플레이로 옮기려 한다.
가도 되는 곳과 갈 수 있는 곳
NLA로 향하는 길에서 엘마는 안전한 해안길을 알려준다. 절벽 아래에는 위험한 원시생물이 있고, 뛰어내린 뒤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경고한다. 그러고는 어떤 길로 갈지 선택하는 것은 당신이라고 덧붙인다. 절벽 끝에 투명한 벽은 없다. 바다로 떨어져도 되고, 아래쪽의 위험한 생물 사이로 들어가도 된다. 안내를 무시하면 고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 자체는 막지 않는다.
대화창에서 A와 B 중 하나를 고르는 자유가 아니다. 실제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며 결정한다. 위험을 감수한다면 다른 길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초반부터 직접 익힌다. 미라의 생태계는 주인공의 수준에 맞춰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다. 초반 몬스터 사이에 몇십 레벨 높은 개체가 섞여 있고, 그중에는 가까이 가는 순간 덮치는 기척 타입도 있다. 목표가 바로 앞에 보여도 강적이 그 사이를 순찰한다면 직선으로 달려갈 수 없다. 멀리 돌아가거나, 암벽의 틈을 타거나, 녀석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전투도 금방 끝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적을 모조리 쓰러뜨리면서 이동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지친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생물은 지나가고, 이길 수 없는 적은 피하며, 어그로가 끌리기 시작하면 일단 달아난다. 도망치는 법도 미라를 탐험하는 기술 가운데 하나였다.
아바타의 신체 능력은 이런 이동을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달리는 속도는 웬만한 탈것처럼 빠르고 지치지도 않는다. 점프력도 상당해서 바위와 경사면을 잘 비비면 정식 통로가 아닌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입구가 어디에 있을까?"보다 "여기서 잘 뛰면 저기까지 닿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더 자주 했다.
몇몇 FN 스폿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주변을 몇 차례 돌고, 바위의 작은 돌출부를 밟고, 경사면에서 수많은 점프를 거듭한 끝에 위쪽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제작자가 마련한 정식 경로였는지, 내가 억지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도착하고 나면 그런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원초의 황야는 이 몸의 사용법을 배우기에 좋은 장소다. 초원과 절벽, 해안과 호수는 지구의 풍경과 닮아 있다. 시야가 넓어서 멀리 보이는 산이나 거대한 생물이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가 된다. 인간이 살아볼 수 있을 듯한 친숙함이 있지만, 그 위를 돌아다니는 생물의 크기는 인간이 이곳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야광의 숲에 도착하면 같은 행성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원작을 플레이할 때 이곳에서 이 세계에 깊이 빠졌다는 감각이 남아 있다. 원초의 황야에서는 식물이 풍경의 일부였다. 야광의 숲에선 식물 자체가 길과 벽이 된다. 굵은 덩굴과 잎 위를 걷고, 속이 빈 거목을 통과하며, 땅과 생물의 경계가 흐려진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목적지는 바로 위에 있는데 길은 반대편으로 돌아가고, 아래쪽 통로를 따라갔다가 전혀 다른 구역으로 빠진다. 밤이 되면 식물들이 빛을 내며 숲 전체의 인상을 바꾼다.
원초의 황야에서는 멀리 보고 방향을 잡았다. 야광의 숲에서는 안으로 파고들며 통로를 읽었다. 한쪽에서는 광대한 세계 앞에서 작아지고, 다른 쪽에서는 세계 속으로 삼켜졌다. 같은 신체와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대륙을 읽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라를 손에 들다
퀘스트를 하러 이동하다 보면 저 멀리 붉은 빛기둥이 보인다. FN 스폿이다. 그러면 원래 가던 곳을 잠시 미뤄두고 저쪽부터 가보고 싶어진다. 가는 길은 대개 간단하지 않다. 고레벨 원시생물이 주변을 맴돌고, 물을 건너거나 바위를 우회해야 하며, 지금의 이동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도착해 A 버튼을 누르면 삐삐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이터 프로브 설치가 시작된다. 잠시 뒤 세그먼트 정보가 열리고, 그 장소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조사 거점이 된다.


웨이포인트를 하나 연 것처럼 보이지만 역할은 훨씬 넓다. 주변 정보를 수집하고 패스트 트래블 지점이 되며, 미라늄 같은 자원도 생산한다. 프로브의 종류와 배치에 따라 채굴량과 수익이 달라지고, 인접한 프로브를 연결하면 생산 효율이 올라간다. 여기서 얻은 자원은 장비 개발과 돌 연료, 암즈 컴퍼니 지원에 들어간다.
프런티어넷을 넓힌다는 것은 장소를 발견하는 동시에 그곳을 경제와 산업 구조에 끌어들이는 일이다. 눈앞에 구름 뒤로 두 개의 달이 떠 있고, 오로라가 내려앉고, 거대 생물이 돌아다닌다. 프런티어 네비를 열면 같은 장소에 산출력 A와 수익력 F라는 평가가 붙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한 직후, 어디에 채굴 프로브를 꽂으면 효율이 좋을지 계산하게 된다. 탐험가와 개발자의 시선이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양면성은 Wii U 게임패드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TV 화면에는 캐릭터가 걷고 싸우는 미라가 있었다. 손에 든 게임패드에는 세그먼트 지도와 프로브 네트워크, 조사율과 자원 정보가 계속 떠 있었다. 눈앞의 산과 생물을 보고, 고개를 내려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고, 다시 화면을 보며 방향을 수정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프로브를 설치해 그 장소를 조사망에 연결한다.

군대에서 훈련할 때 비슷한 구조를 경험한 적이 있다. 단말기에서 좌표를 확인한 뒤 고개를 들어 실제 산과 길을 본다. 지도와 지형을 대조하며 이동하고, 도착한 장소를 단말기에 등록한다. 그 기억 때문에 미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관광객이나 모험가보다는 현장 요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느꼈다. 나는 미라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미라에 파견되었다.
게임패드의 세그먼트 지도는 지형을 그대로 축소한 그림이 아니다. 행성을 육각형 조사 단위로 잘라놓은 행정 지도에 가깝다. TV에는 아직 인간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은 자연이 있었고, 손에는 그 위에 덧씌운 조사망이 있었다. 두 화면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에 프로브 설치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작업보다, 야생의 공간을 하나씩 네트워크화하는 업무처럼 느껴졌다.
DE버전은 원작의 다양한 편의를 후대에 개선한 작품이다. 그러나 기기의 한계로 현장을 보다가 손에 든 단말기를 흘끗 내려다보는 원작의 촉감까지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닌텐도 스위치에는 스크린을 지원하는 게임패드가 없으니 말이다.
프런티어넷은 도시에서 들은 이야기와 현장도 이어준다. 주민들의 자동 대화에서 중요한 정보가 들리고, 특정 생물이나 보물, 날씨에 관한 소문이 새로운 조사 대상이 된다. 나는 날씨에 따라 명중률과 공격력이 몇 퍼센트 달라지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특정 날씨에만 나타나는 오버드를 나는 기억한다. 비가 대미지를 얼마나 줄이는지는 잊어도, 비가 와야 만날 수 있는 생물은 기억에 남는다.
도시 안에 있던 두 번째 프런티어
미라에서는 지형과 생태를 살핀다. NLA로 돌아오면 사람과 관계가 조사 대상이 된다. 인연 맵은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하는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기록한다. 처음에는 보기 좋은 관계도처럼 보이지만, 주민들의 말과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문구가 바뀌고 새로운 연결이 생긴다. 누군가 죽으면 관계도 죽음으로 완결되거나 끊어진다.
미아와 월터 교관은 이런 구조를 이해하기 좋은 사례다. 미아는 원래 메카닉이지만 BLADE로 전속하고 싶어 한다. 월터가 적성 시험에서 계속 불합격시켰다며, 자신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거냐고 불평한다. 들끓는 모험심, 열정, 누구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 싶다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결국 나는 장비를 챙겨주고 그녀가 NLA 밖으로 나가는 일을 도왔다.
월터는 미아의 대사에만 존재하는 이름이 아니다. NLA 격납고에 실재하는 인물이고, 돌 라이선스를 담당하는 교관이기도 하다. 미아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덜컥 화부터 내지 않았다. 임무 중에 만나거든 죽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이후 미라 곳곳에서 사고를 치는 미아를 보며 월터가 왜 계속 불합격시켰는지 이해하게 됐다. 미아의 이야기 안에서는 꿈을 막는 고지식한 교관처럼 보였던 사람이, 다른 주민의 대사와 미래의 사건을 거치자 무모한 사람의 생존을 걱정한 책임자로 다시 보였다.
NLA의 주민은 자기소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평가가 나중에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따라가야 한다.
미아와 월터의 사례처럼, 주민들의 모든 삶이 퀘스트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센트럴 라이프에 남은 딸을 기다리는 리베아나처럼, 끝내 해결되지 않는 부재도 도시 한구석에 남아 있다. 퀘스트 중에도 특별한 반전이나 죽음 없이 가게에서 일하고, 실수를 수습하고, 직원을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민이 있어야 NLA가 사건만 발생하는 퀘스트 허브에서 벗어난다. 다만 새로운 대화가 생겼는지 알려주는 표시는 없다. 대화 패턴은 굉장히 많은데 갱신 여부를 확인하려면 직접 찾아가 말을 걸어야 한다. 놓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잘 떨치지 못했던 나는 같은 도시를 계속 돌며 사람들을 확인했다. 관계가 풍부할수록 확인해야 할 항목도 늘어났다.
이쯤에서 두 시스템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데이터 프로브는 미라의 빈칸을 채우고, 인연 맵은 사람들 사이의 빈칸을 채운다. 미라에는 아직 지도에 기록되지 않은 대지가 있고, 아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몸의 단위가 바뀌면 세계도 달라진다
게임을 시작한 직후부터 돌은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탑승형 로봇이 NLA를 돌아다니고, 언젠가 나도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실제로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 BLADE 대원이 되어 공헌도를 쌓고 여러 임무를 수행한 뒤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한다.


광고나 스크린샷에서 로봇에 끌린 사람이라면 이 기다림이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만큼 이 게임의 로봇 주행은 멋지다. 정식 한국어판이 나오기 전에도 커뮤니티에는 돌의 화려한 기동을 담은 움짤이 종종 올라왔다. 면허시험의 내용도 기대와 달랐다. 돌을 직접 몰아보는 실기 대신 프로브 설치, 원시생물 토벌, 수집품과 프런티어 네비 수익을 요구했다.
로봇 조종 시험을 기대했는데, 실제로 받은 것은 BLADE 업무 종합평가였다. 세계관 안에서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돌은 주인공만을 위해 준비된 건담이 아니고, 조직에서 관리하는 고가의 장비다. 다양한 현장 업무를 혼자 처리할 수 있는 대원인지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종합 자격시험에 가깝다.
그렇다고 시험이 재미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다면 주행 시험과 전투를 배우는 시험 하나쯤은 있었어야 했다. 돌을 얻은 뒤의 변화는 그 불만을 잠시 잊게 할 만큼 강했다. 인간에게 벽이었던 지형이 낮은 발판이 되고, 무엇보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 작은 원시생물은 덜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곧 돌의 크기에 맞는 거대한 적과 마주친다. 내가 강해졌다는 감각보다는 세계의 단위 자체가 달라졌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
백목의 대륙은 이 새로운 신체에 특히 잘 맞는다. 하얀 평원 때문에 얼핏 설원처럼 보이지만 눈밭은 아니다. 거대한 식물 구조물이 땅에서 솟아 있고, 그 모양은 나무보다 산호와 뼈, 탑이나 산맥에 가깝다. 야광의 숲에서 식물이 벽과 통로로 쓰였다면, 백목에서는 산과 지평선을 만든다.
맨몸으로 걸으면 장소와 장소 사이가 지나치게 멀게 느껴진다. 돌에 올라타자 넓은 간격과 높낮이가 비로소 자연스러운 이동 공간으로 보인다. 백목의 대륙은 돌을 얻은 사람의 새로운 신체를 기준으로 펼쳐진 광야처럼 보였다.


맨몸일 때 야광구는 하늘에 떠 있는 배경이었다. 돌을 얻은 뒤에는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고, 플라이트를 얻은 뒤에는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그 내부의 천장에는 레벨 97 오버드 '아득한 왕비 파르시스'가 매달려 있다. 멀리서 아름답게 빛나던 구체가, 마침내 도달했을 때는 미라에서도 손꼽히는 포식자의 둥지로 바뀐다.
플라이트가 길찾기를 망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금 시점이 늦어서 이미 맨몸과 돌로 지형을 충분히 배운 뒤였다. 비행은 이미 익힌 세계를 위에서 다시 보고, 하늘섬처럼 이전에는 닿을 수 없었던 미지를 회수하는 최종 보상으로 느껴졌다.

맨몸으로는 장소를 배웠고, 돌로는 대륙을 순찰했으며, 비행으로는 그 구조를 다시 이해했다. 아쉬웠던 것은 음악이다. 원작에서는 플라이트 모듈을 얻은 뒤 점프가 곧 비행으로 이어졌다. 낮은 턱 하나를 넘으려다 갑자기 플라이트 음악이 울릴 때도 있었다. 예컨대 야광의 숲을 날아다니는 동안에는 야광의 숲의 음악을 듣기 어려웠다. 공간은 자유로워졌지만, 대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소리는 플라이트의 테마에 자주 덮여버린다.
이주가 생활이 될 때
NLA는 지구에서 탈출한 인간들의 피난 도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 논인, 노폰과 바이어스인, 오르페인과 자르보가인 등 여러 종족이 들어온다. 외계 종족의 이주는 도시의 풍경보다 생활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인간의 음식을 먹고 옷을 사며, 가게에서 일하고 기업을 세운다. 이주민의 협력으로 새로운 기술이 생기고, 전에는 없었던 성공과 과로, 범죄와 갈등도 따라온다. 아미 피자는 이런 변화를 가장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여준다.
아미 피자는 손님이 별로 없는 작은 가게다. 카밀라는 언젠가 미라 어디에서나 편하게 피자를 먹을 수 있게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혹시 피자를 주문하는 메뉴가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당연히 그런 기능은 없었다.
마 논인들이 NLA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피자에 열광하고, 아미 피자의 주문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처음에는 외계인이 피자에 환장하는 종족 코미디로 보였다. 게다가 인간의 입장에선 상상하기 힘든 괴식을 요구한다. 초콜릿 피자라니 그게 뭐람. 가게 주변에서 피자를 찬양하는 마 논인을 볼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카밀라의 꿈도 이루어진 듯했다. 더 많은 사람이 미라에서 피자를 편하게 먹게 됐다. 그러나 가게의 인력과 운영 능력은 그대로였다. 배달은 밀리고, 고객 불만은 늘어나며, 카밀라는 무리해서 요구를 처리한다. 일반 대화를 다시 확인해보니, 그녀가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는 징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 카밀라는 사라졌다. 남편 파웰의 짧은 말과 인연 맵의 변화를 통해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를 놓쳤나 싶었다. 사망 장면도 못 봤고, 퀘스트도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카밀라를 구할 수 있는 퀘스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피자를 편하게 먹는 사람은 늘었지만, 피자를 배달하는 카밀라의 삶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파웰은 아내를 무너뜨린 노동환경과 인력 부족, 과도한 책임감과 가게 운영의 실패를 돌아보지 않는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외부 집단인 마 논인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인간과 외계인을 이어주던 피자는 이후 독을 넣어 외계인을 살해하는 도구가 된다. 그 과정에서 단골이었던 인간까지 희생시키면서 인간을 위한 복수라는 명분도 무너진다.
마 논인의 피자 예찬은 가벼운 농담이었다. 크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외계 종족의 새로운 소비 문화가 실제 수요와 노동을 만들었을 때 도시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까지 상상했다.
비아노 정수장도 도시의 시간이 축적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시설 건설을 놓고 연구원들이 논쟁한다. 결국 정수장이 세워지고 운영되지만, 종교 사기와 오염, 원시생물에 의한 재난과 보안 실패가 벌어진다.


사고가 실제로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은 뒤, 그녀는 정수장을 없애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정수장의 운영자가 된다. 로지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걱정했던 위험을 이제 자기 책임으로 끌어온다.
마 논인에게 인간의 속옷을 팔려던 시도는 신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실패한다. 이후 인간과 마 논인은 서로의 감각을 섞어 향수를 공동 개발한다. 손님이었던 외계인이 상품을 함께 만드는 사람으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노폰 라나는 남편 몰래 다른 남자와 도망친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한 막장인데, 관계를 이어가려고 봉제인형을 아이로 속인다. 대체 어디까지 가나 궁금해 불륜을 용인하는 선택을 눌렀다가, 마지막 봉제인형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막장 전개를 구경하고 싶어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싶었다.

거짓을 폭로하지 않으면 인연 맵에는 그 기만 위에 세워진 새 삶이 기록된다. 인연 맵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관계가 정직하거나 건강한지까지 판정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황당한 치정극이 끼어 있기 때문에 외계 종족은 공존을 상징하는 숭고한 존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장사하고, 실수하고, 바람을 피우며,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이용하는 피곤한 이웃이 된다.
NLA가 변한다는 것은 주민의 종족이 다양해진다는 뜻만이 아니다.
음식과 상품, 노동과 기반 시설, 성공과 비극이 함께 늘어난다는 뜻이다.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다르다
히메리는 NLA에서 성녀로 불린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물론, 어떤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선의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히메리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이 무엇을 노리는지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매니저 오르넬라는 그 선의를 이용한다. 그녀는 이익을 위해 접근한 사람들을 팔아넘긴다.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히메리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고 손을 내민다. 오르넬라는 그 손을 잡지 않고, 히메리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처음 장면을 봤을 때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속죄처럼 보였다. 생각할수록 인상은 달라졌다. 후회했다면 처벌을 받으며 살아남거나, 히메리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길도 있었다. 오르넬라는 자신의 죽음으로 대화를 끝냈고, 히메리가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죽음은 속죄이면서 동시에 마지막까지 히메리에게 무게를 떠넘기는 행동처럼 보였다.
이후 히메리는 자기 선행 전체를 의심한다. 정말 상대를 위해 도운 것인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려 한 것은 아닌지 흔들린다. 변화는 정답을 찾고 다시 완벽한 성녀가 되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과거에 히메리에게 도움받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돌아와 그녀를 돕는다. 늘 남을 구하던 사람이 자신도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배운다. 그제야 히메리는 성녀라는 역할에서 조금 벗어나 NLA에 사는 한 명의 주민이 된다.


프레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재난을 신의 기적으로 해석하고, 불안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신만이 특별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물을 오염시킨 뒤 병에 걸린 자들에게 치료와 구원을 판매한다. 히메리가 실패를 겪고 타인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운다면, 프레지는 구원을 독점해 타인을 통제한다.
슬랩티는 선의보다 훨씬 불편한 문제를 들고 NLA에 들어온다. 그녀는 암굴의 일족 전사이며, 그로우스의 명령을 거부해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그렇다고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NLA 공격에 실제로 참가했고, 암굴의 일족이 그로우스의 무기를 받아 거목의 일족을 학살한 사실도 인정한다. 자기 부족이 전쟁과 약탈을 즐겼으며, NLA에 들어가더라도 다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고 먼저 경고한다.
망명을 청할 사람의 대사치곤 전혀 겸손하지 않다. 정말 받아달라는 건지 싸우자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바로 그 불손함 때문에 고백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불쌍한 피해자로 보이기 위해 자기 과거를 축소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 알고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 셈이었다.


슬랩티는 부하들을 먼저 피신시키고 혼자 남아 시간을 번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인간의 치료를 받아들이고, 결국 슬랩티 부대는 NLA로 망명한다. 행정부는 그들을 보호하기로 하지만 그로우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바이어스인 연구에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도 있다. 이미 거목의 일족이 정착한 도시에서 암굴의 전사들이 편하게 살 수 있을 리도 없다.
NLA는 문을 열어줬지, 과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후속 사건에서 슬랩티와 부하들은 적이 판매한 슈트에 조종당해 BLADE와 거목의 일족을 공격한다. 피해자인 거목 전사는 길길이 날뛰다가도, 나중에는 조종당했다는 설명을 믿는다. 그래도 과거의 학살까지 용서하지는 않는다.
곧바로 슬랩티 편을 들어 피해자를 억누르면 두 부족은 계속 적대한다. 슬랩티에게 먼저 피해자와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 뒤에도 슬랩티는 여전히 난폭하다. 그로우스에 복수하러 다니며 누가 적을 먼저 쓰러뜨리는지 경쟁하고, 실패하면 부하와 지옥 훈련을 하겠다고 이를 간다. 온순한 시민으로 교정되는 서사가 아니라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달라진 것은 성격보다 싸울 대상을 고르는 권리다. 그로우스의 명령에 따르던 병사가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훨씬 뒤의 전투에서 결과로 나타난다. 화해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았다면 거목의 일족은 원시생물 무리와 싸우고 끝끝내 피해자가 생긴다. 갈등을 잘 조정했다면 슬랩티가 암굴의 일족을 이끌고 참전한다. 과거 자기 부족이 학살했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싸운다.
슬랩티는 과거를 청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책임이 계속 무겁게 따라다닌다. 그녀는 과거의 적을 구하러 전장에 나타나는 행동으로 책임을 보인다. 망명은 죄를 지워주는 절차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당장 배제하거나 죽이는 대신, 그가 과거를 책임지고 행동으로 증명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자르보가인은 반대편에서 NLA의 공존을 시험한다. 그들은 특수한 슈트 덕분에 위험한 환경에서도 활동할 수 있지만 전투 능력은 거의 없다. 그로우스는 이 특성을 이용해 위험 지역 조사에 내몰았고, 많은 동료가 죽었다. NLA로 망명한 뒤에는 인간에게 유해한 폐기물을 자기들의 생명 자원으로 바꾸는 리볼턴트에 전념한다.


자르보가인이 리볼턴트할 때의 반응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행복하다. 며칠 굶은 사람이 눈앞의 음식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 볼턴트를 발견하면 거의 뽕이라도 맞은 것처럼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웃기면서도, 저 욕구를 누군가 이용하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로즐은 정확히 그 생각을 사업으로 옮긴다. 자르보가인을 사실상 납치해 위험 물질을 처리하게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고급 볼턴트를 리볼턴트하게 해줬으니 로즐은 훌륭한 친구라고 말한다. 옆에서 듣던 로즐조차 "진짜 얼빠진 녀석들이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 장면은 우습게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곱씹어보면 묘한 질문을 남겼다. 자르보가인이 볼턴트를 흡입하며 즐거워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욕구가 너무 강해 상황을 판단하거나 거절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면, 그 만족을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 역시 인간의 기준으로 그들의 욕구와 선택을 재단한 판단일지 모른다.
적어도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만족과 동의는 같은 말이 아니다. 그로우스의 강제노동에서 벗어난 뒤에도, NLA에서는 상호이익과 사업이라는 말로 다시 이용될 수 있다. 도시가 외계인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들을 유용한 종족 기능으로만 보지 않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거리가 있다.
몸과 이름과 기억은 사람을 만드는가
에리오는 죽은 인간 스리엘라의 외형과 신분을 훔쳐 NLA에 잠입한 데피니언이다. 그녀의 임무는 지구인의 본거지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 신뢰를 얻으려면 주민들의 고민을 듣고 도와야 했다. 에리오는 필요한 물건을 찾아주고, 지구 문화를 배우며, 좋은 이웃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역할을 오래,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처음에는 연기였던 관계가 실제 애착으로 변한다. 그녀는 결국 동족의 테러를 방해하고 인간을 지키려 한다.

침투에 서툴러 임무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사회에 너무 깊이 스며든 끝에, 임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자신이 생겨났다. 에리오는 스리엘라가 아니다. 그러나 스리엘라의 얼굴로 살아가는 동안 이전의 에리오와도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시작이 거짓이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맺은 관계까지 모두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엘브는 에리오와 달리 이름보다 기억이 조작된 경우다. 그는 망각의 계곡에 흩어진 옛 파트너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친구가 어떻게 추락하고 죽었는지를 복원하며 애도하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받아들인 뒤 주인공을 새로운 파트너로 받아들인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는 상실을 극복하는 비교적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퀘스트 끝의 장면은 앞선 이야기를 통째로 흔든다. 계획을 제2단계로 이행한다. 우려됐던 의사 기억은 안정 영역에 도달했다. 제3자의 협력 덕분에 인격의 고정화에도 성공했다. 앞으로 이것을 마스터피스로 삼아, 양산 중인 보디의 기본값으로 삼는다. 정비 캡슐 안의 이엘브와 똑같이 생긴 몸이 들어 있다. 엘레오노라는 보고를 마친 뒤 혼자 NLA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친구로서 도왔던 행동이 보고서 속에서는 "제3자의 협력에 의한 인격 고정화"로 정리된다. 그 표현을 보는 순간 허탈했다. 방금까지 한 사람의 애도와 우정을 지켜봤는데, 누군가에게는 성공적인 실험 결과였던 셈이다. 그래도 기억이 인공적이라는 사실이 감정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이엘브가 느낀 상실과 주인공에게 보인 신뢰는 그가 실제로 겪은 현재였다. 기억이 가짜여도 애도는 진짜였다.
앞의 두 이야기가 몸과 기억의 진위로 한 개인의 정체성을 흔들었다면, 오르페인은 기억의 계승이 종족 전체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성별 번식 대신 분열로 후손을 만든다. 죽어가는 개체가 사라지면 두 분열체가 지식과 기억 일부를 이어받는다. 체내의 오버는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충동을 전달하고, 오르페인은 그 목소리를 종족의 의지로 받아들인다.


개체는 종의 지속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다. 나는 오르페의 윤리를 앞선 퀘스트에서 목격했다. 그러던 중 붉고 더듬이가 다른 오르페인, 통칭 β체 넨오살라그가 태어난다. 넨은 오버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기 이름을 붙여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에는 위험 감각 없는 사고뭉치처럼 보였다. 거대 생물을 조사하겠다며 무턱대고 접근하고, 구해주자 폭력을 썼다고 타박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을 확률은 87퍼센트였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다행히 완전히 고집불통은 아니어서, 실패 뒤에는 연구 방법을 수정해야겠다고 말한다.
넨의 탄생은 단순히 외형이 다른 변종이 생긴 사건이 아니다. 집단의 명령 아래 움직이던 종에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먼저 묻는 개체가 나타났다. 기존 개체 난오살라그도 영향을 받는다. 기존 오르페 사회에서는 한 개체의 죽음도 기억과 지식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종의 순환 속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그는 넨을 걱정하고,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종족 생존과 무관한 애착을 느낀다.
넨은 그 감정을 빠르게 알아채지만, 낭만적인 관계로 받아들이기보다 난오살라그를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취급한다. 사랑을 이해한 신생 개체가 사랑에 빠지는 대신 사랑에 빠진 상대를 관찰한다는 점이 우스웠다. 인간식 연애로 곧장 번역되지 않는 오르페다운 거리감도 남는다.


분열과 기억 계승만 생각하면 넨이 사라져도 종 전체는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난오살라그에게 넨은 다른 분열체로 대신할 수 없는 특정한 존재가 된다. 그가 느낀 감정은 종의 존속보다 한 개체의 생존을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개체 차이가 늘어나자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른 판단이 나오기 시작한다. 개인의 호기심과 감정으로 시작된 변화는, 오버의 명령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지를 둘러싼 정치적 이견으로 번진다.
나중에는 β체들이 오버의 명령을 거부하고 야광의 숲으로 향한다. 오버가 두려워하던 것은 테레시아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아주 흉포한 녀석이었기에 경고 자체는 옳았다. 자유를 택한 반오버 세력은 그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이 갈등은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억압을 단순하게 나누기 어렵다. 오버는 과거의 위험을 기억하는 생존의 본능이다. 동시에 기억을 설명하지 않고 금지만 반복하면서 새로운 판단을 막는다.
플레이어가 그대로 돌아가면 그들의 죽음은 명령을 어긴 자들이 자초한 결과로 기록된다. 반대로 테레시아를 쓰러뜨리고 룬오토남의 오른팔을 회수하면, 그 안에 남은 기억과 질문이 사회에 전달된다. 기존 지도자는 오버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미라에 존재하며, 앞으로는 계승된 기억과 새로운 판단을 함께 사용해야 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처음 이 퀘스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다른 노멀 퀘스트가 거의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레벨 99 종언의 테레시아, 상대하기엔 너무나 벅찬 녀석이다. 그러나 이 종족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면 단순히 옳은 선택지를 고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질문을 증명할 전투력과 증거가 필요했다.


테레시아를 해치워도 룬오토남은 살아나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그녀의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플레이어는 생명을 되돌리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질문이 어리석은 반역으로 기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르페인은 인간을 닮아가는 종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목소리를 따르던 종이 서로 다른 욕망과 판단을 가진 개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변해간다. 에리오에게 거짓은 이름과 외형에 있었고, 이엘브에게는 기억에 있었다. 오르페인은 죽은 개체의 지식과 기억을 두 분열체에게 나누어 전한다. 그러나 같은 선조에게서 갈라져 나온 둘도 서로 다른 기억을 물려받고, 태어난 뒤에는 각자의 경험과 욕망을 쌓는다. 기억은 이어지지만, 같은 사람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세 사례에서 몸과 이름, 기억은 정체성의 출발점이지만 결론은 아니다. 에리오는 빌린 얼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고, 이엘브는 주입된 기억 위에서 실제 애도와 신뢰를 경험했다. 오르페의 후손들도 이어받은 기억에 머물지 않고 각자의 선택을 시작한다.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위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누구와 관계를 맺는지가 존재를 계속 바꾸어간다.
세계를 너무 많이 만든 게임
《제노블레이드 크로스》에는 많은 마찰이 있다. 그중 일부는 세계를 경험하는 데 꼭 필요하다. 강적을 피해 우회하고, 절벽의 경사를 살피고, 특정 날씨를 기다리며, 주민에게서 들은 말을 기억하는 과정은 미라와 NLA를 이해하게 한다. 세계가 곧바로 길을 내주지 않기 때문에 관찰하고 판단하는 습관이 생긴다. 그 의미가 메뉴와 규칙의 번거로움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작에서는 파티원을 바꾸려면 NLA 곳곳에 서 있는 동료를 직접 찾아가야 했다. 동료가 메뉴 속 아이콘보다 실제 주민처럼 느껴진다는 장점은 있었다. 하지만 파티 밖 인물은 경험치를 얻지 못했고, 메인 미션은 엘마와 린을 고정으로 요구하곤 했다. 다른 캐릭터를 키우려면 파티에 넣어야 하는데 매번 찾아가야 하고, 자리도 별로 없고, 성장도 멀어졌기 때문에 나중에도 데려가기 어렵다. DE에서 괜히 개선된 게 아니다.

인연 미션은 시작하면 포기할 수 없다. 다른 중요 미션도 받을 수 없어서, 현재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퀘스트를 잡으면 끝낼 때까지 진행이 묶인다. 비교적 초반에 열리면서 후반 대륙까지 보내는 히메리의 인연 미션(NLA의 성녀)은 이 경직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힘들게 지형과 강적을 통과해 트레저 앞에 도착했는데 필드 스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시간대가 다른 주민을 만나기 위해 벤치를 찾아야 했고, 대화가 갱신됐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선택에 따라 주민이 죽고 관계가 끊기는 작품인데 세이브 데이터는 하나뿐이었다.
미라의 적과 지형은 나를 시험해도 된다. 그러나 메뉴와 행정 절차까지 시험에 들게 할 필요는 없다. 훗날 발매된 DE는 여러 문제를 보완한 결정판이다. 그런 DE조차 퀘스트 하나에 진행이 묶이고, 같은 도시를 반복해서 순찰했던 경험까지 보완하지는 못했다.
전투도 깊이와 설명이 서로 어긋난다. 소울 보이스와 TP, 부위 파괴, 클래스와 장비 조합, 오버드라이브에는 파고들 여지가 많다. 무엇부터 이해해야 하는지는 좀처럼 알려주지 않는다. 차이가 작은 유니온은 오래 설명하면서 전투의 중심인 오버드라이브는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 미라의 비밀을 해독하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많다. 전투 규칙까지 암호처럼 풀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메인 스토리 역시 재료는 부족하지 않다. 지구의 멸망과 범이민 계획, 흩어진 라이프홀드, 인간을 추격하는 그로우스와 엘마의 과거,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균열에는 흥미로운 SF 설정이 충분하다. 라오의 배신도 모든 생존자가 같은 희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좋은 설정이 좋은 전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컷신은 느리고, 타츠를 음식으로 취급하는 농담은 여러 번 반복된다. 브리핑도 길다. 대사를 한 줄씩 넘길 수 없어서 지루한 구간을 건너뛰려면 장면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 (심지어 DE도 마찬가지다.) 메인뿐 아니라 아직 관심이 생기지 않은 동료의 인연 미션도 같은 방식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멀 퀘스트를 좋아한다. 컷신이 별로 없기에 내가 이야기를 읽고, 나만의 속도로 넘긴다. 메인과 인연 미션에서는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기다렸다.
미라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컷신에서는 대사 한 줄도 앞서갈 수 없었다. 공간에서는 사람을 믿고 자유롭게 풀어주면서, 이야기의 속도는 풀어줄 생각이 없다. 가장 좋은 이야기가 노멀 퀘스트와 일반 대화에 몰린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여주려 할 때보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관찰하게 할 때 훨씬 강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노블레이드 크로스》는 생각이 부족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세계 안에 담으려 했다. 주민마다 관계와 후일담을 만들고, 대륙마다 다른 이동 감각을 설계했으며, 그 모든 변화를 시스템에 기록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무엇을 뒤로 미룰지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 미라의 삶을 발견하는 기쁨은 종종 파티를 다시 꾸리고, 갱신된 대화를 찾아다니고, 퀘스트 조건을 확인하는 일로 바뀐다. 살아 있는 세계를 만들려던 야심이, 플레이어에게 그 세계의 행정까지 떠맡겼다.
퀘스트 마커가 사라진 뒤
게임 후반, NLA의 노멀 퀘스트 마커가 하나둘 줄어드는 것을 보며 실망했다. 경험치나 장비를 더 얻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르보가인이 NLA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 β체가 늘어난 오르페 사회가 어디로 갈지, 암굴과 거목의 일족이 정말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피자가게와 정수장, 평범한 카페의 사람들에게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더 보고 싶었다.
보통 RPG에서 사이드 퀘스트는 세계의 빈 공간을 채우는 부가 콘텐츠다. 이 작품에서는 그곳에 도시의 현재와 미래가 있었다. 생활극과 블랙코미디, 노동 비극과 종교 사기, 망명과 전쟁 책임, 거짓 신분과 인공 기억, 생식과 정치혁명이 서로 다른 규모와 정조로 이어진다. 몇 개의 뛰어난 퀘스트만 골라 기억하는 작품과는 다르다. 사례가 계속 쌓이면서 NLA라는 도시 자체가 변해간다.
개발진은 거대한 행성을 만든 뒤 퀘스트를 흩뿌린 것이 아니다. 인간과 외계 종족이 그 행성에서 실제로 함께 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집요하게 상상했다.
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지나치게 험하다. 불필요한 편성 절차와 설명 부족, 포기할 수 없는 미션과 느린 컷신이 작품의 핵심 경험을 직접 가로막는다.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불편도 있지만, 상당수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설계에 가깝다.
그런데도 미라와 NLA는 오래 남는다. 손에 든 단말기로 행성을 측량했던 경험, 맨몸과 돌과 비행에 따라 같은 장소가 새롭게 보인 순간, 별것 없어 보이던 주민의 대화가 몇 장 뒤 죽음과 변화로 돌아온 사건, 외계 생물의 변이가 사랑과 정치사상으로 발전하는 퀘스트. 더 매끄럽게 만들어진 작품은 많아도, 이 경험들을 하나로 묶어낼 작품은 떠오르지 않는다.
《제노블레이드 크로스》가 컬트 명작으로 남은 것은 결함이 작아서가 아니다. 이 작품의 성취를 대신할 다른 게임이 없기 때문이다. 게임을 떠난 뒤에도 그곳에서 계속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세계는 오래 남는다.
★★★★☆